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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un 30. 2022

우리의 식탐은 강하다.

튀르키예(터키의 국호가 튀르키예로 바뀌었다. 터키인 에미르한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에서 돌아온 지 열흘이 지났다. 바쁜 열흘이었다. 97일간 한국을 떠나 있었으니, 양가 가족들을 찾아가 무사히 살아 돌아왔음을 확인시켜 드려야 했고, 계속 무사히 살 수 있도록 냉장고를 채워야 했고, 몇 안 되는 인간관계에 별일 없도록 친구들도 만나야 했다. 거기에 다시 일상을 살겠다며 아침마다 5km 둘레의 호수를 시계방향으로 달렸고, 저녁엔 반시계 방향으로 산책을 나섰다. 몸이 무겁고 쉽게 지치긴 했는데, 곧 괜찮아지겠거니 했다. 멀티비타민과 밀크시슬도 매일 아침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으니까.


열흘이 지났는데도 피로가 몸에 덕지덕지 남아있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시차적응이 늦어지는 건가 싶었다. 새벽 3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을 넘게 날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밤샘(비행기의 좁은 의자에서는 잠을 거의 못 잔다)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에 온 지 열흘이나 지났는데, 바쁘긴 했지만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그 열흘 동안 100일 가까이 구경도 못하던 김치찌개도, 떡볶이도, 짬뽕도 먹으며 한국의 매운 기운을 채웠는데, 피로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기력을 회복시켜 줄 뭔가를 먹어야 했다.


아내는 한동안 손을 놓았던 글을 쓰겠다며 아이패드를 열었다.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타지에서 석 달이 넘는 시간을 보내다 이제 막 왔으니 글감은 넘치겠지. 평균 연령이 30대 초반인 튀르키예의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일지, 튀르키예에서 먹었던 다양한 음식에 관한 이야기일지, 아니면 일주일에 한 번 작정한 듯 흥분하며 날뛰던 그들의 페네르바체 축구클럽에 대한 이야기일지.


경쾌한 자판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끊어짐이 잦아들더니 어느새 멈췄다. 글을 쓰겠다고 말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유튜브로 넘어가는 게 민망했는지, 아내는 나에게 들리도록, 실제로 들으라는 듯이 크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하지만 단순히 혼잣말인 것처럼 '잘 안 써진다.'라고 창밖을 보며 한마디 하고는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요 며칠 글만 쓰려면 집중이 안된다고 했었다. 머릿속에 생각은 많은데 문장으로 빠져나오지 않는다고 했었다. 피로가 남아있기는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기력을 회복시켜 줄 뭔가를 먹여야 했다.




기력 회복에는 역시 삼계탕이다. 그런데 내가 만들 수 있으려나. 마음을 단단히 먹고 요리책을 꺼냈다. 72페이지. '원기 보충 음식 삼계탕'. 원하던 제목이다. 조리과정은 6단계였다. 그중 다섯 단계가 준비과정이었다. 찹쌀을 불리고, 닭을 다듬고, 불린 찹쌀을 닭 뱃속에 넣고, 다리를 꼬고, 냄비에 넣는 걸로 다섯 단계가 지나갔다.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도 간단했다. '40분간 끓인다.'였다. 삼계탕이 이렇게 쉬운 요리였던가.


삼계탕 재료가 이렇게 간단한지 몰랐다.

'원기 보충 음식 삼계탕'을 만들기 위해 카트에 담은 건 딱 두 가지였다. 삼계탕 재료와 생닭. 한 끼 식사를 넘어 기력까지 보충해준다는 음식인데, 카트에 담은 게 너무 소박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되나 싶어 괜히 서성이는데 주부 만렙처럼 보이는 50대 아주머니 한분이 생닭을 집어 카트에 담았다. 곁눈질로 슬쩍 아주머니의 카트 안을 들여다보니 생닭 옆으로 우리가 담은 것과 똑같은 삼계탕 재료가 있었다. 안심이 됐다. 그래도 된다.


삼계탕 조리법이 이렇게 간단한지 몰랐다.

삼계탕 재료의 뒷면에도 조리법이 나와있었다. '재료를 40분 이상 끓여 우려낸다. 생닭을 넣고 1시간 정도 더 끓인다.' 역시나 심플했다. 아니, 이게 라면도 아니고. 괜히 반항을 한다. 50분을 우리고, 1시간 10분을 더 끓이기로 마음먹는다.


끓는 물에 재료를 우려내는 동안 생닭을 손질한다. 날개 끝 부분을 잘라내고 지방을 제거하고 깨끗이 씻는다. 닭 뱃속에 찹쌀은 안 넣기로 했으니 생닭을 과감히 반으로 가른다. 50분 알람이 울리면, 손질한 생닭과 마늘을 냄비에 집어넣고 알람을 1시간 10분으로 다시 맞춘다.


완성.

원기 보충 음식을 만드느라 원기를 빼지 말라는 삼계탕의 조리법이 은혜롭다. 별다른 수고 없이 '원기 보충 음식 삼계탕'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몸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다. 몸에 붙은 피로 중 몇 개는 떨어낸 듯하다. 아내도 아침을 먹고는 바로 자판을 두드린다. 소리가 경쾌하다. 하지만 자판 소리는 길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나 역시 읽으려던 책을 몇 장 넘기지 못하고 덮는다. 둘 다 다시 늘어진다. 보양식 한 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피로는 강하다.


피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질 테고, 점점 아침에 눈 뜨기가 수월해질 테고, 아내의 자판소리가 길게 이어질 테다.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나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식탐은 강하다. 낙지든, 장어든,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일단은 잘 먹기. 잘 먹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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