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Jan 19. 2021

1년 중 막국수가 가장 맛있을 때.

막국수를 먹으러 간다.


몇 층인지 세어지지도 않는 높은 아파트가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 큰길을 벗어나면, 겨울의 회색 산이 야트막하게 보인다. 분명 그깟 아파트보다는 훨씬 높을 텐데, 겹겹의 산들은 저만큼 멀리 보여 크기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몇 분을 더 달려 산의 자락으로 들어서면, 산의 높이가 헤아려지기도 전에 빽빽한 나무들이 산봉우리가 늘어선 능선을 가린다. 아파트 사이로 넓게 곧았던 길이 산자락을 따라 굽이치기 시작하면, 찾아가려는 막국수집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다.


거의 말라붙어 제 할 일을 잃은 계곡을 옆에 끼고 일방통행길만큼이나 좁은 길을 오른다.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차와 만나면,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차를 반대편 길가 쪽으로 붙일 수 있는 만큼 붙이고, 행여라도 닿을까 조심스럽게 옆으로 차를 지나 보낸다. 초입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식당들의 간격이 길을 오를수록 점차 벌어진다. 이렇게 외진 곳에 식당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목적지인 막국수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기와지붕을 얹은 아담한 막국수집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오늘도 역시나 대기표를 뽑아야 한다. 주말도 아닌 평일, 점심때는 한참 지났고, 저녁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인 오후 4시. 하지만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준비한 재료가 다 떨어져 평소보다 식당 문을 일찍 닫아,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는 걸 생각하면, 30분 정도의 대기에 딱히 불만은 없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기다리다 보면 식당 안쪽에서 우리가 뽑은 번호를 부른다.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고 벽에 걸려있는 메뉴판을 유심히 보지만, 이곳에서 시키는 건 늘 같다.

‘여기 물 막국수랑 들기름 막국수 주시고요. 수육도 작은 거 하나 주세요.’


밖에서 30분을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하다는 듯 음식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나온다. 동그랗게 말려서 놓인 메밀면 위로 얇게 저민 무가 서너 개 올려져 있고, 맑은 육수가 그릇 가득 채워져 있다. 물 막국수다. 육수를 먼저 들이킨다. 과하지 않은 맛이 마치 평양냉면의 육수와 비슷하다. 슴슴한 육수는 메밀의 맛을 방해하지 않는다.


물 막국수 맛을 잊지 못해 이 집을 자주 찾았는데, 요즘 들어선 들기름 막국수 때문에 이 집에 온다. 물 막국수가 슴슴함으로 메밀의 맛을 끌어낸다면, 김가루가 소복이 뿌려져 온통 검은색인 들기름 막국수는 고소함으로 메밀의 맛을 북돋는다. 국수를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면 고소한 들기름 향이 퍼진다. 한입 물자마자 아내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아. 행복해.’




인터넷 쇼핑으로 들기름을 주문했던 건 두부김치를 위해서였다. 김치를 볶을 땐 당연한 듯 식용유를 썼었는데, 우연히 본 다른 작가님의 요리 글에선 식용유가 없었다. 그분은 들기름을 또르르 두르고 김치를 볶으셨다.

‘아. 들기름이었구나!’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어쩐지 내가 한 볶음김치는 늘 아쉽더라니. 김치가 맛이 안 들어서 그런 거라고 애꿎은 김치 탓만 했었다. 어리석었다. 돌이켜보니 엄마가 해주셨던 볶음김치에서도 들기름 향이 낫던 것 같다.


들기름이 집으로 도착한 날, 포장을 뜯으며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다루는 식재료가 또 하나 늘었다. 필요를 깨달아 하나씩 늘려가는 식재료는 즐거움을 준다. 맛술이 그랬고, 멸치액젓이 그랬다.


들기름은 준비가 됐는데 볶을 김치가 없었다. 마지막 남았던 묵은지로 얼마 전 김치찌개를 했고, 집에 있는 건 아직 충분히 익지 않은 김치뿐이었다. 뚜껑을 열어 들기름 향은 이미 퍼져 나왔고, 그 향을 맡은 이상 뭐라도 만들어야 했다. 김치가 익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들기름 막국수를 한번 만들어 볼까?’  


벌써 세번째 하는 들기름 막국수이다.

사고 나서야 메밀 함량이 30%인 걸 봤다. 밀가루가 많이 들어간 면은 역시나 쫄깃하고 탱글한 느낌이 난다. 다음엔 메밀 함량이 더 높은 걸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툭툭 끊어지기도 하고, 까슬한 느낌도 나야 메밀면답다.


쯔유는 냉메밀을 해 먹겠다며 사놓고 뜯지도 않은 채 유통기한이 이미 1년이 지나 있었다. 간장이니 괜찮겠지.


차르르 면을 휘둘러 멋을 부리고 싶었지만.

물이 끓고 있는 냄비에, 요리프로의 셰프처럼 빈틈없이 둥그렇게 면을 휘두르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 겉멋부터 들면 안 된다. 차분히 면을 넣고, 끓어 넘치지 않도록 옆에서 계속 지켜본다. 면을 삶는 시간은 4분 30초. 타이머의 알람이 울리면, 찬물에 식히고 채에 받쳐 놓아 물기를 뺀다.


깨를 가는 것 정도는 아내에게 맡긴다.

숟가락 두 개를 겹쳐 그 사이에 깨를 넣고, 끙끙대며 깨를 가는 모습을 아내가 보더니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절구 하나 사야 하는 거 아냐?’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어쩐지 깨를 갈면서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니. 충분히 크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애꿎은 숟가락 탓만 했다. 어리석었다. 당장 작은 절구를 샀다. 내가 다루는 조리도구가 또 하나 늘었다. 필요를 깨달아 하나씩 늘려가는 조리도구는 즐거움을 준다. 스테인리스 팬이 그랬고, 무쇠솥이 그랬다.


요즘 들어서 아내가 나의 부엌을 자주 기웃거린다. 내가 쓰는 글에서 먹기만 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도 비치고 싶어 한다. 뭐라도 하나 던져 주어야 한다.

‘깨 좀 갈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른 깨가 담긴 절구를 받아간다. 신이 난 듯 콧노래를 부르며 깨를 갈다가 기어이 다짐을 받아낸다.

‘깨는 내가 갈았다고 쓸 거지?’


들기름과 쯔유를 넣고 조물조물. 김가루을 뿌리고 아내가 갈은 깨를 얹고.

처음 만들었을 때에 비해 들기름은 더 많이 넣고, 쯔유의 양은 줄었다. 김가루는 과한 듯해서 점차 적어졌고, 깨는 듬뿍 넣어도 괜찮았다. 만들 때마다 각각의 재료의 비율은 조금씩 달라지고, 먼길 찾아가는 막국수집의 행복한 맛에 차츰 가까워진다.


완성. 동치미 하나면 충분하다.

마침 엄마가 보내주신 동치미가 있다. 아들이 막국수를 해 먹을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는지. 메밀의 맛을 거스를 강한 맛의 다른 반찬은 꺼내지 않는다. 막국수를 즐기기에는 동치미 하나면 충분하다.


메밀막국수는 눈 쌓인 겨울이 제철이다. 늦가을에 거둔 햇메밀로 바로 면을 만들어, 향이 빠져나가지 못한 채 가득 갇혀있다. 1년 중 막국수가 가장 맛있을 때이다. 조만간 아파트 숲을 벗어나 계곡을 따라 좁은 길을 한참 올라, 이만큼이나 외진 곳에 있는 식당이라면 당연히 맛집일 수밖에 없겠다고 믿음을 주는 그 막국수 집을 다시 찾으려 한다. 막국수가 제철이어서도 그렇지만,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어때? 잘 비교해봐. 내가 만든 건 뭐가 부족한 것 같아?’

직접 만드는 들기름 막국수의 맛을 한층 더 끌어올리기 위해서.




 

이전 07화 소금이 부리는 마법. 콩나물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