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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Sep 25. 2024

그들의 사정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더니 얼얼하군."



헤르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헤르나 - 뮐러 후작가의 주인. 여성으로서 가주가 된 제르만의 첫번째 귀족. 스카드의 사촌.

얼마나 대단한 미인인지 궁금했는데, 과연 예쁘긴 예쁘더라는 말을 남기며.



"테스 공작님께서 마녀 사냥에 나선 이후로 전멸한 줄 알았더니. 살아남은 애들이 있었나 봐?"

"리온의 결혼은 우리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스카드."



칸나를 직접 본 스카드는 말이 없었다. 

꼬여버린 계획을 정리하는 것도 벅찬데, 리온의 속내를 빠르게 알아내야만 했다. 


단순히 아름다움으로 왕비가 되었다고? 사랑에 빠져서? 그렇다고 하기엔 수상한데.

'마녀'라는 위치가 어떤 의미인지 리온도 모르지 않을 텐데, 스카드에게는 그게 너무나 수상했다. 


오래전, 선대 왕이었던 마크윈의 명령으로 대대적인 마녀 토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작전의 선봉은 자신의 아버지인 테스 공작이었다. 


그런데 아들인 리온은 난데없이 마녀로 국모를 삼는다고?

일단 기를 한풀 꺾어놓기 위해 수도원의 사람들이 입는 옷을 생각하며 죄다 가려버리게 했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놔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옷으로 전부 가려질 미모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마녀라는 것 이전에, 아름다운 외모로 먼저 소문을 낼 테고, 마녀임에도 왕비가 된 그녀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생겨난다면 곤란한 것은 귀족들이었다.




......


리온의 할아버지인 리암의 왕위 시절만 해도 제르만 내에서 마녀가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지금처럼 천대받지는 않았었다.


사람들은 마녀들에게 어린아이들의 유행병을 막아주는 마법을 부탁하거나, 치료약에 능한 마녀들에게 독한 병의 치료를 부탁하기도 했었다. 

단순히 다른 의미의 치료사를 뜻하던 마녀가 저주스러운 대상이 된 것은, 그때의 타크 후작 때문이었다.


율리안 타크는 외교 사절단으로 에크나르프*에 다녀온 이후, 마녀의 저주에 심취해 있었다. 

*에크나르프 - 제르만과 국경이 맞닿아있는 나라로, 마녀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마녀들을 개인적으로 고용해 저주 마법을 연구하도록 했다. 

하지만 마녀가 모두 저주 마법에 능통한 것은 아니었다. 

저주 마법은 아무나 다룰 수 없었고, 또한 외부로 잘 유출되지 않는 고급 마법이었다. 


뜻대로 잘 되지 않자, 그는 에크나르프에서 고급 흑마법을 사용해 수감되었던 이력이 있는 마녀를 많은 돈을 주고 몰래 빼내왔다. 

그렇게 그들을 곁에 두며 어둠의 세력을 키우던 율리안의 내란으로 인해 제르만은 수도 함락과 왕권 몰락의 위기를 겪었고, 왕실은 당시 후작이었던 프로이센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방으로 내려가있던 프로이센의 가주 루카스는, 빠르게 다른 귀족들과 연합했다.

그의 뛰어난 판단력과 전술로 반란군을 모두 물리치고 내란을 진압했다.


그 무렵부터 마녀는, 흑마술에 심취하여 저주를 생성하며 왕실에 반기를 든 존재로 각인되었다. 

왕실은 마법이나 마녀를 몹시 꺼려했고, 그 영향은 점차 퍼져나갔다. 

그리고 리암의 아들 마크윈은, 왕위에 오르자 다시 그런 위험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대대적인 마녀 토벌을 벌였다.


......




"뭔가...."


"응?"


"리온에게 뭔가 있어."



스카드의 눈에 리온은 이런 모든 것을 뒤엎을 만큼 사랑이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리온의 가장 큰 목적이 왕권 강화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스카드에게 그의 이런 행보는 아무리 봐도 꿍꿍이가 있는 일이었다. 


물론 어린 마녀 하나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좀 더 면밀하게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달리 헤르나는 엎어진 결혼에 더 관심이 많았고, 슬쩍 스카드에게 말을 흘렸다.



"그나저나 모니카 공주는 어떡하지? 아깝네... 어때 리온? 네 짝으로는."



헤르나의 말에 스카드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런 입장' 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공주인데 공작의 후처로 들이는 것은 아니라며 거절했다. 


제르만의 새 왕비 후보로 계속 거론되었던 위라티의 왕녀 모니카는, 서자로 처음 왕위에 오른 위라티*의 현 국왕 토니의 첫 자녀이자 현 왕비의 세 아들들과는 이복남매였다.

*위라티 - 에크나르프 남쪽, 바다를 끼고 있는 왕국 


토니는 왕자였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서자였고,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지방의 작은 성에서 조용히 살던 그가 다른 두 형들이 병으로 죽게 되면서, (서자이지만) 하나 남은 왕자라는 이유로 갑작스레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를 왕으로 추대한 공이 가장 컸던 세르니 공작은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을 것을 강요하며, 토니의 아내였던 마리를 수도 바깥의 성에 유폐시켜 버렸다. 

그리고 당시 네 살이었던 모니카는 왕권에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갑작스러운 이혼과 재혼을 앞둔 토니를 달랠 겸 곁에 남겨두었다. 


따로 권력은 없었으나 위라티 국왕의 사랑과 애틋함을 많이 받은 모니카는 희소성이 있는 여인이었다. 


스카드에게는 모니카가 (어찌 됐든) 왕녀라는 고귀함과, 제르만에 위협이 되지 않는 권력의 비주류라는 점,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것이 백설공주와 비슷하여 동질감에 정을 주기 쉬울 것이라는 점, 자신이 컨트롤하기 어렵지 않을 거라는 여러 계산 하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리온의 후처이자 백설공주의 계모로서 다른 어떤 이보다 적합하다 판단했던 그는, 모든 귀족들을 설득해 리온에게 천거했다. 

자신이 외교관으로서 위라티에 가서 혼사를 성사시키겠다는 스카드의 열정이 리온의 심기를 뒤틀리게 한 걸까. 

계속 전 왕비인 엘레나를 거론하며 새 혼인을 미루던 리온은, 끝내 스스로 다른 선택지를 들고 나타났다. 


후계가 명확하지 않은 지금, 스카드는 국내의 다른 귀족에게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라는 타이틀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분명 왕자나 공주가 태어난다면 귀족 내에서도 세력이 나뉘어 분열이 있을 것이고, 후계를 놓고 싸움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스카드에게 칸나가 최악의 선택지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좋은 선택지도 아니었다. 

칸나가 그저 평민들의 가십거리처럼 사랑 때문에 왕비가 된 것이라면 다루기 쉽겠지만, 왜인지 그에게는 그 또한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에필로그 - 위라티 왕국>



계속해서 이혼을 거부하는 국왕 토니에게 세르니 공작은 숨겨왔던 진실과 속내를 드러냈다.



“왕이 되고 나니 모든 권력이 전하께 있는 것 같습니까?"

"과연 그럴까요. 전하가 왕이 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제가 전하를 지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하의 이복형제이자 선대 왕이었던 다리오 전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은 토니는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았다. 

그러나 세르니 공작은 왕의 분노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뻔뻔한 얼굴로 화를 냈다.



“평생을 지방에서 숨죽이며 살았어야 할 전하를 위라티의 왕으로 만들어 드린 건 접니다!!”


"........"


"서자라는 전하의 약점도! 제 딸 비올라와의 결혼으로 덮을 수 있습니다. 고작 상인의 딸인 마리를 누가 이 나라의 왕비로 인정하겠습니까! 서자라도 왕가의 핏줄인 전하와 태생부터 다른 그녀는 한 공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칼을 치켜든 토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곧 칼을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숨죽여 울었다. 


죄책감과 분노, 슬픔으로 엉망이 된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르니 공작이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


"전하의 딸인 모니카는 공주로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공작은 탐욕에 가득찬 눈으로 토니를 보며 미소지었다.



"허나 거기까집니다. 더 이상은 양보해 드릴 수 없습니다."

"이제 선택은 전하께서 하시지요. 왕위와 딸을 지킬 것인지,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인지."



결국 목숨은 손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마리의 폐위에 사인을 하는 토니를 보던 세르니 공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말했다.



“평생 공주님의 안전을 약속하지요. 성년이 된 이후의 결혼 생활도 유복하고 평화롭게 지켜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혼과 재혼만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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