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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Mar 16. 2022

촬영장의 소소한 일(1)

광고의 촬영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빅모델이 있는 촬영과 없는 촬영. 빅모델의 유무에 따라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나 변수들이 천양지차이다. 일례로 촬영 스케줄은 클라이이언트의 광고 온에어 목표일, 감독을 포함한 스태프들의 스케줄, 모델 스케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잡는데 정말 바쁜 빅모델이 있다면 모든 스케줄을 그 분에게 맞춰야 한다. 그러다 보면 촬영 준비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거나, 반대로 클라이언트가 희망하는 온에어 일 대비 너무 늦게 촬영이 돼 뒷일정에 애를 먹을 때가 있다. 그 조율을 잘 하는 것도 유능한 AE의 주요 덕목 중 하나이다.


예전에 사수가 촬영장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하루 이틀 촬영하고 이렇게나 많은 돈을 받아가는 곳이 광고 외에 많지 않은데, 모델들이 광고에 대해 더 협조적이고 긍정적이면 좋겠다고. 개인적으로 경험한 대부분의 모델들은 태도와 연기 등 모든 측면에서 프로페셔널 했다. 그러나 간혹가다 같은 컷을 여러번 찍는 것에 대한 극도의 예민함을 드러내거나 긴 촬영 시간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모델도 있었다. 그들도 인간인지라 불만은 인지상정이지만, 그 저변에 그들의 작품은 고귀하고 광고는 비천한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럴 땐 촬영이 빨리 무사히 마무리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촬영장에서 AE가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다. 광고를 찍는 건 감독, PD, 제작팀의 몫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보면 클라이언트의 혓바닥이다. 광고의 스토리나 배우의 대사, 미장센 등은 제작 파트에 맡기고 클라이언트의 상품이 광고 상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나오는지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가령 클라이언트가 제품의 측면 보다는 정면을 부각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면 PD에게 해당 의견을 메신저로서 전한다. 그러면 PD가 CD(Creative Director) 및 감독과 상의하여 모델에게 여러가지 주문을 한다. 또한, 특정한 광고카피들이나 장면을 반영하기로 사전에 얘기를 나눴는데 놓친 게 있다면 언질을 해 준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무난한 과정이다. 문제는, 취향에 대한 이견이 발생할 때이다.


예를 들면, 모델이 입을 옷에 대해 클라이언트와 제작진 간의 의견이 나뉠 때가 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컬러와의 매칭 등,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얘기하면 좀 더 객관적일 수는 있지만 대부분은 주관성의 첨예한 대립이다. 클라이언트가 보기엔 하얀색 셔츠에 밝은색 니트를 추가하면 더 화사할 것 같은데 제작진은 하얀색 셔츠로 깔끔함에 더 집중하자는 입장 같은 것이다. 개인적으론 이런 논쟁들이 재미있다. 광고를 만드는 것 자체가 주관적인 의견들을 모아 참가자들 누구나 동의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도 광고의 모습을 닮았다.


개인적으로 체감하는 과거와 현재 촬영장의 차이가 있다면 클라이언트의 촬영장 체류 시간이다. 과거에는 중요한 부분만 잘 체크되면 그들의 사무실로 복귀하거나 직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중간에 촬영장을 떠나는 클라이언트를 보기가 참 드물다. 새벽 4~5시까지 촬영이 진행되도 부엉이처럼 눈을 크게 뜨고 앉아있다. 이런 변화의 장점과 단점은 명확하다. 클라이언트가 일찍 자리를 비워주면 새삼스레 자유가 주는 가치를 깨닫는 반면, 클라이언트가 나중에 촬영분에 이견이 있을까봐 불안하다. 반면, 클라이언트가 내내 있으면 촬영분에 대해 같은 배를 탔다는 안도감은 있는 반면, 왠지모르게 가슴이 시종일관 답답하다.


다만 AE에게 희노애락을 안겨주는 존재인 클라이언트와 촬영을 명분으로 오랫동안 함께 앉아 사는 얘기 나누는 건 다른 분야에서는 경험해보지 못 할 괜찮은 시간이다. 그들중엔 광고회사를 꿈꿨던 사람도 있었다. 본인이 속한 조직에 대해 이런 부분이 개선됐으면 좋겠다며 속 시원히 얘기해 준 사람도 있었다. 마케팅 팀으로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본인의 피드백이 맞는지 모르겠다며 염려한 솔직한 사람도 있었다. 예전 미팅 때 광고회사 쪽 얘기에 동의했는데 팀 분위기 상 표현을 못했다며 미안해 한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 촬영을 마친 새벽. 집으로 가는 길이 왠지모르게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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