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는 지오니의 일기장을 손으로 쓸었다.
지오니의 유품으로 남은 기록들은 칸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고, 그녀가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어주었다.
얼마 뒤, 칸나는 그 안에서 이다에 대한 짧은 기록을 발견했다.
그 속에 적힌 '이다' 라는 마녀가 자신이 만났던 그 사람이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기장 안의 그녀는 타락한 마녀도 아니었으며 왕실과 연관되어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마녀 토벌 이후에 크게 변화한 건가...'
칸나는 지오니가 만났던, 자신을 축복해 주었던 이다가 자신이 만난 마녀가 맞기를 바랐다.
그래서 위험한 기로에 놓여있긴 하지만, 그녀의 미래가 흑마술에 심취해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것은 아니기를 기대하면서.
그간 계속 이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 노력하던 칸나는, 문득 그녀가 바라는 게 잃은 무언가를 되찾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다의 비밀은 남에게 쉽게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되찾고 싶었던 자신의 간절함과 어딘가 닮아있었다.
.......
"아니야아아아---!!!!"
칸나는 테이블에 놓인 물건들을 팔로 모두 쓸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채로 주저앉아 멍하니 문 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유리관에 놓인 지오니의 시체가 들어왔다.
이번에도 지오니를 되살리는 일에 실패한 그녀는 가슴팍을 쥐어뜯으며 목놓아 울었다.
"....엄마....."
한 달 전, 지오니가 세상을 떠났다.
지오니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던 칸나는 집에 있는 마법책을 비롯해서, 금서로 지정되어 암거래로 얻을 수 있는 책들까지 모두 읽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의 부활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시든 꽃에 생기를 불어넣는 마법과 병을 치료하는 마법을 섞어가며,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지오니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나마 마법으로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는 것을 알아내서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시체를 상하지 않게 해 두었지만, 더는 칸나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그만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고 장례를 치러야 하는 때에도 도무지 몸과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오니를 되살리기 위해 식사도 거르며 잠도 자지 않고 매달렸던 칸나의 육체는 이미 많이 망가져 있었고, 정신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미쳐가거나 함께 죽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살아달라' 는 지오니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싫어..."
칸나는 왜 혼자 남은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하느냐며 엎드려 아이처럼 엉엉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
눈부심에 살며시 눈을 뜨니 눈물에 촉촉이 젖은 그녀의 속눈썹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누워있는 지오니의 얼굴 위로 내려오는 작은 거미 한 마리를 손으로 쳐내고 중얼거렸다.
"관... 있어야겠네..."
그녀는 계속해서 엄마를 보고 싶은 욕심에, 속이 보이지 않는 나무 관 안에 지오니를 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장의사 안톤을 찾아가 뚜껑이 유리로 된 관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 의뢰를 받아본 적도 그런 관을 본 적도 없는 안톤은 그녀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계속해서 매달리는 간절한 외침을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는 대가로 넉넉한 돈을 받은 그는, 눈물로 호소했던 칸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자는 시간마저 줄여 유리 뚜껑이 달린 관을 만들어주었다.
얼마 뒤, 안톤은 완성된 관을 천으로 덮어 짐수레 뒤에 실어서 마을의 끝으로 향했다.
못 본 사이에 더 핼쑥해진 칸나의 얼굴을 보고 놀란 그가 위로할 말을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짐수레를 잠깐 빌려가고 싶다며 곧 돌려주겠다는 말과 함께 추가금을 건네고 떠났다.
집에 도착해서도 한참 동안 유리관을 바라보던 칸나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지오니의 시체를 옮기기 시작했다.
마법의 영향으로 그저 잠든 듯 있는 그녀였기에, 힘은 들었지만 칸나 혼자서도 옮길 수 있었다.
자신의 등에 업힌 지오니의 몸이 차갑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다시 죽음을 절감한 칸나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지만 이전보다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칸나는 관 안을 부드러운 천으로 깔고 지오니가 좋아했던 꽃들을 넣어주었다.
조심스레 그녀를 눕히고 얼굴과 손을 깨끗한 천으로 닦아주며 그동안 못다 한 말들을 건넸다.
갑작스레 죽었다기엔 너무도 평온한 얼굴의 지오니가 칸나에게 위로가 되기도, 원망이 되기도 하는 날이었다.
.......
칸나는 지오니의 죽음 이후, 그녀의 부활을 위해 미친 사람처럼 노력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그녀가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도 아깝지 않았던 날들.
어떤 시간과 어떤 희생을 감내해서라도 되살리고 싶었던 사람.
칸나에게 남아있었던 유일한 가족.
결국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칸나는, 절망 속의 좌절에 가라앉아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지만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지오니를 묻을 때에도 그녀의 심장 위에 마법을 건 마나 목걸이를 올려두어 부패를 방지해 두었다.
그건 어쩌면 누군가를 통해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버릴 수 없는 일말의 기대가 희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맨 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침대 옆 협탁에 초 하나만 켜둔 채 침대에 앉아 아무런 말이 없던 칸나는, 이다가 나오는 부분을 다시 읽어보았다.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짧게 있던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기억에 없는 그의 존재에 새삼 의문을 가졌다.
'어째서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을까...'
사실 지오니의 일기장은 칸나의 갓난아기 시절에 대한 기록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칸나는 '에밋' 이라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그의 정보를 알 수 없었다.
한 때는 자기들이 버려졌다는 가정 하에 그에 대한 증오로 지오니가 기록을 삭제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혹이 있었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혈육은 (어딘가 살아있다면) 아버지뿐이었다.
"죽었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면... 어딘가에라도 적어두었을 텐데."
지오니의 사후* 마을 탐문을 시작으로 왕비가 된 이후에는 모든 귀족들에 대한 기록을 되짚으며, 혹시 에밋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찾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사후(死後) - 죽고 난 이후
'다른 나라 사람이었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은데, 초상화라도 남아 있었으면 이렇게 맹목적인 그리움이 한편에 자리 잡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 밖은 유난히 밝았고, 구름도 없는 맑은 밤이었다.
환하게 뜬 달을 눈에 담으며 창가로 불어오는 바람에 계절의 공기를 느끼던 칸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상념을 내려놓느라 리온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불로불사는 불가능.'
'부활도 불가능.'
'부귀영화를 바라는 타입 같지는 않았는데...'
"함께 이뤄갈 수 있다면 돕고 싶은데... 당신이 정말로 바라는 건 무엇이었을까..."
어느새 뒤에 다가온 리온은 칸나의 작은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이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야 우리 아이를 갖는 거지."
"?!"
리온은 놀라 돌아보는 칸나를 끌어안고서 이제야 우리의 마음이 통한 것 같다며 기뻐했다.
당황하며 아니라고 말하는 그녀의 작은 외침을 뒤로한 채, 그는 칸나를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턱 끝에서부터 목과 쇄골을 쓸어내리는 리온의 손길이 불편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칸나의 귀부터 목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모습이 수줍어서 그런 것인 줄 알았던 리온은, 이내 거절의 표현인 것을 알고 칸나의 치마 속을 들어 올리던 손길을 멈췄다.
".....왜 그래?"
........
사랑에 빠진 남자.
잘생기고 부유한 남자.
만고불변*의 왕이라는 특별한 존재.
*만고불변(萬古不變) -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아니함.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난 탓인지, 모친을 잃은 외로움에 여전히 마음이 공허한 탓인지, 칸나는 리온에게 쉽게 빠져들었다.
다만 그가 가진 수많은 조건들 가운데 칸나의 흥미를 가장 끌었던 것은, '남자' 로서의 매력이나 그가 가진 신분이 아니라 '왕실 서고의 모든 책을 보여줄 수 있다' 는 점이었다.
그간 제르만에서는 마녀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끊이지 않았음에도, 마법책을 비롯해 마녀의 유서*들에 관해 기록된 책들이 여전히 왕실의 비밀 서고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서(由緖) -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까닭과 내력.
그리고 리온에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칸나의 눈이 반짝였다.
결국 그녀의 지적 호기심을 끌었던 순간을 확실히 캐치한 리온의 적극적인 어필과 함께 사랑의 표현이 칸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엄마를 되살릴 수 있는, 내가 모르는 방법이 그 안에 있을지 몰라.'
........
".....무슨 생각해?"
상처받은 듯한 리온의 얼굴을 보는 칸나가 아차 싶어 얼른 몸을 일으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피곤해서 그래요. 미안해요."
리온은 웃으며 칸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등 쪽에 있는 드레스 끈을 풀기 시작했다.
"조금만 상대해 줘. 나 오늘 네가 너무 보고 싶었거든."
<또라이들의 광견들>
헤르나는 멀미를 한다며 툭하면 방에 틀어박히는 토마스를 이해 못 하면서도, 하는 척 자유롭게 놔두며 신경을 쓰지 않으려 애썼다.
'일하라고 왔으면서 창틀에 놓인 화분인 척 하고 있네.'
차라리 나오지 못하게 방문 밖에서 나무 판으로 못을 박아 버릴까 고민하던 그녀의 귀에 하나의 소식이 들려왔다.
"초록색 해적 깃발이었단 말이지..? 칼이 세 개 그려진."
"네. 사건이 일어났던 해역 주변에는 목격자가 없었지만, 브리텐드의 물건을 실은 배가 남쪽 항구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물건? 포피?"
"아뇨. 의상과 고급 가구들이었다고..."
약재야 시간을 오래 들이면 암시장에서 속여 팔 수 있다지만, 브리텐드 물건은 챙겨서 어디다 쓰려는 걸까.
해적들에게는 별 필요가 없는 그런 물건들.
잘못하다간 위험할 수 있는, 꼬리가 밟힐 물건들일텐데.
헤르나는 쯧, 혀를 차고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이 정말 맞나 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