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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Mar 06. 2021

기억이 났어 #006

삽교천 택시의 미스터리


다음 주 외할머니 생신이라는 호출을 받았다. 차가 없던 때라 외가에 가려면 고속버스를 타야 했다. 운전이 취미이자 개인택시를 하시는 아버지께서 종종 데리러 오시기도 했지만 그때는 1남 4녀 중 집 밖에 사는 사람이 나뿐이라 택시에 앉을자리가 없었다. 강제로 고속버스 당첨.


이십 대 중반이 다 되도록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삽교천에 가본 적이 없었다. 오해는 마시라. 공주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성남-서울-공주 그리고 갈 수 있는 곳은 열심히 다녔다. 외가는 보통 가족단위로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내가 삽교천에서 홀로 하차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정류장의 위치가 어디인지, 거기에는 버스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운정리까지는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차라리 걸어가라면 그 길이 어딘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대중교통체계가 없는 것에 가까운 그곳. 삽교천.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우리 외가는 당진이다. 그리고 당진중에 아산과는 가깝고 당진시내와는 먼, 섬과 같은 곳, 신평면 운정리. 한 번 언급한 인주 사거리를 거치면 길이나온다. 샛길로 들어가야 한다. 낡은 팻말을 끼고 왼쪽으로 들어간 다음, 우회전을 해서 또 한참을 들어가서.. 집을 네 군데 정도 지난다. 그러다 보면 멀리 소나무 한그루가 보이고, 여덟 명 정도가 윷놀이를 할 수 있는 큰 평상 하나가 그 아래 있다. 평상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언덕! 햇빛이 기가 맥히게 잘 들어오는 주택. 외할머니 댁이다.


운전을 해도 헷갈리는 길을 대중교통으로 어떻게 찾아가. 답답한 마음에 엄마한테 전화했다.


나: 내일 나 데리러 오면 안 된대?

엄마: 아빠가 택시에 자리 없대.

나: 그럼 어떻게 해?

엄마: 버스 타고 택시 타.

나: 택시정류장은 어딘데?

엄마: 근처에 있어.

나: 택시 타면 뭐라고 말해?

엄마: 김경래(외할아버지 존함)씨 댁 가달라고 하면 돼.

나: 그게 뭐야. 주소를 알려줘야지.

엄마: 그렇게 하면 안 가는 택시 없어.

나:???

엄마: 내일 봐.


엄마는 쿨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날이 왔다. 약간 긴장했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느낌이라. 삽교천행 고속버스를 탔다. 당진 터미널 전 간이정류장에 세워준단다. 졸고 있으면 안 된다. 기사 아저씨가 "삽교천이요." 하면 바로 일어나서 "접니다!" 하고 내려야 한다. 안 그러면 당진 시내 직행이다. 버스에서 잘 졸기로 소문난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핸드폰을 들어 폴더를 열고(이해해달라 내가 나이가 많이 먹어서 20대에 폴더를 사용했..) 밍글맹글을 하면서 졸음을 참았다. 그리고 기사 아저씨가 "삽교천이요~" 하는 순간 "저요!" 하고 반장 선거하듯이 손을 들고 버스 앞으로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버스에서 내렸다. 중요한 퀘스트를 하나 끝냈다. 뿌듯했다.


자, 택시를 탈 차례. 외할아버지 이름을 대면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삽교천 모든 택시가? 참 나. 매표소로 들어가니 손으로 쓰여있는 버스 시간표. 약 1990년의 버스정류장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뒤로한 채, 매표소에 앉아계시는 아주머니께 여쭸다. 택시 어디서 타요?


아주머니가 말하기 전에, 뒤에 있던 한 아저씨가 나를 툭툭 쳤다. 인상 좋게 생긴 아빠뻘 되시는 분이었다.


기사님: 어디 가?

나: 아.. 그.. 운정리..

기사님: 누구네?

나:??


잠시 당황했지만 외할아버지 성함을 말하면 정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희망이 생겼다. 외할아버지의 존함을 직접적으로 불러본 적이 거의 없는 나는 조심스럽게 외할아버지 함자를 말했다. 기사님은 세상 쿨하게 말씀하셨다. 그려? 우리 집이 근처여. 타.


이거 타도 되는 건가? 하는 의심을 할 새도 없이 나는 기사님을 따라갔다.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나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버렸으니까.


기사님은 시동을 걸고 고개를 빼꼼 돌려 나를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물었다.


"너는 슨화(선화=김경래 님 둘째 딸=우리 엄마=엄마 어릴 적 이름) 딸이여?"

"아...? 네?"

"어딘가는 닮었네."


내가 맞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기사님은 내가 아빠 차를 타며 가던 그 길로 이동했다. 양수장을 지나, 교회를 지나, 평상 앞. 뒷 문을 열고 내렸는데 기사님도 운전석에서 내렸다. 뭐, 뭐야..라고 생각할 때, 기사님은 평상에 앉아계신 어르신들께 말했다.


기사님: 얘가  큰딸 인가 봐. 슨화가 눈이 크고 이쁘잖여? 둘짼가 셋짼가는 본 적이 있는데 얘는 처음 보는디

어르신1: 슨화 딸이여?

어르신2: 다들 오는 날이라 왔구만.

어르신3: 슨화가 딸이 많지?

기사님: 큰딸이랴.

어르신4: 얘는 지 아배 닮었네.

기사님: 슨화가 이쁘지.


우리 아빠 의문의 1패.


기사님께 꾸벅 인사를 했다. 곧장 언덕을 내려갔다. 외할머니표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고, 친척들을 만나 뻘쭘하게 인사를 했다. 저녁엔 할머니가 빚으신 앉은뱅이 술을 몇 잔 먹고 그 이후로는 기억이 끊겼다고 한다. 다음날 아빠가 대충 우리 집 인근 어딘가에 떨궈주셨던 것으로. 누가 나 대신 다른 차를 타고 분당으로 갔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연애할 때 남친이었던 현 남편과 삽교천을 갔었다. 정신없던 삽교천 특유의 감성은 아직도 적응이 안된다. 결혼 전후로도 외할아버지를 뵈러 종종 갔다. 외할아버지가 우리 남편보고 애가 참 점잖다고. 속 썩을 일은 없겠다고 엄마한테 말씀하셨다고 엄마가 나에게 말해준 적이 있다.


얼마 전 사촌오빠를 잠깐 만나느라 거길 다녀온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운정리는 아니지만 당진 어딘가에서 4년째 근무 중이다. 당진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모르겠다. 특히 아직도 삽교천만 가지고 있는 그 알 수 없는 감성의 택시 기사님들은 나에게 미스터리다.


동생이 이 글을 보고 추가 제보한 내용이다. 외할머니 편찮으시던 시절, 동생이 외가에 갔다가 집에 가야 해서 택시회사 전화번호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동생: 할머니 택시회사 전화번호 뭐예요?

외할머니: 줘봐. 내가 하게.


외할머니는 어딘가에 전화를 하시더니 여기 택시 하나 보내주죠. 하셨다. 그랬더니 정말 5분 뒤에 외가 마당에 택시가 왔다고 한다. 역시 삽교천 택시가 최고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지는 요즘이다. 다들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fin.


그때 그 느낌은 아니지만 지금도 나에게는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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