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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도씨 Nov 20. 2021

오늘의 착한 일: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았던 때가 있었다.


울지 않는 것만으로도 착하다는 칭찬을 받을 때가 있었다.


어릴 적 나는 유독 울음이 많은 아이였다. 엄마에게 혼나서 울고, 밀린 구몬 숙제를 하기 싫어서 울고, 동생이랑 싸우면서 울고, 집에 놀러 온 이모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헤어짐이 아쉬워서 매번 울곤 했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발표를 시켜주지 않아서 수업 중에 소리 내며 운 적도 더러 있었다. 엄마의 말로는 날 때부터 우렁차게 울고 나와서 분만실 밖의 어른들이 소리만 듣고선 남자 아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하는데 젖먹이 때에도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서 엄마도 나란히 울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랬다.


내가 울음이 많았던 건 욕심이 많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좋기 때문에 노는 시간이 좋기 때문에 그리고 칭찬받는 게 너무 나도 좋았기 때문에 그 좋은 것들을 계속 오래도록 갖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부족하다 싶을 때 그렇게 울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눈에는 그저 나는 까탈스러운, 고분고분 순하지 못해 다루기 어려운 아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다 큰 애가 창피한 줄 모르고 울어? 뚝 그쳐! 너 그렇게 계속 울어봐.”


내가 욕심을 부려 눈물을 흘리면 항상 이렇게 혼이 나곤 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내 속상한 마음을 몰라준다. 나를 질책하기만 한다. 그렇게 ‘날 미워한다.’라는 생각이 들어 또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나는 눈물을 흘리는 건 나쁜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눈물이 나와도 흘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렇게 참고 참다 보니 어느 순간 눈물을 잘 흘리지 않게 되었다. '드디어 나도 울보에서 벗어났구나.' 눈물을 참을 수 있다는 것에 큰 행복감을 느꼈다. 더 이상 미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우습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오래가지 못했었다. 사실 나는 눈물을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었던 것이다. 나의 오랜 애증의 존재, 우울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눈물에도 다양한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내면서 벅찬 행복에 눈물을 흘려보고, 분노의 눈물도 그리고 너무 웃겨서 웃다 흘리는 눈물도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눈물을 흘리고 싶을 때 흘릴 수 있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우울증 치료를 받으면서 여러 목표가 있었지만 그중에 하나는 '울어보기'였다.

오늘의 착한 일에 "펑펑 울었다"라고 적을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처방받은 약을 먹고 병원도 가고 온전히 나를 위한 선택들을 따랐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걸쳐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었다.


노력해서 얻은 눈물이라는 게 누군가는 우습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나의 눈물이 소중하다. 어제도 분한 일에 울며 잠을 청했었다. 우는 순간은 부끄럽지만 그 후는 후련하다. 어제 울었기 때문에 오늘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맛있는 밥을 먹고 글을 쓴다. 이렇게 오늘의 착한 일에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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