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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Nov 11. 2024

또라이들의 광견들

사건을 조사하러 차비를 하던 헤르나는 현재 알고 있는 정보를 토마스와 공유할 것인지, 말 것인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원래대로라면 공조로 보냈으니 공유하는 것이 맞으나, 그는 사건의 해결여부와 상관없이 빠져나갈 길이 있었다.

다만 빠져나갈 길이라 해도, 그녀를 죽이고 죄를 덮어씌우는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딱봐도 적 같은 놈에게 정보를 나눠줘 봐야, 여차하면 내 등에 칼이나 꽂을 테지.'



이사벨이 토마스를 믿는 것처럼, 헤르나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설령 자신이 진상을 해결하지 못하거나, 토마스에게 죽게 되어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대신 날뛰어줄 두 사람.

리온과 스카드가 있었다.


자신의 가신이 문책받길 원치 않는 리온은 절대 호락호락하게 책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리온보다 백배는 더 든든한 스카드가 자신의 죽음과 가문의 위험을 그대로 좌시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스카드도 이사벨을 조사하고 있을테고. 리온 역시 이렇게 비싼 마검을 쥐어줬으니 질 수는 없지."



헤르나에게는 토마스가 믿는 구석 때문에 태평한 것인지, 다른 목적 때문에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퍼져있다고 하기에는 그 역시 뒤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는 듯했다.



'일단 나를 죽일 방도부터 먼저 마련하고 시작하려는 건가?'

'범인은 무조건 내가 먼저 찾아야 돼...'



헤르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안쪽 주머니에서 마검을 챙긴 뒤, 사건이 일어난 해역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이스터스 항구에 배를 대고 내렸다.

그곳의 주점에 들러 한참을 여러 사람들과 정보를 교류하던 중,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기는 손과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빼놓고 가다니 서운한데."



반갑지 않은 얼굴, 토마스가 웃고 있었다.



그는 배가 항구에 도착한 것을 느끼고 힘겹게 방에서 빠져나왔지만, 그녀는 이미 배 안의 경호를 수하들에게 맡기고 단신으로 나선 상태였다.

어디에 가는지 딱히 밝히진 않았지만, 어느 마을이나 가장 많은 정보가 오가는 곳은 주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도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서 따라왔다.



"쳇...."



토마스는 헤르나의 일그러진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연인이라도 되는 양, 가까이 붙어서 먹히지도 않을 잔망을 떨었다.

그의 모습이 남들 앞에서 일행인 듯, 친분이 있는 척 이야기의 흐름에 올라타 들으려고 하는 속내라는 것은 헤르나에게 잘 읽히는 뻔한 수였다.


그녀는 귀찮은 파리가 옆에 온 듯, 토마스의 손을 털어내 듯 치우고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발이 없냐, 머리가 없냐. 눈치껏 알아서 움직여."


"그래서 눈치껏 나오려고 했더니, 누군가 방문을 막아놨더라고."



헤르나는 시치미를 떼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토마스를 바라봤다.



"저런... 그 주둥이를 막았어야 했는데."



포기했다는 듯 머리를 젓던 토마스가 지금까지 들은 정보는 무엇인지 교환하기를 원했지만, 헤르나는 미소로 거절했다.



"작은 정보 하나 못 물어오는 쓸모없는 놈과 섞을 뉴스 따위는 없어."



비난하는 말투와 다르게 눈웃음을 치던 헤르나는 토마스의 품을 파고들어 끌어안았다.


토마스의 구레나룻을 쓰다듬고는, 기껏 왔으니 술이나 한 잔 한 뒤 여관에서 머물다 내일 출발 시간에 늦지 않게 오라고 다독였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난색을 표하며 변명하려는 듯 입을 떼는 그에게, 헤르나는 틈도 주지 않고 귓가에 약 올리듯 속삭였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거면, 끝까지 연약한 도련님을 잘 연기했었어야지."


"........"



토마스는 자신의 뺨에 입을 맞추고 주점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 금세 따라나섰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간 것인지 대로에는 보이지 않자 빠르게 골목을 하나하나 살피며 헤르나의 흔적을 살폈지만, 빠르게도 모습을 감춘 뒤였다.


하는 수 없이 주점으로 돌아갔으나, 헤르나와 말을 섞었던 자들은 더 이상의 정보 팔기를 거절했다.


그녀가 준 것으로 예상되는 금화 주머니를 턱 하니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비밀 유지값이라는 그들의 말에 토마스는 코웃음을 쳤다. 

두배로 쳐주겠다며 자신만만하게 허리춤을 살폈으나 그의 돈주머니는 잘려나간 지 오래였다.



'이 소매치기가...!!!'



토마스는 자신의 돈주머니를 들고 튀어버린 헤르나를 생각 하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한 발 늦었지만, 암거래상을 찾아 다른 정보라도 들으려 터덜터덜 옮기는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날랜 암살자가 아니라 비 맞은 개 같았다.


삼켜야 하는 분노로 속이 들끓는 토마스 역시 함께 일하라고 붙여준 헤르나가 영 마땅치 않았다.

이사벨(브리텐드의 국왕)에게서 리온은 만만치 않은 상대이기 때문에,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어떻게든 사건을 책임 없음으로 종결시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저렇게 또라이 같은 상대를 자신과 함께 일하라고 붙일 줄은.



'많은 귀족들 중에 왜 하필 저 미친개가 사건 담당인 거야...!'



방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에게는 그 시간이 그녀를 피해 배 안에서 첩자가 될 사람과 함께 사건을 모색할 수 있는 유일한 틈이었다.


방에 있는 척, 돈을 주고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침대에 눕혀두고는 몰래 배 안을 돌아다니며 상황과 환경을 파악하느라 시간을 꽤나 잡아먹었다.

그동안 그녀를 처리할 방법과 흔적을 지우는 것까지 동선을 파악하고 계책을 마련했지만, 헤르나를 떠올리면 자꾸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던 연민이 차오르곤 했다.


뒷골목에서 살수로 일하던 본인이 여왕의 눈에 들어 그녀의 수족이 되고, 귀족으로 임명받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외롭고 힘들게 싸워왔는지.

자신 같은 비주류가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모두를 이기고도 다시 한번 편견에 맞서 싸워가야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여자로서... 네가 가문의 수장이 될 때까지, 너 역시 수많은 파도를 넘어왔던 거겠지....'



태어날 때부터 왕족이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던 이사벨은 자신의 쓸모를 인정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공감하지 못했다.

그건 힘들 줄 알면서 그녀를 사지로 내몬 리온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들에게 토마스와 헤르나는 그들이 가진 좋은 패 중 하나일 뿐, 진심으로 이해하고 안아주기엔 무리였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군."



가끔씩 토마스는 아무리 손을 닦아내고 몸을 씻어내도 자신에게서 온통 피냄새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비싼 옷을 차려입고 귀족행세를 하지만, 실상은 낡은 옷과 거친 모습으로 여전히 피웅덩이 속에 쓰러진 상대를 보며 서 있는 듯한 기분.

그런 기분은 타인을 경계해야 하는 일이 있을수록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사벨의 투견'



브리텐드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자신을 뒤에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신분 세탁을 해도, 하는 일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신귀족인 토마스는 그저 여왕을 위해 싸우는 개에 불과했다.


상처로 얼룩진 자신의 몸을 핥으며, 적이든 아니든 다가올수록 이를 더 드러내고 강하게 으르렁대는 투견.

그 경기장 안에서 죽어야만 만날 수 있는 평화를, 차마 갈망하지도 못하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공격하고 싸우는 투견.

그런 건 자신뿐인 줄 알았는데...



"왜 너도....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까...."



헤르나를 떠올리던 토마스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여성으로서 가주가 되었다고는 해도, 날 때부터 귀족은 귀족.

네 처지나 성장 배경은 나와 하늘과 땅 차이였겠지.

너를 생각하는 건 내게 사치야.




..........


"반했냐?"



뒤늦게 식사시간에 나타난 토마스를 보고 헤르나가 비꼬았다.

뜻 모를 소리에 못 들은 척 자리에 앉았는데, 그녀는 토마스를 빤히 응시하다 다시 말을 꺼냈다.



"상사병이라도 걸려서 방에서 못 나오나 했지."



상시 방에 틀어박혀 대체 뭘하는지 이해할 수 없던 헤르나가 떠보듯 이야기 했지만, 그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감이 지나치군."



새로운 유형의 시비라 생각하고 무시하는 토마스에게, 헤르나는 가슴의 끈을 풀어서 슬쩍 보여주었다.



"푸웁---!!!!!"



예상 밖의 행동에 토마스가 입안의 포도주를 모두 뿜어버리면서 식탁은 엉망이 되었다.



"먼저 먹었으니 망정이지 더러워서 같이 못 있겠네!" 



그는 자리를 피하는 헤르나의 손목을 끌어다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뭐, 어쩔 건데. 하는 눈빛의 그녀를 보니 확실히 피하려 했던 도발에 자신이 걸렸음이 맞았다.



"뮐러 후작."


"?"


"이런 도발은 안 하는 편이 좋아."



헤르나는 정색하며 이야기하는 토마스에게 별 대응을 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제껏 제대로 본 적 없던 그의 눈동자는 까맣고 깊었다.

머리카락으로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이마의 상처는 정말 가까이 얼굴을 마주해야 알 수 있었다.

얼굴보다 몸에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는, 그가 지나온 인생을 설명해 줄 것 같았다.


말이 없는 헤르나를 보는 토마스 역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름다웠지만, 특히 눈동자가 가을을 닮았다.

가늘게 뜰 때면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다가도, 제대로 마주칠 땐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처럼 보이는 눈이었다.

근육은 있지만 군살 없는 허리는 한 손으로 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런 말없이 서로의 얼굴과 몸을 탐닉하듯 살피던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정적을 느꼈다.



"........"



맛있게 먹으라는 말과 함께 일어서는 헤르나를 돌아보지도 않던 토마스는, 그녀의 기척이 전부 사라지고 나서야 식사를 시작했다.


..........




<그 머리>



백설공주의 방이 있는 복도에서 스카드와 마주친 칸나의 심정은 미묘했다.

바로 어제, 연분홍빛으로 염색한 자신의 머리카락이 새삼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



한참이나 자신의 얼굴에서 시선이 떠나질 않는 스카드를 보는 칸나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배회했다.

그 머리는 또 뭐냐며 잔소리를 해올 것 같다는 생각에, 이미 머리색 문제에서는 자유로워졌음에도 다시 변명의 말을 먼저 고르게 됐다.



"그 머리....."


"아..."


"그 머리...."


"제가 좋아하는 색이어서....."



좋지도 싫지도 않은, 어딘가 이해가 안된다는 듯한 얼굴로 보던 스카드는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잘 어울리십니다."


"?!"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당황해서 눈이 커지는 칸나를 뒤로 하고 그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태도를 곱씹던 칸나는, 스카드가 원래는 욕을 하려다가 간신히 참고 다른 말을 꺼낸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버벅대는 걸 보면, 어지간히 어처구니가 없었나 본데...'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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