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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an 05. 2021

오므라이스라고 우겨본다.


내가 사는 지역은 5일마다 장이 선다. 5일장이다. 장이 서는 곳은 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장 볼 목적으로 가기엔 꽤 먼 곳이지만, 마트에서는 볼 수 없는 갖가지 구경거리와 먹을거리가 있어, 가는 고생이 아깝지 않다. 5일장은 역사만큼이나 규모가 있다. 하천을 끼고 길게 늘어선 노점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진귀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곳은 평생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는 물건들과 식재료들로 넘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잠시라도 붙잡으려는 상인들의 목소리와 조금이라도 값을 깎으려는 사람들의 흥정하는 목소리가 한데 섞인다. 사람 사는 곳이다.


‘쾅쾅쾅 쾅’
무언가를 빠르게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곳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그 사이로 목청 좋은 아저씨의 외침이 들렸다.

‘이거 하나면 여러분이 전부 요리사여.’

요리사? 관심이 간다.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야채 다지기였다. 커다란 도마 한쪽 편에 다져지기를 기다리는 마늘, 피망, 당근, 양파 등이 쌓여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색색이 곱게 이미 다져진 야채들이 수북했다. 사람들이 흥미를 잃을세라 아저씨는 연신 다지기를 힘껏 누르며 외쳤다.

‘요리가 이렇게 쉬워요. 그냥 쾅쾅 누르기만 하면 된다니까.’

몇 번 반복해서 다지기를 힘차게 누르는 것만으로 마법처럼 순식간에 야채가 다져졌다. 모양도 색깔도 곱다. 신세계다. 한참을 넋을 잃고 쳐다보는 나를 아내가 깨웠다.

‘하나 사려고?’

부엌칼로 야채를 다지는 건 요리 초보자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다져진 야채의 크기도 제각각이고 덩어리가 커서 엉성하다. 그런데 저것만 있으면 내 요리에 곱게 다져진 야채를 넣을 수 있다. 혹했다. 하지만 마음속 욕망을 애써 붙잡아 진정시킨다.

‘아니야. 저런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파를 썰어 냉동실에 얼려 두기로 한다. 미리 사놓았던 파를 물로 깨끗이 씻고, 키친타월로 물기를 닦아낸다. 물기를 제거한 파를 도마 위에 가지런히 놓고, 칼을 잡는다.

‘탁.’
파를 잡은 왼손을 썰어낼 두께만큼 조금 움직인다. 그러고는 다시 파를 단단히 움켜쥔다. 시선을 오른손으로 옮긴다. 오른손에 잡은 칼날을 파를 썰 위치에 둔다. 숨을 멈춘다. 정신을 집중해 오른손에 힘을 준다.
‘탁.’

다시 파를 잡은 왼손을, 그리고 움켜쥐고, 그리고 시선을, 그리고 오른손의 칼날을, 그리고 숨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해서.

‘탁.’

다시 왼손을, 시선을, 오른손의 칼날을.

‘탁.’

한없이 느리다. 목표로 잡은 첫 단계는 초침 소리 정도의 빠르기인데, 아직 갈길이 멀다. 하지만 조급하면 안 된다. 무리하게 속도를 올리려 하다간 파와 손가락을 함께 썰지도 모른다.


요리의 기본은 칼을 다루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오는 내로라하는 셰프들 중에 누구보다 오세득 세프를 좋아했다. 그는 유행 지난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기려 하는 게 조금 흠이지만, 칼을 잡았을 때만큼은 진지했다.

‘타 다다다.’

칼을 잡은 손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고, 거침이 없다.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는 경쾌하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식재료들은 가지런하고 얌전하게 다듬어진다. 칼을 다루는 솜씨만으로는 그가 무림의 최고수였다. 나도 그처럼 칼을 다루고 싶었다.

 

5일장에서 본 야채 다지기의 유혹은 강했다. 그것만 있으면, 노력이 없이도 단번에 무림의 고수가 될 것만 같았다. 음식을 준비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냉장고를 부탁해>의 셰프들처럼 15분이면 충분하겠지. 다만 재료를 다듬는 소리가 ‘타 다다다’가 아니라 ‘쾅쾅쾅 쾅’ 이겠지만.


야채 다지기는 결국 사지 않았다. 생각처럼 빨리 늘지 않는 칼 솜씨에 살짝 불안했었고, 사기 아이템을 보고선 잠시 초심이 흔들렸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쾅쾅쾅 쾅’은 처음 생각하던 부엌에서의 내 모습이 아니다. 초심을 잃으면 안 된다. 요리의 기본은 칼이다. 꾸준히 시간을 쌓다 보면, 언젠간 나의 부엌에서도 ‘타 다다다’ 하는 칼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지 않을까.




사진으로 찍기 민망할 만큼 부실하다. 라면도 이보다는 재료가 많았다.

볶음밥은 의외로 생각만큼 간단한 음식이 아니다. 여러 종류의 야채를 손대야 한다. 크기와 질감이 제각각인 야채들을, 볶기에 적당한 모양으로 다듬고, 각각을 따로 익혀야 한다. 정성이 필요하다. 물론 칼 쓰는 실력도 필요하다.


이런 볶음밥을 아침에 급히 준비하기에는 아직은 부족한 실력 탓에 부담이 된다. 이럴 때를 위해 마트에서 사놓은 냉동 볶음밥을 꺼낸다. 위에 자존심을 내세운 칼 솜씨 이야기를 잔뜩 해 놓은 게 조금 민망하다. 하지만 아침밥이니까. 라며 변명을 해본다. 냉동 볶음밥 안에 들어간 재료들은 직접 하는 것보다 다양하다. 직접 했다면 크기가 제멋대로인 당근과 양파가 전부였을 거다. 바쁜 아침, 냉동 볶음밥으로 나의 수고를 던다. 세상이 좋아졌다.


달걀을 푼 물을 익힌다. 냉동볶음밥 익히는거야 뭐. 대충.

그냥 냉동 볶음밥만 익혀 내놓기가 미안해 달걀물이라도 풀어 지진다. 고작 달걀 한 개이지만, 막상 다 만들고 보면 그럴듯하다. 나름 정성도 있어 보이고, 냉동 볶음밥이라는 걸 숨기는 역할도 한다. 가성비가 좋다. 귀찮더라도 무조건 한다.


볶음밥을 조심스럽게 얹어 반으로 접는다.

마음에 드는 접시를 준비한다. 접시에 달걀 익힌걸 올리고 볶음밥을 조심스럽게 얹어 반으로 접는다.


깨지지 않는다는, 그리 비싸지 않은 그릇을 오랫동안 썼었다. 그릇의 역할은 음식을 담는 것뿐이라고만 생각했을 때다. 하지만 요리를 자주 하다 보니 요리의 완성은 그릇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바꾸고 싶었지만, 쓰던 그릇들이 너무 멀쩡했다. 깨지지 않는다는 그릇은 아무리 험하게 다루어도, 명성처럼 깨지지 않았다. 바꿀 타이밍이 생기지 않았다. 그릇이 깨지지 않는다는 건 장점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릇 깨기는 포기했다. 쓰던 그릇들을 선반 안쪽, 보이지 않는 곳에 밀어 넣고, 요리의 완성도를 높여줄 새로운 그릇을 샀다.


새로 산 그릇은 이제 3년 정도가 되어간다. 3년이 되다 보니 한동안 안 보이던 그릇 욕심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온다. 남들이 올린 요리 사진을 보더라도, 잘 차려진 음식보다 그릇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은퇴를 했으니 욕심을 버려야 하는데, 자꾸만 새로운 그릇들이 눈에 밟힌다.


완성. 사진에 이쁘게 나오라고 케쳡을 일자로 뿌렸는데, 지금 보니 이상하다.

‘오늘 아침은 오므라이스야.’

말을 해 놓고, 슬쩍 아내의 표정을 살핀다. 조금 뻔뻔한 건 아닌가 하는 마음도 있지만, 오므라이스를 한 거라고 우겨본다. 다행히도 아내는 오므라이스라는 말에 딴지를 걸지 않는다. 이렇게 아침 한 끼가 해결된다.


칼을 자유자재로, 내 몸의 일부처럼 다루는 날이 결국은 올 거라 믿는다. 꾸준히 칼 쓰는 시간을 쌓아가기만 하면 된다. 양파, 당근, 감자, 피망. 야채 다지기를 쓰지 않고도 일정한 크기로, 곱게 다져진 재료들을 듬뿍 넣고 만든 오므라이스를 언젠가는 자신 있게 내놓을 날이 올 거다.

‘타 다다다’

초심만 잃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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