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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Mar 16. 2022

나와는 맞지 않는 일, AE

그렇다. 내 직업은 종합광고회사의 AE다. 영어 의미를 풀어보면 Account Executive. 클라이언트라는 계좌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뜻. 뭔가 은행이 연상되는 이름인데 그냥 클라이언트의 광고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하는 이라고 보면 된다. TV에서 보는 보통 광고가 15초, 30초니까 딱 그만큼의 일만 있으면 좋겠는데. 광고를 제작하기 전-중-후로 진짜, 온갖 잡다한 일들이 많다.


광고 전에는 광고를 만들 내용, 즉 광고의 방향성에 대한 기획서를 쓴다. 그리고 제작팀의 제작물과 함께 클라이언트에게 “팔아야” 한다. 광고를 만드는 동안에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디테일한 것들, 이를 테면 제품이 어떻게 나왔으면 좋겠다든지 이런 건 피했으면 좋겠다든지를 제작팀을 설득해 광고에 녹인다. 광고를 만들고 나서는 광고에 대한 사람들 반응이 어떤지 모니터링하고 리포트를 정리한다. 또, 다음달에 광고를 어떻게 집행하면 좋겠는지 매체팀과 함께 정리하여 제안한다. 월말은 청구시즌이다. 그 달에 나간 광고비를 정리하여 클라이언트한테 제시, 컨펌 받으면 세금계산서 발행을 담당팀에 요청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보면 연말에 애뉴얼 제안(내년 광고 계획 보고)이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과정 속에 내가 말로 표현하지 못한, 이 모든 과정 속을 샅샅이 메우는 것이 있다. 바로 커뮤니케이션.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는데 AE일을 하다보면 제대로 실감하게 된다. 논리고 뭐고 다 떠나서 우리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감정 케어”인 것 같다. 똑똑한 사람 보다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 대접 받는다. 클라이언트의 보스는 분명 원하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이 그 사람 머릿속에서 명확하든 아니면 조금 흐릿하든. 거기서 출발해 거기서 끝맺음 맺을 수 있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클라이언트 실무자와 그 분의 생각에 대해 얘기 나누고 군데군데 합의를 이뤄가며 마침내 창의적인 표현으로 구체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이자 AE의 능력이다.


이 과정은 우리 삶 속에 안기는 뭔가가 있다. 내가 말하되, 남의 말로 하라는 것. 남을 설득하려면 그 사람이 좋아하고 관심있는 것이나 방법으로 얘기했을 때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참 어렵더라. 2가지 때문인 것 같다. 첫째, 남이 원하는 맥락이 뭔지 그 미묘함을 알아채지 못하는 센스의 결여. 둘째, 남이 원하는 건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오롯이 나만의 길을 걸어 가겠다는, 혼자 다른 풍경 속에 존재하고 있는, 쓸데없는 자존심.


내가 AE 일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유도 이것들 때문이다. 첫째, 난 참 센스가 부족한 것 같다. 미팅에서 남들이 이해한 부분과 다른 식으로 이해할 때가 많다. 논의가 이미 다 정리된 마당에,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들을 붙여 남들의 짜증을 돋우는 것은 덤이다. 둘째, 클라이언트의 아이디어는 어딘가 모르게 진부하고, 나의 아이디어는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보니 자꾸 혼자 창의적이라고 믿는, 뭔가 다른쪽으로 생각하려 애쓰는데 그게 먹힌 적은 솔직히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15년이라니. 참 오래도 해먹었다. 심지어 다른 광고회사로 옮긴 적도 없으니 한 곳에 제대로 민폐 끼쳤다. 이제는 다른 일을 찾아야 되는지 고민이다. 그런데 배운 게 이거 밖에 없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AE를 하면 꽤 쏠쏠한 여러 기술들을 키울 수 있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면, PPT 작성. 사람들이 봤을 때 깔끔하게 느끼고 핵심을 잘 짚어낼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문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다음으로는 가운데에 껴서 협상 잘 하기. 클라이언트는 “해라”, 제작팀은 “못해” 그 사이에 늘 샌드위치 돼 있는 우리는 절충안을 만들어 프로젝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다 보니 온갖 모략과 술수에 강하다. 참, 맛집 정보 및 술자리 기획에도 능하다. 이건 클라이언트를 모셔야 하는 자들의 숙명이다.


AE. 매력있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잘해야 되는 것들이 참 많으니까. 일을 계속하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직업이 나를 많이 업그레이드 시켜줬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도전해 볼 것을 권한다. 솔직한 속내로는 나만 당한 게 억울하여. 참, 앞에서 얘기했지만 AE를 우리말로는 광고기획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입사 초반의 나는 뭔가 멋있는 모습으로 광고 캠페인 기획에 대해 발표하고 박수 받으면 다 되는 일인 줄 알았다. 그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광고기획은 참 잘 번역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캠페인 기획 말고도, 맛집 기획, 광고비 청구 기획, 전화통화 기획, 촬영지 숙소 기획 등 정말 기획하여 실천할 것들이 많으니까. 인생은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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