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Sep 18. 2023

가족이 되어간다는 것은

   2020년 코로나가 시작될 때 회사를 그만두었으니 은퇴 생활을 한지도 이제 3년 하고도 몇 달이 지났다. 쓰고 보니 긴 시간이다. 벌써 3년이 넘었다니. 그럼 나는 3년 동안 무엇을 했나... 하는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고. 중요한 건 그 3년을 넘기면서 모아 두었던 돈이 바닥을 드러 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집을 갈아먹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작년 12월에 살던 집을 내놓았고, 젊은 신혼부부가 덥석 물었다. 판교에 직장을 가진 맞벌이 부부였다. 둘 다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표정이 밝았다.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하는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두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지역을 찾았다.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거주비가 저렴한 곳. 그래서 그 차액을 생활비로 돌릴 수 있는 곳. 그러면서도 꼭 한번 살아보고 싶었던 곳. 부산이 그랬다. 살 지역을 고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올해 2월, 똘망똘망한 신혼부부에게 집을 내어주고 그들에게 받은 전세보증금을 들고 유럽으로 떠났다가 6월 말에 돌아왔다. 유럽에서의 일들도 물론 할 말이 많지만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아니니 접어두고.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오자마자 부산으로 향했다. 어렵사리 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집을 계약했고, 9월로 입주일이 정해졌다. 부산으로 가기 전까지는 처형네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여행 내내 함께 했던 캐리어의 짐들은 처형네 비어있는 작은방에 풀었다. 그렇게 약 두 달가량의 처가살이가 시작되었다.




   직장인인 처형네가 출근을 하면 집안에 남아있는 아내와 나, 장모님 셋이서 그날의 끼니를 고민한다. 주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보조 역할일 뿐이다. 내 손에 익숙한 냄비와 나에게 길들여진 식칼, 도마, 가늠할 것도 없이 손만 뻗으면 각종 양념통들이 있는 내 주방이었다면 그나마 요리라도 하면서 얹혀사는 것에 대한 나름의 밥값을 했었겠지만 그곳은 장모님의 주방이었다.


   장모님의 주방엔 장모님의 법칙이 있다. 그날의 메인 요리를 결정하는 건 장모님 담당이다. 며칠 전 사놓은 호박이 더 물러지기 전에 된장국을 만드시고, 돼지 목살을 냉동실에 얼리지 않기로 했으니 다음 날에는 김치찌개를 끓이신다. 마트에서 고른 식재료를 카트에 담으면서 각자에 번호표를 발급하고 장모님은 정해진 번호표에 따라 그날의 메뉴를 세팅하신다.


   장모님의 식탁에 우리가 끼면서 장모님의 주방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번호표에 따라 냉장고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식재료가 번호표를 뺏겼다. 내 입맛에 맞는, 내가 좋아할 것만 같은 식재료가 미리 발급된 번호표를 무시하고 우선순위에 올랐다. 이제 막 갓 지은 따뜻한 밥이 좋아요, 라는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셨는지 밥공기에선 늘 김이 모락모락 올랐고, 내가 어떤 반찬에 주로 손이 가는지를 매번 눈여겨보시다가 내 젓가락질이 한 번이라도 더 간 반찬을 다음 끼니때 더 수북이 올리셨다.


   함께 밥을 먹으면서 전에는 하지 않았을 사소한 말들이 늘었다. 언젠가 몸무게가 조금 빠졌다는 말에 장모님이 긴장하셨다. 늘 먹던 대로 먹었는데, 더구나 처형네로 와서는 아침 달리기도 하지 않았는데 몸무게는 왜 빠졌는지. 원인을 모르니 아무거나 원인이 되었다. 날이 더워서 그런가. 요즘 잠을 푹 못 자서 일지도.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이런저런 원인을 들이댔다. 장모님은 그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셨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나. 내놓은 반찬이 부실했나.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자신을 탓하기도 쉬웠다.


   며칠이 지나 역시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예전 몸무게가 체중계의 숫자판에 찍혔고,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와 장모님은 내 몸무게 따위가 뭐라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유를 모르니 아무거나 이유가 되었다. 처가생활이 이제 적응되나 보다. 며칠 지났다고 이제 긴장감이 사라진 거지.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아무 이유나 갖다 붙였다. 장모님은 그 이유를 자신의 덕으로 돌리셨다.

   내가 자네 밥을 담을 때 꾹꾹 눌러 담았어.


당연하다는 듯 잘도 받아 먹었다.


   함께 산다는 것은 함께 밥을 먹는다는 이야기이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밥을 먹는 그 시간만큼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이다. 식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 하루이틀 늘어갈수록 아내의 어머니라는, 어색하고 서먹하던 관계가 녹아내리고, 장모님, 연애 때 순진하신 장인어른 어떻게 꼬셨어요? 라든가 콩나물 국은 솔직히 제가 끓인 게 더 맛있어요, 같은 예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장난기 섞인 농담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진짜 가족이 되어 가는 것이다.


   가족이 되어 간다는 것은 나의 몸무게가 평소보다 1~2kg 빠졌다는 말 만으로도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 빠진 몸무게를 원래대로 채우겠다며 나 몰래 밥을 꾹꾹 눌러 담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혹시라도 빠진 몸무게를 당신 탓이라 생각하실까봐 꾹꾹 눌러 담은 밥을 배가 부른데도 기어이 다 먹는 것이다. 한 번씩 체중계에 올라 빠진 몸무게가 다시 복구되었는지를 확인하면서 혹시라도 1~2kg 더 늘었다면 다이어트해야 하는데 이게 다 장모님 탓이에요, 라고 타박할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진짜 가족이 되어간다는 것은.


   

이전 07화 차돌박이가 일상인 삶이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