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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an 11. 2021

소금이 부리는 마법. 콩나물국

결혼은 2015년 겨울이었고, 신혼여행지는 노르웨이였다. 추운 겨울을 싫어하면서도, 신혼여행지로 한국보다 더 추운 북쪽의 나라, 더군다나 한낮에도 해를 볼 수 없는 극야의 나라를 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곳에서는 늘 동경하던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것.


노르웨이의 수도인 오슬로에서 비행기를 타고 북쪽으로 2시간을 더 가면, 트롬쇠에 도착한다. 오로라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까지 이름도 몰랐을, 인구 7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인 트롬쇠는 북위 69도, 북극권에 위치해 있다. 한 겨울, 트롬쇠는 어둠뿐이다. 낮에도 해를 볼 수가 없다. 해가 없더라도 낮은 낮이어서 밤처럼 까맣지는 않다. 한낮 동안은 초저녁의 어스름함 정도가 이어진다. 오로라는 저녁 8시 정도가 넘어서야 볼 수 있다.


저녁에 있을 오로라 헌팅을 기다리며 작은 도시를 구경했다. 어두컴컴한 하늘, 길가를 비추는 가로등, 창문으로 오렌지색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들이 이어져 있다. 몇 미터 간격으로 등이 켜져 있지만, 어둑하기만 한 학교 운동장은 아이들로 시끄러웠다. 낮 2시의 모습이다.


큰길이 만나는 사거리 모퉁이에 동네 마트가 보였다. 특별히 살 것도 없으면서 들어간다. 마트는 그 나라의 다양한 식재료를 볼 수 있다. 이름도 모르는, 처음 보는 채소와 과일들이 가득하다. 어떤 음식에 필요한 건지 상상도 안 되는 각종 소스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와. 소고기 진짜 싸다.’

정육코너에서는, 한국 고깃값과 굳이 의미도 없는 가격비교도 해본다. 그나마 순록 고기가 있다는 것 외에는 한국의 정육코너와 비슷했다.


그 마트에서 그라인더 용기에 담겨있는 소금과 후추를 샀다. 신혼여행 기념품이라고 하면서 신이 났었다. 얼마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별로 비싸지 않은 가격이었다. 그땐 왜 그랬을까. 왜 하필 많고 많은 신혼여행 기념품들 중에 소금과 후추가 사고 싶었을까.

‘유통기한이 2020년까지네.’

그 와중에 꼼꼼하게도 유통기한까지 확인했다.

‘5년 동안 다 먹을까?’

다 먹지 못한 채 유통기한을 넘기는 건 아닌지 걱정도 했다.


신혼여행 기념품인 소금과 후추. 5년에 걸쳐 먹었다. 촛점 잃은 마그넷, 그리고 뒤에 판화도 신혼여행 기념품이다.

노르웨이 트롬쇠의 한적한 동네 마트에서 신혼여행 기념품으로 사 온 소금과 후추는, 5년이 지나 유통기한을 두 달 정도 남긴 2020년 가을 즈음에, 며칠 차이를 두지 않고 둘 다 바닥을 보였다.  




연애시절, 출근 걱정이 없는 날 밤에는 늘 취했다. 안주가 맛있어서, 어떨 땐 나누던 이야기에 빠져들어서, 가끔은 섭섭했던 무언가 있어서. 취할 이유는 다양했고, 아무거나 골라 잡기만 하면 됐다. 어쩌면 함께 취하고 싶어서 이유를 대충 갖다 붙인 것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주말 아침이면 어김없이 해장이 필요했다. 집 근처의 콩나물국밥집은 자주 가던 술집만큼이나 단골이 되었다.


해장국을 직접 끓여볼까 하는 생각이 든 건, 주말 아침마다 술이 덜 깬 채 찾아와 콩나물국밥을 시키는 우리를, 국밥집에서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할 때였다. 괜히 민망했다.

‘해장국. 그냥 내가 끓여줄게.’

만만한 건 콩나물국이었다. 북엇국도 떠올랐지만, 생선을 싫어하는 아내의 식성을 뒤엎으면서 맛을 낼 자신이 없었다. 술이 아직 덜 깬 아침, 레시피에 나와있는 대로 콩나물국을 끓였다. 멸치, 다시마로 육수를 내고, 국간장과 간 마늘을 넣었다. 콩나물이 익는다는 5분이 지나고, 마지막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일만 남았다.


내가 끓이는 첫 번째 국이자, 아내에게 내어주는 첫 번째 국이었다. 레시피에 나온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로 콩나물국의 맛이 나올지 긴장이 되었다. 티스푼으로 국물 맛을 봤다. 이도 저도 아닌 밍밍한 맛이었다.

‘콩나물의 맛이 우러나오지 않은 건가? 더 끓여야 하나? 5분이면 된다고 했는데.’

혼란스러웠다. 빠진 재료가 있는지 살펴봤지만, 준비한 재료는 모두 냄비 안에서 끓고 있었다. 아내는 옆에서 자신에게 물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소금을 조금 더 넣고 다시 맛을 봤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콩나물국의 맛이 스쳤다.

‘소금인 건가? 조금 더 넣으면 되나?’

소심하게 조금씩 소금을 넣고 계속해서 간을 봤다. 아무 맛없이 싱겁기만 하던 국물이 마법처럼 살아나기 시작했다. 소금이 들어갈 때마다 콩나물국으로 점차 선명해졌다. 소금이 부리는 마법이었다.


만드는 음식이 늘어나면서 소금의 역할은 단순히 짠맛을 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소금은 각각의 식재료가 품고 있는 본연의 맛을 폭발시킨다. 얌전하게 숨어있던 식재료들은 소금을 만나면서야 비로소 제 맛을 뽐낸다. 그즈음 내가 느낀 소금의 놀라움을 아내에게 몇 번 이야기했었고, 신혼여행으로 간 낮 2시의 트롬쇠, 어둑한 사거리 동네 마트에서 신혼여행 기념품으로 소금을 샀던 건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 공식 해장국은 콩나물국이다. 다만 냉장고 안에 미리 사놓은 콩나물이 있어야 한다는 제약사항이 있어서, 만든 횟수로는 떡만둣국이나 라면에 밀린다. 하지만, 은퇴를 한 이후의 횟수만 따진다면 거의 대등하다. 그나저나 해장국 먹을 일을 이제는 좀 줄여야 할 텐데. 은퇴를 하고 집밥을 자주 먹게 되면서 유통기한이 길지 않은 재료를 사놓는데 부담이 없다. 콩나물도 떨어졌다 싶으면 잊지 않고 사다 놓는다.


콩나물의 유통기한을 보고 혹시나 불편하실 분들 계신다. 미리 찍어놓은, 즉 콩나물국은 2020년 12월 3일 이전에 만들어 먹었다는걸 밝힌다.

콩나물 한 봉지는 둘이서 한 끼니 해결하는 콩나물국을 만들기엔 양이 많다. 은퇴하기 전 마트에 갈 때 콩나물에 손이 잘 안 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은 절반은 콩나물국을 만들고 남은 절반은 무침으로 반찬을 만들거나, 콩나물밥을 만들어 양념장과 함께 먹는다.


멸치, 다시마로 육수를 내고 나머지 재료를 넣는다.

다시마와 멸치로 육수를 만든다. 다시마와 멸치는 장모님이 손수 다듬어 비닐에 한 가득 주신 걸 쓰고 있다. 간 마늘과 다듬은 매운 고추도 장모님이 주신걸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요리에 사용한다. 직접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드셨다는 매실액은 냉장고 안에서 등판할 날을 기다리며 준비 중이다. 음식 만드는 일이 내 담당이라는 걸 아시는 장모님은 늘 요리의 기본이 되는 재료를 챙겨 주신다. 엄마는 다르시다.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엄마는 반찬을 만들어 보관용기에 담아주신다. 꺼내 먹기만 하면 된다. 장모님과 엄마의 마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콩나물을 넣고 끓인다. 뚜껑을 닫지 않으면 콩나물 비린내가 난다고 하는데, 내가 둔한 건지 그 비린내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끓인다.



파 듬뿍. 고춧가루 조금. 이제부터 소금의 마법이 시작된다..

콩나물 국에 고춧가루를 조금 넣는다. 잠시 후, 거품 위로 떠오르는 고춧가루를 다시 망으로 걷어낸다. 망에는 고춧가루와 간 마늘이 함께 걷어진다. 번거롭지만, 고춧가루와 간 마늘을 걷어내면 국물이 맑아진다. 고춧가루는 넣는 건 빨간색을 위해서다. 콩나물국은 어릴 때 먹던 것처럼 빨간색이어야 할 것만 같다. 색을 내기 위함일 뿐이니, 많이 넣지는 않는다.


소금의 마법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유명하다는 한식 요리사의 눈을 가리고, 소금을 넣지 않은 상태의 콩나물국을 맛보게 한다면, 과연 그게 콩나물국인지를 알까? 궁금하다. 난 모를 거다에 한표 던지겠다. 재료의 맛을 여는 키는 소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성. 국물부터 후루룩 마신다.

마트에는 그 용도를 다 알지 못하는, 그래서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은 조미료들이 가득하다. 그 옆을 지나갈 때마다 궁금증이 생긴다.

‘이런 건 다 어디에 쓰는 걸까.’

그 많은 조미료들은 제각각 어떤 맛을 담당할까. 언제쯤 내 맘대로 써볼 수 있을까.


이제 겨우 소금을 다룰 뿐이다. 소금에 익숙해지기까지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재료가 품고 있는 맛과 그 어우러짐을 돕는 조미료의 세계가 흥미롭다. 하지만 요리책에는 잘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어쩔 수 없다. 직접 부딪혀서 알아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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