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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Mar 16. 2022

들어가며 - 내 인생엔 애매함들만 가득해

솔직히 말할 것이 있다. 내가 나온 학과는 “가족아동학과”다. 그런데 지인들에게는 “소비자 아동학부”를 나왔다고 얘기해 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1학년 때는 “소비자 아동학부”라는 학부생이었다. 그런데 2학년부터는 본인이 원하는 전공에 따라 “소비자학과”와 “가족아동학과”로 나뉜다. 난 “소비자학과”를 원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나온 “가족아동학과”에서 난 만족하며 지냈다. 다만 내가 하는 일과 관련해 2가지의 애로사항이 존재한다고 혼자 생각했다.


첫 번째는 매끄러운 연결에 관한 것이다. “소비자학과” 출신의 광고인? 아, 학교에서 소비자 행동 같은 것에 대해 공부하며 소비자를 공략하는 광고에 관심을 가졌구나. 이렇게 자연스럽게 생각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가족아동학과” 출신의 광고인? 전혀 무관한 두 점을 이어야 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출신성분(?)과 전혀 다른 일을 선택했는지 소명하는 게 참 귀찮았다.


두 번째는 학과를 알기 쉽게 정의 내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동의 발달 및 심리, 가족관계 등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막상 “그 과에서 뭐 배워요?”, “아동용품 파는 거 알려줘요?”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선뜻 명료한 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 스트레스 받는 쪽 보다는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는 쪽을 택했다고 봐야 한다.


솔직히 하나 더 있다. 남자인데 “가족아동학과” 나왔다고 얘기하기 쑥스러웠다. 이게 내 마음 속의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다. 젠더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우리 사회에서, 내 스스로 남녀가 배워야 할 것의 선을 그으며 젠더 갈등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다니. 부끄럽지만 내 마음이 그러한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가 있으리. 남녀 구분을 부수고 있는 이 시대의 깨어있는 지성들에게는 지성(죄송)하다.


이렇게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과를 거쳐, 종합광고회사에 입사를 했는데 여기서 하는 일도 역시나 남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후술돼 있지만, 나의 직업은 AE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물어보면 명료하게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말로 AE는 광고기획이라고 표현하는데, 광고 제작 뿐 아니라 광고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기획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설명만으로 이 직업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난 속으로 되뇌인다. 대학교도 그렇고, 직장도 그렇고 뭔가 계속 애매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생전에 해 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야야. 기술 배워라. 페인트공, 목수, 포크레인 기사, 전자제품 수리기사 등. 이름만으로 하는 일이 명쾌하게 설명될 뿐더러, 쉽게 흉내내기 어려운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 젊은 나이에 은퇴를 걱정하는 우리의 삶과 역행하는 자들. 그 명쾌한 이름이 부여해 준 지위가 너무도 부럽다. 나 또한 은퇴 이전에 기술을 배우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려 한다.


푸념은 그만. 이 책은 AE라는 직업의 애매함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에서 하나씩 하나씩 들춰 본 이야기이다. 다루는 일의 경계가 애매하기 때문에 걸쳐 있는 많은 일들을 하고, 이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이 직업의 매력으로 다가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느끼는 건, 살면서 꼭 한 번은 해 볼만한 일이라는 점이다. 광고라는 짧은 제작물, 그 수면 아래의 거대한 산을 옮겨보는 경험은 충분히 가치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분명한 건, 한 번은 해 볼만 해도 두 번은 안된다. 두 번도 괜찮다는 동료들이 있다면 진심어린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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