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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20. 2023

완벽한 밥상

   9월, 주민등록증에 주소를 부산으로 세기고 부산 시민이 된 후 처음 맞이한 명절, 추석. 명절에 찾아 뵐 부모님은 늘 서울이나 수도권에 계셨어서 지금까지 명절, 민족의 대이동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광주까지 몇 시간, 부산까지 몇 시간 하는 교통 정보가 뉴스에서 나와도 남의 일이었다. 관심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 난 부산 사람이니까. 민족의 대이동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라디오에선 나를 위해 고속도로의 교통 상황을 알려주고, 가는 도중 지치지 말라며 흥겨운 음악도 틀어주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달리다 보면 고속도로 휴게소가 보이고, 소떡소떡과 호두과자, 핫도그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고. 가는 길을 상상하며 살짝 설레기도 했다.


   내비게이션 화면엔 서울까지 5시간 30분이 걸린다고 나왔다. 서울로 향하는 길은 서울을 빠져나오는 길보다 편안했다. 그래도 명절은 명절인지 가는 중간중간 막히는 길이 나오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야 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내 손엔 따끈한 호두과자가 들려있는데. 내비게이션이 말하던 5시간 30분은 이미 지나고 7시간 가까이 되도록 여전히 서울을 향하는 중이긴 하지만 그럼 또 뭐 어떤가. 난 지금 민족의 대이동을 하는 중인데.




   추석 연휴가 끝나 아들을 다시 부산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날, 엄마는 냉장고에서 큼지막한 밀폐용기 두 통을 꺼냈다. LA갈비와 포기김치였다. 반가운 마음보다 걱정이 먼저 앞섰다. 이제 다시 민족의 대이동에 나서야 하는데. 가는 데만 7시간이 넘게 걸릴 텐데. 차 안에서 음식이 상하지 않을까? 서울에 오기 전 엄마에게 반찬이나 음식은 싸 주더라도 가져가지 않겠다고 미리 경고를 했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차 안에 몇 시간씩 두면 상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괜히 힘들게 고생하지 말라고. 반찬이든 뭐든 내가 직접 만들어 먹으면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그렇다. 미리 다짐을 받아 놓아도 소용이 없다. 이렇게 다 싸놨는데 지가 어쩔 거야, 가지고 가야지, 하는 심보이다. 이럴 거라 예상을 하긴 했다. 상할지도 모르는데 부산까지 어떻게 가지고 가냐며 밀폐용기 통을 밀어낸다. 하지만 엄마는 지을 수 있는 최고치의 섭섭한 표정과 함께, 들고 가는 것도 아니고 차에 싣고 가는 건데 부산이면 어떻고, 미국이면 어때, 하며 물러서지 않는다.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것도 예상했다. 이제 협상의 시간이다.


   LA갈비만 가지고 갈게, 김치는 빼자, 부산 가면 김치 다 쉬어 있을 거야. 그 말에 엄마는 알았다며 순순히 김치를 빼고 LA갈비만을 건넨다. 이건 예상 밖이었다. 고집 센 엄마가 웬일일까. 싱겁게 협상이 완료됐다. LA갈비는 가져가지만 그래도 김치는 뺐다. 이래야 엄마도 고생 덜하지. 무릎도 안 좋은 분이 아들 준다고 쪼그리고 앉아서 음식 만드느라 고생하는 거 이제 그만해야지. LA갈비를 담은 박스에 아이스팩을 위아래, 옆, 사방으로 둘렀다. LA갈비와 함께 다시 민족의 대이동에 나섰다.


   막히는 고속도로 차 안에서 그렇게 쉽게 포기할 엄마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면 김치는 미끼였나. 원래 주려던 것은 LA갈비였는데, 협상 카드로 쓰기 위해 김치 통도 함께 내민 건가. 그러고 보니 정갈하게 포장한 LA갈비통에 비해 김치통은 생활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었던 것 같기도. LA갈비만 가지고 갈게, 라고 했을 때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본 것 같기도.


엄마의 LA갈비.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부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LA갈비 먹어봤어? 간은 잘 맞아? 하고 물으신다. 아, 엄마의 급한 성격을 어쩌나. 엄마, 어제 밤늦게 부산에 도착했잖아, 지금은 아직 밥 먹기도 전이고. 그제야 엄마는 아아, 그래, 아직 못 먹었겠구나, 하며 전화를 끊는다. 말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이다. 얼른 먹어야 한다. 얼른 먹고 후기를 남겨 드려야 한다.


장모님의 마늘 볶음과 더덕 무침.

   부산으로 돌아오는 날, 반찬통을 들려주신 건 장모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멸치볶음과 더덕무침, 심지어 마늘 갈아서 얼린 것과 파 다듬어 얼린 것까지. 멸치볶음과 더덕무침이야 아내가 좋아하는 반찬이니 그렇다 하지만, 부산까지 가야 하는데 마늘과 파 얼린 것은 좀 그렇지 않나. 장모님, 부산이 외국도 아니고 부산에도 마늘하고 파 팔아요, 저희가 사서 다듬으면 돼요, 반찬만 가지고 갈게요.


   곱게 간 마늘과 정성껏 다듬은 파를 거절해서 혹여 서운하셨으려나. 하지만 장모님의 목적도 멸치볶음과 더덕무침 아니었을까. 마늘과 파는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미끼 아니었을까.


완벽한 밥상.

   LA갈비와 멸치볶음, 더덕무침이 반찬인 저녁 밥상이 차려졌다. 내 입맛에도, 아내의 입맛에도 맞는 완벽한 밥상이다. 가는 길이 멀다는 핑계로 이런 완벽한 반찬들을 마다 했으면 어쩔 뻔했나.


   먼 길, 무사히 오기를 기다리며 정성껏 밥상을 차리는 사람, 밥상을 차려줄 수 있는 날이 고작 명절 사나흘뿐이라는 걸 안타까워하는 사람, 떠나는 길에도 어떻게든 밥상에 올릴 반찬들을 손에 들려주려는 사람,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자식의 밥상이 완벽하기를 바라는, 그러니까 부모라는 사람. 이제 그분에게 전화해 오랜만에 맞이한 완벽한 밥상이었다는 후기를 전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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