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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Aug 24. 2023

차돌박이가 일상인 삶이란

   아내는 고기를 좋아한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아내는 그렇지 않다고, 고기보다는 자연식 푸릇푸릇 건강한 채소를 더 좋아한다고 강변하지만 오랫동안 아내를 지켜봐 온 나는 안다. 아내는 포케집에서 보다는 삼겹살 집에서 눈빛이 더 반짝인다는 것을, 산채 정식을 시켰는데 기대하지 않던 제육볶음이 곁들여지기라도 하면 이 집 맛집이네, 라며 후한 평가를 내린다는 것을.


   우리 예전에 그랬었잖아, 하는 연애 때의 말랑말랑한 추억을 꺼낼 때에도 안국역에 있는 1인분에 5만 원이나 하던 주물럭집 기억나지? 하고 운을 뗀다거나 당신 그때 엄청 신났었잖아, 그러니까 제주에서 우리 자주 가던 그 흑돼지 집에서 말이야, 하는 식으로 유독 고깃집을 많이 소환하는 걸 보면 아내는 고기를 먹을 때 어떤 특정 호르몬이 더욱 활성화되는 듯하다. 그 호르몬이 고기를 먹고 다진 토대 위에 알콩달콩한 좋은 기억만을 쌓아 올리는 게 아닐까.


   고기보다 채소를 더 좋아한다는 아내의 말이 물론 거짓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아내에게는 무의식 속, 평상시에는 잠들어 있다가 혀 끝에 고기 신호를 접했을 때 번뜩 깨어나 알콩달콩 호르몬을 내뿜으며 환호하는 뇌의 어떤 부분이 존재함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깃집이 배경인 기억이 유독 알콩달콩하기만 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면 고기가 생각난다. 우울한 기분을 끌어올리고 싶을 때에도 괜찮고, 밋밋한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을 때에도 좋다. 쓰고 보니 그럼 매일매일인 건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고기는 무언가 의미를 붙여 주어야 할 것 같은 끼니이다. 하다못해 고기 먹기 딱 좋은 날씨잖아, 같은 대충 아무거나 갖다 붙인 의미라도. 그러다 보니 고기를 먹는다는 건 출출한데 라면이라도 끓일까? 하는 것과는 달랐다. 대충 먹는 게 아닌 갖춰 먹는 느낌이었다. 사실 그 자체로 라면보다 비싸기도 하니까.


   평상시 아무런 일도 없는 심심한 날, 마치 라면을 끓이는 것처럼 출출한데 고기나 먹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고기를 먹는 게 흔한 일상인 것처럼 고기를 먹고 싶었다. 고기는 생고기지, 냉동은 맛없어, 하며 평소엔 눈길도 안 주던 마트 냉동고 안, 대용량 팩으로 포장된 미국산 차돌박이를 손에 들고선 이거라면 고기를 라면처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둘이 한 끼니씩 먹을 분량으로 소분해 냉동실에 넣어 두면 아무 때라도 마음이 동할 때마다 꺼내서 구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고기가 일상이고 일상이 고기인 나날이 펼쳐지지 않을까.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그냥 고기나 구울까.

   그날이 왔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날. 비 오는데 별 다른 약속이 없으니 다행인가 싶다가도 비 때문에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답답한 날.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냉장고 속 익숙한 반찬들에는 왠지 손이 안 가고, 그렇다고 특별한 음식을 만들기에는 귀찮은 날. 라면이나 끓여 먹으면 딱 좋은 날.

   “오늘은 그냥 고기나 구울까?”


차돌박이의 빛깔이 곱다.

   소분해 둔 차돌박이를 냉동실에서 꺼내 아무렇게나 툭 던져 놓는다. 씻은 상추는 채반에 두고 물기를 뺀다. 아내는 함께 먹을 반찬을 접시에 덜고, 얼려둔 밥을 전자레인지에 넣어 데운다. 프라이팬에 고기를 얹어 놓고 보니 차돌박이의 빛깔이 곱다. 가지런한 상추와 빛깔 좋은 차돌박이. 이때까지만 해도 평온했다. 고기가 일상인 어느 은퇴부부의 평온한 저녁 준비였다.


기름이 튄다!!

   치이이익, 고기가 익으면서 퍼지는 듣기 좋은 소리에 들뜬 기분도 잠시, 몇 점 되지도 않는 차돌박이에서 기름이 유전처럼 뿜어져 나온다. 기름이 온 사방으로 튄다. 뜨거운 기름 방울이 프라이팬을 잡은 손을 넘어 얼굴까지 공격한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선다. 고기가 타기 전에 재빨리 뒤집어야 하는데 끓어오르는 기름 탓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찌해야 하나. 머릿속이 기름 낀 두툼한 배처럼 둔해진다. 아내의 눈빛은 우왕좌왕 갈 곳을 잃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기름은 미쳐 날뛴다. 차돌박기 속에 꽁꽁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굳어 지내던 지난날의 한풀이를 하는 듯하다. 아내가 키친타월 몇 겹을 허겁지겁 뜯어내 프라이팬 위에 던져 넣는다. 그제야 미쳐 날뛰던 차돌박이 기름이 키친타월의 품 안에서 잠잠해진다.


완성.

   식탁은 평온해 보이지만 상처로 가득하다. 저녁상을 위해 차돌박이 기름과의 전쟁을 몇 번 더 치렀고 부엌은 쑥대밭이 되었다. 고기가 일상인 날들을 바랐던 건 욕심이었나. 일상이 고기인 날들을 쟁취하려면 부엌의 희생 정도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차돌박이는 담백하고 고소했다. 부엌 곳곳에 튄 기름을 닦아 내고 부엌에 밴 기분 나쁜 고기 냄새를 없애느라 고생하기는 했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저녁 산책은 물 건너갔다. 하긴 차돌박이 기름과 전쟁을 치르느라 이미 지쳐버렸으니 날이 좋았더라도 산책을 가지는 않았으려나. 아내 역시 진이 빠진 표정으로 말이 없다. 지치긴 했어도 우리는 열심히 싸웠고 끝내 고기를 먹었다. 그러니 아내의 알콩달콩 호르몬이 이 또한 좋은 기억으로 바꿔 줄 것이다. 몇 년쯤 지나 오늘을 이야기할 때 기억나지? 차돌박이 기름이 유전처럼 뿜어져 나왔던 때 말이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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