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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Nov 18. 2024

핑크빛 세상

백설공주를 만나러 온 스카드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핑크빛 세상이었다.

벽부터 바닥, 소품들까지 여기저기 핑크빛들로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방에 하나둘씩 핑크색이 늘어나고 있었다.



'백설공주도 슬슬 그럴 때인가...'



자신에게는 딸이 없지만, 어릴 적 엘레나를 통해서 여자 아이들이 핑크세상에 빠지는 시기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스카드는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핑크 다이아몬드를 세공해서 액세서리를 만들게 해야겠군...' 



조카에게 줄 선물을 계획하는 그의 머리에, 백설공주가 핑크 리본을 달아주면서 이 날의 소꿉놀이는 시작되었다.


엄마가 없다는 슬픔이나 구김살 없이 칸나를 엄마로 받아들이며 밝게 자라나는 백설공주를 볼 때마다, 스카드는 두 사람 모두에게 고마우면서도 엘레나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전술을 계획하는 것보다 힘든 소꿉놀이를 식은땀 흘리며 어렵게 마치고, 피곤해하는 백설공주를 품에 안아 재운 뒤 조용히 방을 빠져나오던 그의 앞에 또 다른 핑크빛이 펼쳐졌다.



"!"



표정을 보니 자신보다는 칸나가 더 당황한 것 같았다.

아마도 성에 들어오자마자 머리색으로 곤욕과 망신을 겪었던 경험 때문인지, 이미 끝난 문제에도 그녀는 불안한 눈동자를 지우지 못했다.



이제 와 머리색이 또 바뀐 게 뭐 대수라고...

아마도 요즘 부쩍 핑크색을 좋아하는 백설공주를 위해 염색을 한 거겠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칸나 못지않게 스카드 역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당황했다기보다 스턴마법에라도 걸린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미동도 않은 채 칸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참이나 자신을 향해 뜨거운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칸나의 눈이 이리저리 허공을 배회하자, 어렵게 그가 입을 떼었다.



"그 머리....."



또 뭐라고 트집을 잡으려나, 왕비면 그에 걸맞게 행동하라는 말을 하려나, 대략 예상되는 범위의 말에 모든 대답을 생각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던 칸나의 뒤통수를 세게 쳐준 건 오히려 칭찬이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



스카드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칸나는 멍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뒤늦게 돌아보았지만, 이미 그는 멀어진 뒷모습뿐이었다. 

다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몇 번이나 말이 밖으로 나오려다 말았던 스카드의 입을 떠올리며, 그 안에 차마 나오지 못한 험한 말이 담겨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가식이든 뭐든 잘 어울린다고 했으니, 나중에 딴소리는 않겠지.'



한 걸음도 쉬지 않고 빠르게 성 밖으로 나온 스카드가 숨을 토해내듯 뱉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시작된 두통이 빠르게 그를 덮쳐왔다.



"으윽..."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그를 본 론*이 뛰어와 스카드를 부축해 마차에 태우고 집으로 달렸다.

*론 오베르 - 프로이센 가문을 오랫동안 섬겨왔던 수석 집사



"하...."



마차 안에서 다시 숨을 토해내고, 셔츠의 단추를 풀며 호흡을 고른 스카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론에게 불평했다.



"아무래도 내가 먹은 그 약... 어디 돌팔이한테서 지어온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머리가 아파. 잠을 잘 자라고 지은 것치고는 계속 꿈을 꾼다고. 말도 안 되는 게 떠올라서 미치겠어."


"말도 안 되는 거요?"



마지막 말에 집중하듯 되묻는 론 앞에 스카드는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서 전부 다 문제라며 눈을 흘겼다.



"업무에 치중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니, 편히 주무실 수 있는 약을 부탁했습니다. 일반적인 수면제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수면제는 아니라는 론의 말에 그럼 그렇지 하며 쯧, 하고 혀를 찬 스카드는 계속 불만스럽게 털어놓았다.



"뭐가 들었는데 깊은 잠은 안 들고 꿈을 꾸는 거야?"


"무슨 꿈을 꾸시길래..."



뭐가 들었냐니까. 이 사람이...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약을 지어온 거 아냐?



고개를 들어 마차의 천장을 바라보던 스카드는 눈을 감고 꿈을 떠올려봤다.



"몰라... 정확하게는. 얼굴은 보이지 않는 어떤 아이가 나오는 거야."


"...아이요?"


"그래... 머리가 분홍색인..........."



스카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집에 돌아온 스카드는 론에게 그 약에 뭐가 들었는지를 물었고, 론은 약과 함께 약사가 적어준 종이를 가져다 그에게 보여주었다.

원래대로라면 약사가 따로 제조법을 공유하지는 않으나, 프로이센 가문에서 요청한 것이기에 차후 문제가 되지 않도록 몰래 적어준 것이었다.

종이 속에 적힌 재료들을 확인하던 스카드는 딱히 문제 될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포피조차 없는데.... 환각? 같은 걸 보게 하긴 어려울 것 같고.... 아니, 애초에 꿈이니 환각은 아닌가."



계속 고민하던 스카드는 혹시 그 약이 마녀에게서 지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의 말에 론은 고심하는 듯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날이 밝는 대로 약사를 데려오겠다 말했다.

찰나에 스치는 론의 얼굴을 캐치한 스카드가 의자 뒤로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럼 이제 자네가 짚이는 부분에 대해 말해볼까."



론은 상점의 약사 중 한 명이 노환으로 물러나고, 다른 사람이 대체되어 왔다고 전했다.


새로 고용된 사람은 초면으로, 보조로 일하고 있었으며 젊은 나이에도 약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아 고용했다는 말에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고.

접수차 증상을 메모하는 이는 새로운 사람였지만, 약은 당연히 원래 있던 약사에게 짓도록 했다는 론의 말에 스카드는 둘 다 데려오도록 시켰다.



"우리말을 무시하고 새로 온 사람에게 일을 떠넘겼을 수도 있고, 독단으로 새로 온 사람이 뭔가를 꾸몄을 수도 있으니 둘 다 데려와. 어느 쪽이든 교훈은 필요한 것 같군."



론을 방에서 내보낸 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스카드는,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그와 별개로 불쾌함도 몰려왔다.



'오늘도 그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려나.'



약을 먹은 지 일주일쯤, 스카드는 나흘 전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에서 자신은 소년이었으며, 어떤 소녀와 함께 있었고, 그 아이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그 아이를 보는 자신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만 꿈에서 둘은 함께 걷거나, 함께 뛰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들을 갖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자신과 그 아이는 행복해 보였지만, 이건 스카드의 과거에 없던 일이었다.



'환상을 보는 걸까.'

'오늘 그 머리색을 봤으니, 예지몽인가.'



대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꿈과, 오늘 본 칸나의 모습이 뒤엉키면서 불쾌함이 배로 몰려왔다.

안 그래도 많은 업무에 헤르나의 걱정까지 얹어지며 이전보다 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스카드를 본 론이, 그를 배려하기 위해 약을 지어온 것인데 이게 오히려 일을 만들 줄이야.



"편히 쉴 팔자는 못되나 본데."



스카드는 머리맡에 있는 약을 쳐다보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잠들겠다며 누워서 버텼다.




<돌팔이 약사>



다음 날, 피곤과 스트레스로 평소보다 몇 배는 예민해져 있는 스카드의 앞에 약사 두 사람이 불려 왔다.


덩치가 큰 약 상점의 남자 주인과, 새로 왔다던 작고 깡마른 여자 직원이었다.

날카로운 스카드의 눈빛을 본 둘은 바들바들 떨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의 압력을 계속 그들에게 가했다.


얼어붙은 분위기에 이대로라면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이 든 론이, 스카드가 좋아하는 차를 가져다주며 조심스럽게 그에게 진정하시라 권했다.



"......."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스카드가 약 상점의 주인에게 먼저 질문을 건넸다.



"이 약은 누가 만들었지?"


"그.. 그 약은..."



잠시 버벅대던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옆에 있는 직원의 눈치를 보았다.



"대답을 안 하거나, 거짓을 고하면 이 방에 걸어 들어온 대로 멀쩡히 나가긴 어려울 거야."


"히익-!"



놀란 주인이 엎드려 죄송하다고 사죄를 했다.

옆에 있던 직원도 덩달아 엎드려 사죄를 하는데 몸을 숙이던 찰나, 그녀의 옷자락 안에 반짝이는 게 보였다.



"?"



스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턱을 받쳐 얼굴을 들어 올렸다.


녹색 눈동자와 주근깨, 홍조가 있는 얼굴의 그녀는 꽤 앳되어 보였다.

그러나 목 전체의 상처와 거친 손은 앳된 얼굴과 상반되는 삶의 풍파를 말해주고 있었다.



"실례."



스카드는 조심스레 그녀의 목 옆쪽의 줄을 당겨 목걸이를 빼어 들었다.

그녀는 당황했지만, 그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 목걸이 끝에는 작은 마나석이 달려있었다.



"마녀로군."


"......."


"알고 고용한 건가?"



스카드는 눈을 내리깔고 옆에 엎드려있는 상점 주인에게 물었다.

우물쭈물하던 주인은 정말 죄송하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며 간절히 빌었다.



"마녀를 일반 약 상점에 고용하는 것은 불법인데."


"그... 그게..."


"약에 대해서 빠삭하다더니. 그럴만하군."



스카드는 상점 주인을 내보내며 론을 통해 그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단단히 당부해 둘 것을 일렀다.

그리고 그녀와 단 둘이 자리를 옮겨 응접실로 옮긴 뒤, 마주 보고 앉았다.



"마셔."


"......."


"긴장을 풀어주는 차야. 독 같은 건 없어."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차를 마시는 그녀를 빤히 보던 스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름은?"


"......."



그녀는 귀족들이 자신 같은 하층민의 이름을 묻는 경우가 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을 묻는 경우는 장기 고용, 혹은 따로 계약을 해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보복성을 띤 질문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잘못했습니다."


"그 얘기는 지겹도록 들었어. 용서는 네가 얼마나 진실하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달려있고."



그녀는 다 포기한 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리마입니다."


"그래, 리마. 반가워. 난 네가 조제한 약을 먹고 요즘 좀 이상해진 스카드 프로이센이야."



스카드의 말에 리마가 움찔했다.

씨익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 긴장을 풀어주려 한 농담이었다는 걸 알게 된 리마의 몸이 경직된 상태에서 한층 부드러워졌다.

살짝 내려간 그녀의 어깨와 좀 더 편안해진 자세를 확인한 스카드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마녀라면, 따로 물약 상점이나 마법 물품을 파는 곳에서 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일반 약을 조제하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된 거지?"


".....실은 저는 마력을 잃었어요. 그래서... 마법 상점에서 일하기엔 쓸모가 없어요. 거기엔 마법으로 물건을 만들어야 하니까...."



마력을 잃은 마녀는, 그들 사이에서 허드렛일도 할 수 없는 걸까?

그렇다면 일반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마녀였다는 걸 숨기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건?"



리마는 그의 말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과연, 마녀의 세계를 잘 모르는 스카드가 할 법한 이야기였다.



"마녀는, 단지 마녀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있지만.. 마력을 잃은 마녀 역시 평범하게 살지 못해요. 더 이상 마녀로서의 쓸모는 없고, 일반적으로 살아가기엔 이미 마녀의 흔적이 많이 남았거든요."


"일반 사람들은 애초에 네가 마녀라는 걸 알지 않았다면, 마력을 잃은 뒤라 해도 구별할 수는 없을 텐데. 네 말은, 마녀들 사이에서 다른 종류의 차별이 있다는 얘기야?"



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마녀 토벌이 있었던 때, 마력을 잃은 마녀들이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 왕실의 첩자가 되었었거든요. 그로 인해서 마력을 잃은 마녀들과 다른 마녀들 사이에는, 아직 해소되지 않은 감정의 골과 의심들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어요."


".....그래서 마력을 잃은 마녀들은 다른 마녀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도 없고, 마을 내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의심과 불안의 눈초리를 가진 그들에 의해서 언제 정체가 드러날지 모른다는 거군?"


"네."


"과연... 마녀였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좋아하지 않겠지. 차별이라는 건,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도 포함되니까."



마력을 잃은 마녀들.


대대적인 마녀 토벌이 있던 당시, 나라에서는 그들을 회유하고자 큰 포상을 걸었다. 

그들을 이용해 마녀에 대한 정보를 캐고 대항할 방법을 마련했으며, 숨은 마녀들까지 찾아내서 처형했었다.


그 뒤로 사람들이 잊고 지냈던 잔인한 과거들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현재에도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마력이 있는 자들과 마력이 없는 자들, 마력이 있는 자들과 마력을 잃은 자들.

그리고 마력이 없는 자들과 마력을 잃은 자들.

그들 사이에 있는 균열들은 언제든 깨져서 날카로운 파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게 스카드의 책임은 아니었으나, 마주 앉아있는 그녀의 상처가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깊이 자리했음을 느낀 탓일까? 

그는 앞에 앉은 리마에게 왜인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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