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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비 Aug 06. 2020

'이제 집에 가자' 죽으러 간 프랑스에서 귀가하다

삶을 내려놓았던 서른 살 여자, 진짜 죽을 뻔했던 프랑스 여행기 8


(여행 2일 차-2. 눈 내려서 더 쓸쓸했던 쌩떼띠엔)



승객 대기실에 일단 좀 앉았다. 당황하지 말자고 되뇌었다.

건너편에 마침 우리나라의 승객 고객센터 같이 생긴 사무실이 보였다. 들어갔다. 무뚝뚝해 보이는 여성 직원분이 혼자 투명한 유리 가로막 건너편에 앉아있었다.


“I took a TGV 6609, and had to change train TER 89981, but it was not on time. I need to go Le-Puy.... 블라블라”

“까”

“?”

“까”

“?_?”

“Flatform 까”


뭘 계속 까라는 거지... 직원이 나를 쳐다보지는 않고 손가락으로 전광판을 가리켰다. 영어로 A, B, C, D와 같이 K가 있었다. 그제야 이해했다. 프랑스어로 K를 ‘까’로 발음하는 모양이었다.


되물었다.

“But how about my ticket? It was already gone..."

"Just go"

“?”

“You don't need a ticket."

“Any train is ok?"

"Yes, all the trains go and change the train you need." (뭐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고개도 안 들던 직원이 티켓이 필요 없다는 소리를 할 때에서야 눈을 치켜뜨고 나를 보며 대답했다.



매우 찝찝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티켓이 필요 없다고? 자유로운 유럽 시스템의 장점인가? 아니 허점인가? 나는 아무것도 없이 그냥 기차를 타면 되는 것일까? 만약에 티켓 보자는 승무원을 만나면 뭐라고 하지?




일단 그놈의 플랫폼 까를 찾았다. 계단으로 올라오니 마침 플랫폼 까에서 출발하려는 어떤 기차가 바로 보였다.



탔다.


나도 모르게 출발하려는 기차에 뛰어 올라탔다. 내가 기차를 타는지도 나는 의식하지 못했다.

바로 보이는 문으로 헉헉거리며 들어가니 2등석 칸이었다. 핸드폰을 충전하려고 콘센트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미친 건가.

이 기차가 몇 번인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직원 말만 듣고 타다니.

플랫폼에는 안내해 줄 승무원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냥 말 그대로 ‘까’에서 탔다. 만약 이 기차가 가려던 방향과 반대였으면, 생판 모르는 도시에 내려주면 어쩌려고 나는 막무가내로 이 기차에 뛰어 올라탔을까.



죽을 생각으로 온 프랑스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아무 기차나 타서 어디를 내리든 뭔 상관이겠냐는 생각에 겁 없이 막 탈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Le-Puy가 아니라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어디나, 독일로 가버렸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때의 내가 신기하다.
다시 여행을 간다면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안정’이라는 편하지만 재미없는 것을 찾은 지금의 나는 Lyon역에서 하루 묵고
다시 길을 나서던지 했을 것이다.



핸드폰은 거의 15%로 배터리가 없는 수준. 한국에서도 산소호흡기가 필요했던 내 폰은 프랑스에서 기차를 타자 급속도로 사망에 가까워져 갔다. 로밍은커녕 꺼졌다 켜졌다 혼자 난리부르스. 한 20분 핸드폰을 충전시키면서 정신을 차렸다.



조금 있으니 승무원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어쩌지, 나는 티켓이 없는데.

그냥 물어봤다.


“I need to go Le-Puy, but the train to take was gone over, so I took this...."

승무원은 별 말없이 친절하게 답 해주었다.

“You have to get off next station."

"Where?"

"Next station. maybe Saint-Etienne."

넥스트 스테이션은 알겠는데, 뒤에 말을 못 알아들었다. 뭐라고?

말간 미소를 띤 친절한 목소리의 남자 승무원은 나를 스쳐 지나가 다른 승객에게로 갔다. 지금 생각하면 ‘까’를 외치던 그 직원은 무슨 생각으로 나더러 아무거나 타라고 한 걸까.



그렇게 40분 정도 더 핸드폰을 충전하고 있으니 아까 그 뭐라는지 모를 지명 이름이 방송에 나왔다. 기차가 멈추어서 내렸다. 나하고 키가 큰 젊은 백인 남성 한 명만 내렸다.



내리고서야 역 이름을 알았다. Saint-Etienne. 세인트-에티엔느. 그러고 보니 리옹 역에서 나한테 계속 ‘까’라고 했던 그 직원이 이 발음을 한 것도 같다. 프랑스 발음은 쌩-떼띠엔.


승객 두 명만 내린 작은 기차역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올해 처음 맞는 눈을 프랑스에서 맞다니. 조그마한 기차역에는 Relay라는 빨간 간판의 가게 하나와, Paul이라는 빵집 딱 둘만 있었다. 고즈넉한 기차역에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는지, 누군가를 마중 나왔는지 멀뚱멀뚱 서 있었다.


‘Paul이다!’

글자가 늠름하고 세련된 생떼띠엔의 PAUL 가게


프랑스 여행을 검색하면 반드시 한 번 마주하게 되는 Paul. 우리나라의 ‘파리바게트’ 같은 대중적인 베이커리이다. 한국 사람들이 여행 가서 먹고 맛있어 죽는다며 추천하는 그 Paul. Paul을 여행 2일 차 만에 만났다.

가게 쇼케이스에는 한국에서 본 적이 없는 듯 한 빵들이 있었다. 본 적이 없어서 잘 주문도 못 하겠다. 물어볼까 말까, 영어가 통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Paul의 백인 여자 캐셔가 먼저 말을 걸었다.



“#$%^&*(*&^%$#@?”

“응?” (한국말로 답했다.)

“This. Where did you get this?" (라고 한 것 같다)


뭘 물어보는 거지? 멀뚱히 있으니 캐셔가 손으로 내 점퍼를 가리켰다. 내 점퍼는 1년 전에 구입한 무릎까지 내려오는 카키색 롱패딩이었는데, 괜찮아 보였나 보다.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했던 동생이 외국 사람들은 괜찮은 패션 아이템을 보면 모르는 사람한테도 어디서 샀는지 잘 물어본다고 했다. 아, 이건가?


“Korea. Made in Korea."

"What?"

캐셔는 고개를 으쓱했다. 빵을 꺼내오던 아주머니 가게 직원도 캐셔 옆에서 같이 까르르 웃었다. 자기들끼리 프랑스어로 무어라고 속삭이는데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내가 동양인 여자라 그런가. 그리고 코리아를 영어로 못 알아들어?


옷은 칭찬받았지만 동양인이라고 무시당한 것 같은 약간 꺼림칙한 기분으로 주문을 했다. 양상추와 모차렐라, 햄이 보이는 치아바타 샌드위치. 1.6유로를 지불했다. 빵을 손에 쥐고 기차역 밖으로 나왔다.



함박눈이 소복이 내리는 Saint-Etienne. 기차역 앞에는 <Saint Etienne>라고 크게 만든 조형물이 있었고, 프랑스 시골답다 싶은 건물이 기차역 앞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전차가 지나갔다.

함박눈은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을씨년스러운 생떼띠엔 기차역 앞



기차역 전광판에 뜬 Le-Puy행 다음 열차는 1시간 30분 뒤에 온다고 되어 있었다. 도시를 돌아다닐까 했지만 핸드폰 배터리가 그전에 사망할 것 같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이런 것이 영 불편하다. 눈이 변해 진눈깨비가 내리는 쌩떼띠엔을 바라보면서 산 빵을 베어 물었다.





꿱....

맛이 없다.

뭐 도대체 형용설명이 불가능한 맛이다.

누가 맛있다고 했어.



미식의 나라라고 모든 게 다 평균 이상은 아닌가 보다. 에퉤퉤, 하고 싶었지만 아까 나를 비웃던 Paul의 직원들이 의식되어서 꾸역꾸역 먹었다. 기차 놓치고 난생처음 듣는 도시 앞에 있는데, 궁금한데 구경은 못하고, 산 빵은 럽게 맛이 없다.


기차가 올 때까지 Relay에서 줄곧 책을 구경했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인데 외국에 나가면 꼭 그 나라 책을 사고 싶다. 소설책의 60% 정도는 한국에도 수입된 책들인 듯싶었다. 밀레니엄 시리즈도 보였다.



진눈깨비를 피해 사람들이 역 처마 아래에 모여있다


그렇게 1시간 30분을 버티다 플랫폼으로 돌아갔다.

곧 기차가 도착했다.




와, 세상에 이렇게 예쁜 기차도 있나?



심하게 예쁜 기차는 출발이 느렸다. 2등석 아무 데나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족인 듯한 이들이 소년의 볼에 키스를 퍼부었다. 나랑 내내 기차역에 같이 있던 커플이 있었는데, 기타를 멘 남자가 기차에 탔다. 검은 곱슬머리가 풍성했던 여자가 폴짝폴짝 뛰면서 그를 향해 팔을 연신 흔들었다.




눈 내리는 쌩떼띠엔을 뒤로 하고 기차가 출발했다.

속도가 꽤나 느려서 남겨진 도시를 구경하기에 좋았다.






[살짝 철 지난 프랑스 여행 꿀팁]

1. Relay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Korail 측에서 운영하는 ‘스토리웨이’ 같은 편의점입니다. 간단한 요깃거리와 음료, 여행객들을 위한 선물이나 목베개 같은 소품들을 팝니다. 하지만 가장 주요한 판매품은 책과 잡지예요. 한국처럼 지하철역마다 있어서, 혼자 여행하는 여성들이 혹여 위험한 상황에 처할 때 일차 대피처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2. 저는 여행 내내 그 이후로 Paul은 가지 않았습니다. 먹어본 빵이 실패해서는 아니고, Paul이 아니어도 맛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인데요. 또 식비를 줄이려고 군것질을 많이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특히 여자 혼자서 길에서 무엇을 먹으면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죠.
오가며 듣기로는 Paul에서는 초코나 크림이 들어간 디저트 종류가 맛있다고 들었습니다. 어쨌든 ‘파리바게트’보다는 훨씬 맛있다는 게 만난 여행객분들의 일반적인 평이었습니다.  한국의 빵에 비하면 특유의 재료 맛이 강해서 좋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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