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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Mar 16. 2022

좋은 아이디어, 나쁜 아이디어

성차별적인 얘기가 될 수 있지만, 광고회사에서 본 남자 동료들은 “짠~”에 대한 욕심이 강했다. 어떤 일을 진행할 때 중간에 사안을 공유하는걸 꺼렸다. 오직 최종의 결과물을 “짠~” 하고 보여주며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거나 평가받기를 원했다. 나 역시 그랬다. 두 가지 욕망의 발현이었다. 완성된 무언가를 보여줬을 때 모두를 놀래키고 싶은 영화와 같은 욕망. 그리고 중간에 나의 영역에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침입자들을 방어하고 싶은 욕망.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아이디어에 있어서도 헤겔의 정반합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개인의 생각만으로 쌓아올린 탑이 내가 보는 시선에서는 에펠탑인데 남들의 시선에서는 모래성인 경우가 많았다. 내 생각의 토대 위에 비판의 재료들을 올리고 모두가 동의하는 방향으로 탑을 쌓아올릴 때 그나마 근사한 탑의 외형을 갖출 수 있게 됐다.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며 아이디어에 대한 관점 또한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아이디어는 팀원들이 도출한 A와 B와 C 중에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A와 B와 C의 좋은 요소들을 조립하는 것. 어떤 요소는 시작점이 되어 줄 날 것의 Clue가 되고, 다른 요소들은 그 Clue를 탄탄하게 만드는 살갗이 될 수 있겠다.


아이디어는 결과가 아니다. 과정이다. 광고회사에 다니며 알게 된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물 만으로 좋은 아이디어와 나쁜 아이디어를 가르는 건 어렵다. 아이디어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의 좋음과 나쁨이 있을 뿐이다. 나쁜 과정이란 첫 부분에서 얘기했던 나 같은 케이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짠~”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되기 싶다. 


반대로 좋은 과정은 여러 명을 거치는 동안 팀원들을 적재적소에 쓸 수 있다. 첫 시작점의 Clue가 되는 요소들을 잘 꺼내는 친구들이 있다. 이런 친구들이 평소에 타인으로부터 아이디어가 좋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이 친구들의 Clue가 공통의 관심사가 되면, 이 Clue들을 단계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잘 붙이는 친구들이 등장한다. 곧이어 현실 가능성 등 아이디어의 디테일을 잘 만져주는 친구들이 가세한다. 아이디어를 만드는 좋은 과정이란 이런 흐름과 맥락이 닿아있다.


다만 어디에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 이런 과정을 거스르는 특별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여자 후배였는데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미팅 시간이 다가오면, 그 친구가 어떤 아이디어를 가져올지 기대가 되면서 묘한 경쟁심도 생겼다. 이번엔 내가 그녀보다 더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 과거엔 나도 아이디어 많다는 얘기를 꽤 들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선배들의 칭찬은 그냥 아이디어의 절대 양이 많다는 얘기였던 것 같다. 주니어 때는 결과와 상관없이 농업적 근면성 하나만 있어도 좋은 평판이 가능하니까. 


여자 후배는 겉보기엔 특이점이 없는 친구였다. 광고회사 사람들 하면 막연히 그리게 되는, 활발하면서 에너제틱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조용히 회사 생활하는 평범한 직장인에 가까웠다. 다만, 뭔가 삐딱하게 생각하는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모두가 동조하는 이슈에 대해 혼자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제작안 중에 A가 좋다고 다들 얘기 하는데 누구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포인트를 언급하며 B가 더 좋다고 얘기하는 식이었다. 


그런 친구들은 타고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재미있는 건 그 친구가 이 글을 읽는다 하더라도 이게 본인 얘기인지 모를 것 같다.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을 테니까. 반대로 스스로를 아이디어 천재라 생각하는 사람 중에 진짜로 이에 해당하는 사람은 거의 못 봤다. 안 뛰어난 사람은 자신의 안 뛰어남을 잘 모르고, 뛰어난 사람은 자신의 뛰어남을 잘 모른다. 현실인식이 그만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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