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뜰날 Jan 31. 2023

사랑하며 살고 계십니까?

내 안의 또 다른 나.

어릴 때 친구 가족들이 부러웠다.

6남매처럼 줄줄이 식구들로 서로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는지도 모르는 게 아닌,

한두 명의 형제로 오순도순 사는 집이 부러웠다.

온전히 내가 하는 것들에 주목받을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밥 먹다가 말하면 복 달아난다는 조용히 밥만 먹는 엄격한 밥상머리 말고,

도란도란 네 명이서 일상의 언어를 주고받는 밥상은 얼마나 여유롭고 좋을까.

서로 얼굴 보고 눈 마주치는 가족은 서로가 얼마나 애틋할까.


나는 그렇게 따뜻한 가정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런 가족이었다면 나는 좀 더 행복했을 것 같았다.

그런 가족이었다면 나는 더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가족이었다면.. 나는 더 기죽지 않고 살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지금 나는,

내가 그리던 가족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딱 네 가족 오순도순.

친정 아빠같이 불같이 화를 내는 남편이 아닌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묵묵히 들어주는 남편이 있다.

친정 엄마처럼 바쁜 일에 아이들 돌볼새 없는 엄마가 아닌 아이와 시간이 많은 전업엄마로 있다.

아이들은 여자아이, 남자아이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진 아이들로 아이들대로 자라고 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하기도 하지만 살면서 가장 힘들기도 한순간들이 육아의 시간에 다 몰려있다.


힘든 부분은 내가 가끔 폭력성이 치솟고, 예민해지는 사람이라 스스로의 감정에 버거워한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에너지가 소진되는 게 빨라서 적절히 내 시간이 없으면 목소리와 눈빛이 180도 변한다는 사실.


그런 날은 이유가 뭔지도 모른 채 당하는 교통사고처럼

내 아이들에게 나의 성질대로, 해대고 만다.

아이들은 그렇게 교통사고의 피해자처럼 꼼짝 못 하고 당한다.

그게 감정쓰레기통이 될 때도 있고, 훈육이랍시고 엄격하게 공포로 둘러싸인 시간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빠의 불같이 화내는 모습을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부모의 안 좋은 점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한다는 심리학 지식까지 보충이 되면 내 화내는 모습을 정당화하기는 참으로도 쉽다.


생각해 보니 내가 불같이 화낸 모습이 아빠의 모습과 닮은 게 아닌, 내 주변에서 그런 사람이 아빠였기 때문에 아빠를 닮았다고 생각했.


모든 사람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닌 여러 모습을 가진 존재라는 전제를 빼고,

꼭 맘에 안 드는 어떤 모습이 나에게 있는 걸 발견하면, 다른 사람을(아마도 싫어하는 가족이나 친구들 중 누구) 갖다 댄다.


사실은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걸 인정할 수가 없어서, 그 사람한테 보고 배웠다며 그 사람에게 교묘히 덤터기를 씌우면서 합리화를 했는지도 모른다.

 

딱 그렇게 살았다. 나의 좋은 부분은 내가 잘 살아서이고, 나의 나쁜 부분은 부모탓, 형제 중 누구의 탓. 유년시절 가정환경 탓.. 어쩌고 저쩌고.. 핑계를 만들면서.


어떤 모습만 좋고 편애하는 게 아닌, 다양한 지질한 나의 모습도, 정말 별로인 나의 모습도

그 모든 게 하나로 어우러져 유일한 나라는 사람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나란 사람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 그런 소중한 사람이 나라는 것. 을 말이다.





어릴 때 이유 없는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은 그때 당시, 꽤 충격적이었고, 어린 마음에 다른 친구들의 행동과 말이 이해도 안 되는 그저, 그냥 당하는 상태.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해본 나는 내면의 힘이 통째로 상실된 경험을 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친언니에게조차 그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했다. 아마도 우리 식구 중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을 모르는 척. 그렇게 따돌림을 주는 친구들의 눈빛을 피하고 입을 닫고 수치심을 감추며 살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창 시절 동안 얕고 깊음을 떠나, 1년에 한 번씩은 느껴본 그 경험으로 인해 나는 사람사이에서는 중간쯤 섞여사는 게 좋다고 타의적으로 배웠다.


그리고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예민함과 섬세함을 숨기고, 그렇게 무던한 사람인 것처럼 살았다.


이유 없는 미움을 받아본 경험이 있어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을 갖고 사는걸 못 버텨했다. 미워하는 마음이 죄스럽고, 그 사람에게 못된 마음을 가지는 게 미움을 당하는 입장에서 너무 힘든 일임을 알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올라오는 모든 감정에 좋다 나쁘다 딱지를 붙이면서 살았다. 기쁘고 즐거운 건 초록색딱지이고, 화남과 미움은 빨간색 딱지로 붙이며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차단하고 부정했다.


육아를 하면서 모든 것들이 뒤집어졌다.

순간순간 상황과 환경에 자극을 받는 민감한 성격의 본모습대로 감정들이 억압을 뚫고 솟구쳐 나왔다. 자존감이 낮고, 자신감이 떨어진 이유는 다 유년시절의 가정환경과 정서적 결핍. 그리고 육아가 내 성격과 맞지 않아서라고 치부해 버리기도 했다.


타인의 말에 예민하게 깊게 파고드는 내 성격 또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처음엔 무던한 사람으로 밝은 내 모습이 아닌, 드러난 (어쩌면 본래의 기질적인) 나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아니, 받아들이기 싫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렇게 나는 나를 부정하며 살았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이 더 이상 억누르고 살지 말라고,

이게 너의 감정이니까 그만 인정하라고,

그러다 진짜  너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많이 폭발시켜 준건지도 모르겠다.


많은 감정 폭풍으로 몰아치고 그친 후  맑은 하늘을 다시 보는 날이 켜켜이 쌓이면서

이제야 겨우 조금은 알 것 같다.

예민하고 민감한 나다움이 그게 바로 유일한 나라는 것을.


내 안에는 발광하는 미친 아이도 있고, 한없이 넓은 보살 같은 성인의 마음도, 아주 유치 찬란한 어린아이의 모습도 있다는 것을.


모습의 합이 나라는 사실을.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그 체로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작가의 이전글 마음을 들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