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드 공작>
집에 돌아온 스카드는 엘레나의 초상화를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제르만의 전 왕비였던 엘레나는 스카드 프로이센 공작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왕비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처음에는 프로이센 가문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 말도 못 했던 귀족들도 점차 리온에게 재혼을 요구했다.
“전하, 왕비를 공석인 채로 둘 수는 없습니다.”
"전하, 에세에르그에서 구혼장이 왔습니다."
"......"
리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평을 쏟아냈다.
“요새 많이들 한가한가 보군. “
아직 엘레나의 일이 그에게는 여러 가지로 정리되지 않은 문제였고, 본인의 선택에 대한 후회도 남아있었다.
“공주님께서 조금이라도 더 어릴 때 새어머니가 생기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렘슨 백작의 말에 깜짝 놀란 것은 스카드가 아닌 리온이었다.
프로이센 공작 앞에서 저런 말을 뱉을 수 있다니.
비웃는 듯 입꼬리가 올라간 헤르나와 달리 오히려 스카드는 미동이 없었다.
"... 왕비의 자리가 속히 채워져야 하는 건 맞습니다. 적합하다 생각되는 인물을 찾아보겠습니다."
리온의 눈에 스카드는 이전보다 더 평온한 모습이었다. 아니, 고요한 모습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의 바다 같은, 어디서 풍랑이 일지 모르는 그의 모습을 보는 리온의 감정이 동요했다.
".... 프로이센 공작...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요, 전하. 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른 귀족들도 앞다투어 스카드의 말에 동의했고, 리온은 더 이상 거절하거나 반박하지 못하고 그들의 뜻대로 하라며 돌려보냈다.
하지만 제르만 내에서 리온의 짝이 될만한 비슷한 나이대의 미혼인 고위 귀족 여성은 찾지 못했다.
리온과 결혼할만한 조건을 갖춘 18세 이상의 귀족 여인들은 모두 기혼자이거나 미망인이었다.
가장 적합한 헤르나 후작은 자신의 가문을 발전시키기 위해 동생인 헤르온을 꺾고 가주가 된 터라 왕비가 될 리가 없었다.
그간 제르만은 백작 이상의 가문에서 왕비를 선택해 왔었고, 그렇지 않다면 타국의 왕녀를 왕비로 들이곤 했다.
그렇기에 스카드도 과거의 일만 아니었다면,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추천한 (그리고 마침 구혼장도 보내온) 에세에르그*의 왕녀 헤더 폴스바흐를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세에르그 - 위라티의 동쪽에 위치한 반도 국가.
온화하고 따뜻한 그녀의 성품은 이미 지난날 양국이 개최한 기념 파티에서 잘 알 수 있었다.
또한 브리텐드*와 해상무역건으로 늘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위라티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끼고 있는 에세에르그와의 결혼을 추진하면서 두 나라의 결속을 강화시키고 해상무역의 이득을 얻기에도 좋았다.
*브리텐드 - 예전에 제르만과 전쟁을 했던 도국(島國), 이후에도 꾸준히 대립해 왔으나, 리온이 왕위에 오른 뒤 사이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헤더는 모니카와 다르게 자신의 나라에서 영향력이 있었기에, 국익을 생각하면 매우 아까운 포기였다.
그녀와의 국혼 추진은 스카드에게 명분 없는 반대였으나, 그에게는 드러낼 수 없는 이유가 우선시 되더라도 가문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프로이센'
'엘레나'
'백설공주'
......
엘레나의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스카드는 손에 들고 있던 사파이어 브로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엘레나. 리온이 결혼을 해. 사랑에 빠졌다는 소릴 하더군."
"리온이나 리암이나.... 똑같이 어리석어."
"사랑이라..."
......
리암*이 왕위에 오르기 전, 끊임없이 왕세자비로 거론되었던 것은 제르만의 오랜 명문 귀족 ‘프로이센’ (당시) 후작 가의 차녀이자 삼 남매 중 막내였던 ‘엠마’였다.
*리암 - 리온에게는 할아버지이며 마크윈의 아버지인 제르만의 선대 왕.
왕실에서도 특별히 거부할 이유는 없던 터라 둘은 사교계에서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게 되었고, 귀족들 사이에서 결혼할 것이라 여겨졌다.
또 마크윈은 비밀리에 루카스*를 통해 커다란 사파이어가 세공된 브로치를 엠마에게 선물해 약혼을 암시하기도 했다.
*루카스 - 프로이센 후작가의 주인.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되었다.
그러나 리암이 열여덟 살 때 외교사절단과 함께 찾아온 에세에르그의 공주 ‘리디아’를 본 뒤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의 마음은 온통 리디아에게 가 있었다.
그의 부친이 이제 와 약속을 깨고 프로이센 가문에 망신을 줄 수 없다고 말려도 그는 한결같이 리디아를 원했다.
리디아 또한 같은 마음인지 에세에르그에서도 친교를 위한 결혼을 원하며 서신을 보내왔다.
여기에 제대로 불이 붙은 리암이 리디아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왕은 프로이센에게 유감을 표하며 약혼을 파기했다.
이번 파혼에 대한 것은 그만큼 배상을 해주겠다고 달랬으나 루카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고작 열여덟 살인 리암에게 당했다, 라는 마음이 든 프로이센 후작은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갑자기 외국에서 왕세자비가 되겠다고 온 리디아 공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프로이센 가문의 가주가 되었던 루카스는, 이런 배경 탓에 가문이 모욕을 당했다는 느낌을 받고 괴로워했다.
분노와 허탈감에 휩싸여 감정이 폭발한 장남 루카스를 대신해 프리다*가 급하게 후작 저에 들어와 두 사람을 설득해 불명예스러운 파혼 일은 조용히 묻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귀족들 사이에서 엠마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소문이 왜곡되어 퍼지기 시작했다.
*프리다 - 토흐튼 백작 가와 결혼한 프로이센 가의 장녀.
결국 엠마는 마음의 상처와 분노, 사교계의 입방아로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명 ‘포피’ 라 불리는 독한 마약을 마신 뒤 자신의 온몸을 칼로 베고 난도질해 가며 죽은 터라 그녀가 죽은 방은 피로 가득했다.
뒤늦게 발견한 엠마의 시체를 끌어안고 루카스와 프리다는 밤새 울었으며, 그 소식을 들은 토흐튼 백작 가에서 급히 사람을 보내어 왕실에 소식을 알렸다.
놀란 마크윈과 샬롯*이 사과와 함께 직접 장례식에 참석했으나, 리암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샬롯 - 마크윈의 아내. 리암의 모친.
“마지막까지....... 내 동생을 욕보이는구나....”
루카스는 ‘이제 왕실에 충성하는 건 환멸이 나.’ 라는 이야기와 함께 모든 것을 정리한 뒤, 성을 프리다에게 맡기고 수도를 떠났다.
그는 기사단 중 젊을 때부터 함께였던 일부를 데리고 프로이센 소유의 작은 지방으로 내려갔다.
이후 루카스는 간간이 프리다에게 소식을 전하긴 했지만, 왕의 부름에도, 그 어떤 초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침묵의 시간을 두렵게 견뎌오던 리암도, 아이가 태어나고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느슨해졌다.
루카스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과오에 대한 것도 그저 지나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타크 후작으로 인한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
"학습 능력이 없는 건 대대로 똑같군."
스카드는 자신의 방 책상 위에 헤르나가 두고 간 담배를 쳐다보았다.
이미 몇 년 전에 끊었지만, 다시 시작하지는 않더라도 잠시 맛보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고 결국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내뿜은 담배 연기 속에 엘레나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스카드는 날이 밝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이런 옷을 입게 된 건>
얼마 뒤, 왕실의 의상을 제작한다는 이들이 칸나 앞에 조심스레 상자를 하나 들고 와서 열어주었다.
프로이센 공작가에서 미리 예시가 될 의상을 제작해 왔다며, 그녀에게 시착을 해볼 것을 권했다.
‘이 건...’
그들이 가져온 옷에는 그 어디에도 칸나를 존중하는 느낌이 없었다.
칸나는, 차라리 이런 옷을 입을 바에야 그들이 원하는 금발이든, 갈색머리든 해주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입는다는 옷이 떠올려지게 하는 걸 보면, 자신에게 얌전하고 조용히 있으라는 일종의 경고 같기도 했다.
‘머리카락 색이 문제라더니... 아예 다 가려버리는 것이로군. 이게 현명한 방법일까? 그들이 말하는?’
칸나가 옷을 들고 온 이들에게 그만 나가보라고 이야기하고 돌아서자, 뒤에서 ‘크큽’ 하고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그녀를 이야깃거리, 또 하나의 광대로 만들 속셈인 걸.
그도 그럴 것이 역대의 어느 왕비도 이런 의상을 착용한 전례가 없었다.
강하게 거절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더 이상 리온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칸나는 속상한 마음을 누르고 기분 전환을 하러 정원으로 향했다.
칸나는 분수 앞에 앉아 전에 살았던 숲을 떠올렸다.
사람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전혀 인정받지 못했던 그때였지만 자유함만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자연이 그녀의 친구였고, 누구도 그녀의 겉모습을 문제 삼거나 간섭하는 사람은 없었다.
꽃을 닮았다며 예쁜 머리색이라고 칭찬하던 난쟁이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외로움이 당연해질 무렵에 찾아온 그들과는 서로의 도움이 되어주며 서로를 감싸주기도 했었다.
마녀를 적대시하는 제르만에서, 왕비가 되기 위해 성으로 온 이상 많은 것을 각오했지만, 머리카락부터 논란이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유년 시절부터 늘 염색을 하고 자라왔던, 다른 사람들을 거의 만난 적이 없던 칸나에게는 수도에서 보는 많은 사람들이 금발에서 갈색 사이의 머리색을 가지고 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그렇게 과거를 떠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그녀에게 스카드가 다가왔다.
칸나의 기억에, 그는 그날의 논란을 잠재우며 왕궁에 있는 모든 귀족들을 한 번에 침묵시키고 동의하게 만든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옷은 마음에 드십니까?”
이런 옷을 보내놓고 그런 질문을 하다니...
진심인걸까, 싶은 칸나가 질문으로 답을 했다.
“...... 마음에 들라고 보내주신 옷인가요?”
“그럼...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먼저 물어보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칸나의 반응에 잠시 침묵하던 스카드는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시 만들라 하겠습니다."
칸나는 문득 그가 옷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는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떻게 생긴 옷인지 보긴 했나요?”
“네.”
옷을 보았다던 그에게 무슨 의미로 그런 옷을 만들어 보냈는지 물으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에 드는 옷을 만들 때까지 다시 만들어오라 시킬까?’
‘아니.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를 상대로 기싸움을 벌여봐야 의미가 없을 테지.’
칸나는 결심이 선 듯, 이내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미소로 그에게 답해주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하고 만들었다니 잘 입겠습니다.”
“아 참, 왕실의 의상이나 머리 모양, 장신구, 그 밖에 많은 것들이 귀족들에게 유행이 되던데, 귀족 부인들께서도 그 옷을 입을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여인 풍성한 머리카락이 아름다움의 상징인 제르만에서, 그 걸 가려야 한다면 모두의 불만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 예상한 칸나의 한 수였다.
더욱이 왕비가 입은 옷을,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못 입겠다는 소리는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귀족들이 일부러 왕비를 우습게 만들었다고 자백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 당신들이 문제 삼던 머리색, 이젠 모두에게서 감추어주지.’
‘그리고 내가 당신들을 위해 광대가 되어야 한다면, 앞으로는 당신들도 함께 광대가 되어야 할 거야.’
<백설공주>
리온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칸나는 백설공주를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어째서인지 리온은 결혼식 이후에 만나는 것이 좋겠다며 만류했다.
백설공주는 동쪽 성에서 살고 있었고, 왕실의 유모를 비롯해 엘레나 왕비를 모시던 (프로이센 가문에서 보낸) 하인들의 시중을 받는다고 했다.
아직 두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엄마가 없다는 것은 어떤 걸까.
칸나는 자신도 엄마를 잃었지만, 열다섯이었던 본인의 경험과는 너무 다를 것이라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
아니, 아주 어릴 때라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오만한 생각이 자리 잡을 때쯤, 리온은 칸나의 손을 꼭 잡았다.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 그래서 걱정하지는 않지만..."
"?"
"다른 의미로 염려가 되긴 하네."
칸나는 그가 말하는 다른 의미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은 말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어쩐지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 무슨.."
"나를 먼저 생각해 줘."
"......."
리온은 칸나를 꼭 끌어안으며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던 그 말을 칸나는 훗날 이해하게 되었다.
<결혼식>
결혼식까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 준비할 것은 너무도 많았고 복잡했다.
왕실의 결혼이란 많은 절차와 함께 어우러진 정치적 교류였으니까.
그나마 칸나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초대할 하객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가문에서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누구든 초대해도 좋다는 리온의 말에 숲 속의 난쟁이들을 생각하며 초대장을 적었던 칸나는 망설여졌다.
자신에게 친구였던 이들이 이곳에서 차별의 대상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리온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누구든이라고 말한 걸까.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고민을 거듭하던 칸나는, 리온이 자신의 집에 찾아올 때 항상 동행했던 기사를 만나 부탁을 했다.
"제가 살았던 집 앞뜰 작은 나무에 새 집이 하나 있어요. 그 옆에 이 편지를 놓고 와주실 수 있나요?"
당황하는 그에게 칸나는 간청했고, 리온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라 명령했다.
얼마 뒤, 칸나는 궁 안에 식재료를 납품하는 버베나로부터 짧은 답장을 받았다.
결혼식에 참석할 수는 없지만 결혼을 축하한다는 이야기였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나, 새삼 제르만에서 차별받는 자신들의 신분이 느껴졌다.
그래도 칸나는 그들에게 축하한다는 연락을 받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잘 지내고 있다는 근황을 주고 받을 수 있어서 기쁘기도 했다.
매일 왕실의 예법을 배우고, 드레스와 장신구를 고르고, 문화를 익히며 귀족들과 그들의 가문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칸나는 많은 것을 생각할 여력 없이 그저 '오늘의 평안'과 '오늘의 생존'에만 신경 쓰게 되었다.
그렇게 약속한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간 배우고 익히느라 바쁘고 정신없던 시간들 뒤로하고 여유 있는 하루를 가질 수 있던 칸나는 처음으로 하루종일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그 날 저녁, 좋아하는 꽃이 담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이제 정말 결혼을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고, 가슴이 떨렸다.
그동안 불안해하며 긴장해서 떨리던 것과는 다르게 '결혼식'이라는 특별함 때문인지 설렘과 기대가 크게 느껴졌다.
‘저 밑바닥에서 가장 위까지 올라가는 것이 이런 걸까?’
‘사람으로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하던 내가 왕의 배우자라니...’
칸나가 리온에게 선물 받은 (결혼식 이후 착용하게 될) 왕관을 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내일이 결혼식이야.”
리온은 들뜬 미소로 다가와 칸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들 네 신분을 문제 삼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넌 충분히 왕비가 될 수 있어.”
“리온, 하나만.. 부탁을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칸나는 내일 이후엔 이제 자신을 감추고 온전히 ‘왕비’ 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며, 그렇기에 무리한 부탁 일지 모르지만 결혼식에서는 머리카락을 드러내고 싶다고 요구했다.
일순, 놀란 듯 눈이 커진다 싶었던 리온은 크게 웃으며 그녀의 말에 따라주었다.
결혼식 당일, 미리 이야기를 듣지 못한 귀족들은 면사포도 두르지 않은 칸나의 머리를 보고 기겁을 했다.
그러나 결혼식이 열리는 정원은, 이미 리온이 칸나를 위해 준비한 보라색 리시안셔스 꽃으로 가득했으며 부케도 보라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귀족들이 결혼식의 상징은 신성함과 순결이라며 머리카락을 감추고 정원의 꽃들도 흰색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으나, 리온은 칸나가 입은 드레스와 머리의 화관이 흰색인 것으로 충분하다며 그들의 의견을 눌러버렸다.
“참석하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도 괜찮아.”
단호한 리온의 태도에 귀족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다 마지못해 결혼식 장소로 향했다.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정원, 보라색 꽃들, 그리고 그곳에 당당하게 드러낸 보라색 머리색과 웨딩드레스를 입은 칸나는 행복했다.
그녀의 편에서 축하해 주는 이는 하나도 없었지만, 충분히 만족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던 결혼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