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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16. 2023

기초부터 탄탄히

   아내는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나를 따라 아침 달리기를 시작했다. 꽤나 의욕적이긴 했지만 달리기는 만만하지 않았다. 내 뒤에 한참 처진 채로 5km를 달리고 나면 샤워라도 한 듯 온통 땀범벅이 되고 양 볼이 타는 듯 빨개졌는데, 그 빨간 볼 때문인지 얼굴은 더 창백해 보였다. 처음이라 그래, 나도 그랬어, 곧 적응할 거야, 라며 응원했지만 아내는 한 달 가까이 되도록 달리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매번 달리기를 마치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달린 지 한 달쯤 되던 날인가 웬일인지 달리기를 마친 아내의 숨이 편안해 보였다. 전처럼 허리도 숙이지 않았다. 아내는, 달릴 때 숨 말이야, 두 번씩 훅훅, 그러면 더 편하다길래 오늘 그렇게 해봤거든, 그랬더니 정말 편해, 라면서 세상 다 가진 표정을 지었다. 달릴 때 숨 쉬는 법을 인터넷으로 찾아봤단다. 숨 쉬는 법을 몰랐다니. 그런데 달리다 보면 저절로 훅훅 쉬게 되지 않나. 그럼 지금까지는 어떻게 숨을 쉬었던 걸까. 숨 쉬는 법을 검색해 보는 것도 신기했고, 숨 쉬는 법이 인터넷에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며칠이 더 지나고 아내는 다시 한번 세상 다 가진 표정을 지었다. 허리는 꼿꼿이 펴고 시선은 정면에서 15도 위쪽을 보는 거래. 그리고 발바닥 전체로 땅을 디디라더라, 오늘 그렇게 해봤거든, 그랬더니 정말 편해. 달리는 법을 검색해 본 건가. 그런데 달리다 보면 허리는 저절로 펴지지 않나. 고개는 자연스레 살짝 들게 되지 않나. 발바닥 일부로만 땅을 디디는 게 오히려 더 어렵지 않나. 그럼 지금까지는 어떤 자세로 달렸던 걸까. 아내가 숨 쉬는 법과 달리는 법을 몰랐다는 건 나도 정말 몰랐다. 알려주지 않아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미처 알려주지 못했다.


온통 외국어 투성인 리조토 재료.

   아내는 리조토 만드는 법을 인터넷으로 배웠다. 이탈리아 요리 전문 인스타그램을 몇 군데 찾아본 아내는 몇 년째 이탈리아에서 셰프를 하고 있다는 한국인 요리사를 찾았다. 그의 이력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내는 그를 전적으로 믿으며 스승으로 여겼다.


   이탈리아 음식이어서인지 재료가 온통 외국어 투성이다. 올리브유, 버터, 치즈, 바질페스토, 치킨스톡. 그런데 치킨스톡은 조미료 아닌가. 우리나라로 치면 미원이나 다시다 같은 것, 며느리에게도 안 알려준다는 맛이 비밀, 한 숟갈만 넣으면 죽은 음식도 살려낸다는 라면 스푸같은 것 아닌가. 이탈리아 셰프들도 다 쓴데, 인터넷 스승이 그랬다며 아내는 당당했다. 음식의 맛을 치킨스톡 같은 조미료에 의지하다니. 아내의 요리는 아직 멀었다.


볶는다.

   올리브유를 두르고 페퍼론치노와 마늘을 볶는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새우를 더해 함께 볶는다. 마늘의 색이 어느 정도 노릇해지면 버터를 한 숟갈 떼어 넣고, 2인분 분량의 쌀을 넣는다. 아내는, 마늘을 먼저 볶고 쌀은 나중에 넣으라고 했어, 라며 인터넷 스승이 알려준 레시피를 되짚어 보고는 계속 볶는다.


이제 젓는다.

   쌀이 어느 정도 투명해졌다 싶으면 뜨거운 물을 붓는다. 이제 젓는다. 물을 넣고는 계속 저어주어야 냄비 바닥에 들러붙지 않는대. 아내는 가스레인지 불을 켠 이후로 단 한순간도 냄비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인터넷 스승이 알려준 재료를 넣는 최적의 순서를 지키고 인터넷 스승이 강조한 주의사항에 따라 쉬지 않고 젓는다. 물이 졸아들었다 싶으면 물을 보충하고 보충한 물이 다시 졸아들 때까지 젓고 또 젓는다.


계속 젓는다. 끊임없이 젓는다.

   이제 바질페스토 차례이고, 그다음은 치즈가루이다. 넣고 젓고, 젓다가 또 넣고, 넣었으니 다시 젓고.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문득 의문이 든다. 재료 넣는 순서는 볶는 재료, 젓는 재료만 구분하면 될 것 같고 냄비 바닥이 걱정된다면 가끔 한 두 번씩만 저어주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아내는 단호하다. 재료 넣는 순서를 지켜야 재료 본연의 풍미가 살아나고, 정성을 다해 저어주어야 진정한 맛이 우러나는 거라고. 이탈리아 셰프가 유튜브에서 그랬다고. 자신이 생각해 봐도 그게 맞다고.


   20분 이상을 쉬지 않고 볶고 젓으며 정성을 쏟아붓던 아내가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냄비 뚜껑을 닫는다. 뜸을 들이는 시간이다. 5분간의 기다림의 시간 동안 아내는 식사와 곁들일 와인을 잔에 따른다.


완성.

   어때 맛있지? 아내는 자신만만하다. 지키고 따라야 하는 것들을 엄격하게 지키고 따랐으니 절대 실패했을 리가 없다는 표정이다. 레시피를 충실히 따른 아내의 리조토는 당연히 맛있다. 맛은 물론이고 굳이 추가할 필요가 없어 보이던 정성까지도 넘치도록 느낀다.


   내일은 아직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아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기로 했다. 자전거 별거 아니야, 그냥 타다 보면 저절로 타게 될 거야, 라는 말은 아내에게 의미 없다. 당연히 알 것만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도 전혀 모른다고 간주해야 한다. 아내가 못하는 건 정말 몰라서 못하는 거다. 알려주기만 하면 기를 쓰고 기어코 해 낸다. 알려주는 것을 머리에 세기고 철저히 지키고 빈틈없이 따른다. 숨 쉬는 법과 달리는 법을 배워 아침마다 뛰고, 레시피를 법으로 여기며 리조토를 만드는 것처럼.

 

  마음의 준비를 한다. 아내는 백지다. 아내가 알고 있는 건 없다. 아내는 자전거라는 것을 처음 본 사람이다. 이건 핸들이고 손으로 잡는 거야, 여기는 안장인데 네가 앉는 곳이야, 아래는 페달, 여기에 발을 올리고 힘껏 밟으면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가. 기초부터 탄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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