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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Mar 16. 2022

AE vs. 제작팀

친한 CD(Creative Director) 형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전화 한 통이 우리의 분위기를 깨트렸다. AE의 전화였다. 용건은 둘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돌아가는 일에 변화가 생겼거나, 새로운 일을 받거나. 그 형 표정이 마치, 클라이언트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뜬 AE 표정 같았다. AE는 클라이언트 연락에 조마조마하고, 제작팀은 AE 연락에 조마조마하고, 그 제작팀이 제작안을 제시한 다음 AE는 다시 클라이언트 연락에 조마조마한다. 돌고돈다.


사슬처럼 얽혀있는 관계 속에서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이 “귀인”이다. 안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는 나에게 일을 준 사람에게 그 원인을 돌린다. AE는 클라이언트의 캠페인 오리엔테이션이 그냥 하나마나 한 얘기였다며 불평한다. 제작팀은 AE의 제작 오리엔테이션(제작방향성 주문)이 고민 없이 작성 되었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기만 하면 발전은 없되 요령만 늘어난다. 더 나은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자기객관화가 필요한 이유다.


특히 AE와 제작팀은 서로에게 시큰둥한 구석이 많다. AE가 느끼기에 제작팀이 빛이라면 AE는 그림자이다. 광고 캠페인과 관련된 스포트라이트는 제작팀에서 주로 받는데 광고를 만들면서 생기는 온갖 어려움들, 이를테면 소스의 저작권을 해결해야 되거나 납득이 어려운 클라이언트 수정요청을 받아주거나 돈과 관련된 여러 난관들을 해결하는 건 AE의 몫이다. 또한, 제작팀의 아이디어가 난관을 봉착 했을 때 AE들이 도와줄 수는 있으나 AE의 일을 제작팀이 도와줄 수는 없다. 아니 이렇게 일이 많은데, 티도 안나고 인정도 못받아? 이 같은 이유로 제작팀에게 피해의식 같은 게 생길 수도 있다. 그 단계까지 가게 되면 내 일에 대한 건설적인 생각까지 닿기가 어렵다.


제작팀이 봤을 때 AE는 의심스러운 존재들이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제작의 방향성이 이게 정말 맞는 것인지, 클라이언트가 준 피드백을 AE가 전하는데 정말로 그 클라이언트가 그렇게 얘기 했는지 의심이 된다. 원했던 건 이게 아니라며 클라이언트가 제작안을 고르지 않는 상황을 겪어본 데 따른 누적효과이다. 때문에 AE의 요청에 쉽사리 알겠다는 응답을 꺼린다. 제작 오리엔테이션 미팅의 말미에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가 많다. AE 입장에서는 더 이상 얘기해줄 게 없다. 제작팀은 딱히 덧붙일 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제작팀은 스스로 납득하는 것을 납득하지 않는다. 누군가 노트북을 접으며 침묵을 깨트려야 미팅은 끝난다. 미팅 뒤의 공기가 미지근하다.


제작팀이 “노”에 길들어져 있다면, AE는 “예스”에 익숙해져야 한다. 클라이언트가 필요로 하는 AE의 모습이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한 달이 필요한 프로젝트인데 1주일 안에 할 수 있는지 물어보면 “예스”, 출근길에 파일 공유 요청을 받았는데 1시간 내에 달라는 부탁을 받아도 “예스”, 늦은밤이든 주말이든 쌩뚱 맞은 시간에 연락을 받게 되도 당연히 “예스”. 클라이언트 안의 복잡다단한 세계가 빚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감정소모는 피한다. 싸가지 없게 얘기만 안 하면 뭐든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AE와 제작팀은 서로를 질투하고 의심하지만 같이 회식을 하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각자의 일로 구분되기 전, 광고를 꿈꾸는 그룹 안에 의좋게 섞여있었을 우리들. 술 한 잔, 안주 한 접시에 사람 이야기, 일 이야기 나누며 해맑은 웃음이 핀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해맑은 사람이었던가. 광고를 꿈꾸던 시절의 해맑음은 분명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일이라는 소명의식과 일을 잘 굴려야 한다는 목표의식 하에해맑음은 그 자리를 양보해오고 있었던 것. 아침이 오면 다시 전쟁을 준비하고, 반말을 하기로 했던 사이는 다시 존댓말로 돌아가게 될지라도. 지금은 순수하고 따뜻했던 시절로 향하는 이 한잔에 내 몸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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