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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Mar 16. 2022

광고기획과 방어력

나는 지금 미국에 있다. 아내가 미국 지사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딸아이를 돌보러 육아휴직을 내고 오게됐다. 가족간의 일을 상의하다 보면 느끼는 건데, 나는 꽤 방어적인 사람이 됐더라. 한 번은 집 앞 창고에 놓인 어마무시하게 큰 가구를 집 안에 들여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옮기기도 전에 불가능하다고 보고 아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인근에 사는 처제와 피앙세가 도움을 줄 날까지 기다리자고. 반면, 아내는 할 수 있으니까 같이 힘써보자 부추겼다. 결과는? 사력을 다하니 그 큰 게 옮겨지더라.


큰 가구가 집 한 쪽에 놓여진 순간, 난 과거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했던 시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우리가 받는 요청사항이라는 게 꼭 현실적인 주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얘기를 듣다보면 업무에 돌입하기 전에 클라이언트를 단념시켜야 할 부분들이 생긴다. 이를테면 빠듯한 예산 안에서 너무 많은 리소스가 투입돼야 하는 상황이나, 스케줄이 지나치게 타이트할 경우, 또는 실현 불가능한 아이디어들을 요구할 적엔 사전에 안 된다고 못을 박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내 안에 커져가는 욕망 하나가 있다.


실현 불가능이라는 보따리 안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넣고 싶은 욕망. 어떤 부분들은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요구였지만 실현 불가능의 보따리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좋게 말하면 광고 캠페인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꾸려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 것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과감함, 공격적인 일처리와는 점점 담을 쌓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팀 사람들을 독려하며 어떻게든 도전하고 성취하자는 캐릭터였던 것 같다. 지금의 나를 보니 많이 달라져 있더라. 어떻게 하다가 방어력 100단이 돼 버린 것일까.


AE 업무의 신축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AE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일을 늘리고 반대로 일을 줄일 수도 있다. 어떤 클라이언트가 TV 광고만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치자. 어떤 AE는 클라이언트가 시키는 대로 오롯이 TV 광고와 관련된 일만 한다. 그런데 어떤 AE는 TV 광고를 하면서 함께 진행하면 좋을 IMC(Integrated Marketing Communication, 통합적 마케팅) 아이디어를 먼저 제안하거나, 경쟁사의 광고가 온에어 되면 이를 분석한 글과 해당 영상소재를 함께 클라이언트에게 제공한다. 마음먹은 대로 일을 벌리고 줄이는 게 가능한 직업이 AE이다.


AE에게 내려 준 업무 범위의 유연성 안에서, 난 적당히 치열하게 살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멋진 캠페인 탄생을 위해 열심히는 하되 그 이상은 안 넘기. 팀원들의 땀과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던 많은 결과들이 빚어낸 반작용일 수도 있겠다. 보고가 거듭될수록 의욕적으로 제안한 아이디어들이 찢겨지고 오려지며 마지막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될 때 다짐했었다. 이제 더이상 판은 판대로 벌리고 상처는 상처대로 받지 말자고. 캠페인에 필요한 부분만 효율적으로 제안하는 게 모두가 행복한 길이라고.


불필요한 모험을 하지 않게 된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은 딸아이를 볼 때다. 딸아이의 투명하고 순수한 눈망울에 늘 도전하는 마음과 뜨거운 모습만 비춰주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이번 육아휴직이 원기회복에 좋은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과거의 나와 많이 만나고 심도있는 대화도 원한다. 은퇴시기를 의지치로 잡는다면 이제 AE의 반환점을 돈 건데, 남은 반은 딸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AE가 되고싶다. 정해져 있는 결과란 없다. 말도 안 되게 큰 가구도 집으로 옮길 수 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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