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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Apr 19. 2022

피르졸라. 그럼 OK.

숙소에 들어온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샤워실의 물이 빠지지 않았다. 머리에 샴푸 거품이 묻은 상태로 샤워기 물을 잠가야 했다. 바닥에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물이 미처 빠지지 못한 채 고여있었다. 조금씩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을 틀고, 다시 잠그고. 결국 머리의 거품만 간신히 씻어내고 샤워를 마쳐야 했다. 깨끗한 주방, 넉넉한 그릇과 컵, 조리도구, 큼직한 테이블, 넓은 테라스, 그 너머로 보이는 눈부신 에게해. 저렴한 가격으로 꽤나 괜찮은 숙소를 골랐다는 서로의 안목을 칭찬하며 한껏 좋았던 기분에 살짝 생채기가 났다.


에미르한(airbnb 집주인이다.)에게 문자를 보냈다.

'너네 집 욕실 물이 잘 안 빠진다. 어떻게 해야 해?'

'아. 미안. 마트에 뚫어뻥 팔아. 그걸로 일주일에 한 번씩만 뚫어. 그럼 OK.'

마트에 판다는 제품 사진과 함께 그럼 OK.라는 답 문자가 왔다. 사람이라도 보내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에미르한은 쿨했다. 터키 스타일인 건가. 그래, 여긴 터키니까. 따르지 뭐.


마트를 둘러보니 에미르한이 사진으로 보내주었던 제품이 보였다. 가격은 4리라였다. 300원이 조금 넘는 돈. 그래, 여행은 또 이런 맛도 있는 거지. 남의 집 욕실도 한번 뚫어보고 그러는 거지. 가격 때문인지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한국에 수입하고 싶은 터키의 뚫어뻥.

구글 번역기로 사용법을 읽어보니, 흰 가루를 막힌 개수구에 털어 넣고, 끓는 물 3리터를 들이붓기만 하면 된단다. 간단했다. 사용법보다 시선을 끌었던 것은 주의사항이었다. 위험해. 조심해. 꼭 장갑 끼고 해. 내가 좀 강력해. 이런 허세가 마음에 들었다. 하얀 가루를 털어 넣고 끓는 물을 들이부었다. 곧바로 안에서 무슨 일이 크게 벌어지고 있다는 듯 부글부글 소리가 났다. 점점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개수구로 마치 화산이라도 폭발하듯 뜨거운 물이 뿜어져 나왔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부글부글 소리가 멈추자 고여있던 3리터의 끓는 물이 순식간에 개수구로 빠져나갔다. OK.


며칠이 지나고 아침식사 후 설거지를 하는데, 물줄기가 점점 약해지는가 싶더니 결국 물이 멎었다. 싱크대뿐만 아니라 화장실의 수도꼭지에서도 물은 나오지 않았다. 손에 묻은 거품을 생수로 대충 씻어내고 에미르한을 찾았다.

'너네 집 물이 안 나온다. 어떻게 해야 해?'

'아. 미안. 가끔 그래. 몇 시간만 기다려봐. 그럼 OK.'

또 OK. 란다. 서로 수도꼭지가 되어 생수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으면서, 아내는 물의 소중함이 느껴지지 않아? 하며 여행지에서의 돌발변수를 즐겼다. 아니 그러니까. 물의 소중함은 좋은데, 그걸 굳이 여행지에서 느낄 필요는 없지 않나.


이번 여행의 일정은 95일, 터키의 작은 항구도시인 보드룸에서 40일, 이스탄불에서 40일을 보내고, 그리스 아테네로 넘어가 15일을 지내기로 했다. 아내는 그리스로 넘어가기 전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겠다고 했다.  

 '그리스가 터키의 지배를 받던 시기이니 터키에 대한 묘사는 안 좋겠지?'

<그리스인 조르바>를 어릴 때 읽어보긴 했지만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터키에 대한 묘사가 좋을 리 없다는 건 충분히 예상이 됐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도, 그리스, 로마를 다룬 어떤 책에서도 이슬람 세력은 늘 악역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뛰어넘는 소설을 네가 한번 써 보는 건 어때? 터키인 에미르한.'

아내는 제목이 마음에 든다면서 바로 작문을 시작했다.

'에미르한은 산처럼 거대한 덩치와는 달리 귀티가 흐르는 사내였다.'

'그는 자기 집을 내어주는 숙박업을 하며 부를 모았다.'

'우리에게 집을 내어준 그는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욕조가 막히거나, 물이 안 나오는 것 정도는 OK. 한마디로 넘길 만큼 쿨했다.'

'.....'

'음. 더 쓸게 없다.'




소설로는 쓸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는 터키인 에미르한은 우리에게 열 군데 남짓 추천 식당 리스트를 보내주었다. 리스트에는 터키에 오면 잔뜩 먹자며 벼르던, 피르졸라를 파는 식당도 한 군데 있었다. 귀티가 흐르는 터키인 에미르한의 취향은 고급졌다. 추천한 식당들의 가격이 너무 비쌌다. 비싼 식당에서도 피르졸라는 단연 가장 비싼 메뉴였다. 그러다 마트에 장 보러 갈 때마다 정육코너에 있던 피르졸라가 떠올랐다. 비슷하겠지. 까짓 거 직접 굽자.


1인분도 안되어 보이는 피르졸라. 238g, 3,400원어치.

피르졸라가 가득 놓여 있는 정육코너 앞에서 4조각을 사야 할지, 6조각을 사야 할지 고민을 했다. 양 가늠이 어려웠다. 한국 마트처럼 미리 적당량으로 포장을 해서 팔면 좋을 텐데.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큰 걸로 4조각'을 요구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정육점 아저씨가 나름 커 보이는 4조각을 골라 포장을 하고 가격표를 붙이고 enjoy!라는 말과 함께 건네주었다. 포장된 피르졸라는 생각보다 너무 가벼웠다. 가격표에 붙은 무게를 보니 238g. 아 어쩌나. 둘이 삼겹살도 소고기도 500g은 먹는데 그 절반도 안 되는 양이라니. 그것마저도 뼈가 포함된 무게였다. 조금 더 살까 하다가 '양이 너무 적어서 그러는데. 두 조각만 더 줄래?' 하면 괜히 없어 보일까 봐 그냥 돌아섰다. 이런 쪽으로 은근히 소심하다.


피르졸라의 든든한 지원군들. 빵, 샥슈카, 오이, 토마토.

부족한 양은 아침 식재료를 꺼내 채우기로 했다. 아인콘밀로 만든 천연발효빵(일반 에크맥보다 5배나 비싸다!)과 빵에 얹어먹을 샥슈카, 그리고 오이와 토마토를 꺼내 양 조절을 한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한 마디 한다.

'다음번엔 8조각 사.'

6조각은 사야 하지 않을까.라는 아내의 말을 뿌리치고 아냐. 4조각이면 될 것 같아.라고 했던 게 나다. 음식의 소중함이 느껴지지 않아? 따위의 농담은 참아야 한다. 지금 분위기에서는 토를 달면 안 된다.

'응. 8조각.'


사자의 젖과 양의 갈비.

라크는 터키의 국민주라고 불리는 술이다. 알코올이 45도여서 보통은 물에 희석시켜서 마신다. 라크가 물을 만나면 우유처럼 하얀색으로 변하는데, 그래서 사자의 젖이라는 애칭이 있다. 저녁 산책 때 주변 식당을 구경하면 거의 모든 테이블 위에 라크 한 병씩 놓여 있다. 독특한 향이 있어서 적응이 필요하다. 마트에서 미리 사놓은 라크를 피르졸라에 곁들인다.


완성.

소금으로 밑간을 하고 녹인 버터와 함께 구운 피르졸라는 한국에서 비싸게 먹던 양갈비의 맛과 비슷했다. 안심처럼 부드러웠고, 걱정했던 잡냄새도 없었다. 양고기는 잡내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식당에서 피르졸라가 비싼 이유가 잡내를 없애는 어떤 작업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다른 스테이크의 가격이 그런 것처럼 그냥 비싼 거였다. 고급진 취향의 터키인 에미르한이 추천하는 식당의 피르졸라맛이 궁금하긴 한데,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만족이다. 한 사람당 겨우 두 조각이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내는 남은 라크잔을 비우는 걸로 저녁을 마치고 배를 두드린다.

'뭐 그런대로 배 부르네.'

다행이다. 적당히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다. 아침 식재료가 축나긴 했지만 그건 내일 걱정하면 된다. 내일 걱정을 지금 할 필요는 없다. 이런 쪽으로는 은근히 쿨하다. 오늘 저녁도 그럼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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