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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Mar 04. 2021

누룽지를 먹으면 떠오르는 것.

제주의 겨울을 싫어했다. 제주에서 살았던 4년. 기억하는 제주의 겨울은 낮게 깔린 무거운 구름과 거센 바람만 가득했다. 하늘은 낮았고, 바람은 거칠었다. 거친 제주의 바닷바람은 해를 덮은 구름을 끊임없이 바다 쪽으로 밀어냈지만, 바람이 밀어낸 자리는 금세 다른 구름이 다시 메웠다. 해는 구름을 뚫지 못했고, 구름은 해를 쉽게 막았다. 해를 볼 수 없는 날들이 며칠이고 이어졌다. 그런 어두컴컴한 날들이 모여 제주의 겨울을 채웠다.




신혼여행지였던 노르웨이, 트롬쇠의 12월은 제주의 겨울과 비슷했다. 극지방의 해는 낮에도 지평선 위로 떠오르지 못했고, 햇볕에 데워지지 않은 공기는 한낮 내내 차가웠다. 해가 머물지 않는 빈 하늘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란 듯 구름은 어지러웠고,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거리는 상점의 노란 조명들이 차지했다.


추위가 물러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앞으로 몇 달이 지나도록 해는 제 모습을 보이지 않을 테고, 대신해 자리를 차지한 컴컴한 하늘과 날이 선 바람은 모두 추위의 편이니 구태여 스스로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길었다. 키가 큰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길었다. 그들이 앉은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그들이 일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나와 달랐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어 걸음은 걸을 시간을, 그들은 일어나는 데에만 썼다. 하지만 내가 두어 걸음을 먼저 걸었다고 해서 계속 앞서 나가지는 못했다. 그들이 한 걸음만 내딛으면 단숨에 내 두어 걸음을 따라잡았다.


내가 두 걸음으로 갈 거리를 한 걸음만에 가던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은 겨울옷 답지 않게 얇았다. 거위털이 잔뜩 든 패딩에 털모자와 장갑, 목도리로 몸을 싸맨 아내와 나처럼 유난하지 않았다. 추위가 일상인 그들은 어차피 떼어낼 수 없는 추위와 함께 섞여 어우러지는 듯했다. 그곳에서는 아내와 나만 예전엔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던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하루 중 가장 밝은 12시의 거리, 이미 어둠이 깔린 오후 2시의 성당.

두툼한 패딩으로 가두어놓았던 온기는 차가운 거리를 걸으면서 조금씩 새어 나갔다. 한기가 몸으로 스며들어오는 속도는 그 한기를 몸이 다시 데우는 것보다 빨랐다. 금세 몸이 으슬으슬했다. 그럴 때면 근처 상점으로 들어가 사지도 않을 물건들을 구경하며 몸을 녹였다.


북극권의 도시 구경을 마친 이른 저녁, 식어버린 몸을 끌고 숙소로 돌아와서 누룽지를 끓였다. 비싼 북유럽의 식당을 끼니때마다 매번 갈 수는 없었다. 그나마 저렴하다며, 그리고 세계 최북단에 위치한 버거킹이라며 몇 번 가서 먹은 와퍼세트 하나의 가격은 112크로네, 한국돈으로 15,000원 정도였다. 이곳에 오기 전 한국에서 짐을 싸면서, 아내는 신혼여행을 떠나는 캐리어에 누룽지와 볶음김치를 담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라며 웃었다.


김이 올라오는 뜨거운 누룽지는 단순한 식사 그 이상이었다. 배를 채우는 것보다 몸을 녹이는 게 우선했다. 뜨거운 누룽지에 몸이 녹으면, 그제야 배도 채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 넉넉함이 한국돈으로 1,000원도 안 하는 가격이었다.




금값인 파는 그 몸값에 맞게 그릇에 담아 대우해 준다.

입맛이 살아나는 게 더딘 아침, 누룽지는 까슬한 입맛을 거스르지 않는다. 부드럽게 입안을 넘어가는 달걀말이도 아침에 잘 어울린다. 다듬어 얼려두었던 마지막 파를 꺼낸다. 지난번 마트에서 장을 볼 때, 한단에 7,000원이 넘었던 파를 끝내 카트에 담지 못했다. 이번 달걀말이를 끝으로 한동안은 파를 넣지 않아도 되는 음식으로 밥상을 준비해야 한다. 떡만둣국도 안되고 콩나물국도 안된다.


칼로 다다다다. 누룽지는 끓이기만.

달걀을 풀고 파를 다지는데, 식탁에 반찬을 다 담아낸 아내가 기웃거린다.

‘나는 뭐 할 거 없나?’

이제는 자연스럽게 부엌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누룽지에 물 넣고 끓일래?’


아직까지 아내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한 번에 켜지 못한다. 가스레인지의 손잡이를 돌리면 스파크가 튀면서 불이 붙긴 하지만 손잡이를 놓으면 바로 불이 꺼진다. 서너 번 만에 성공한다. 줄곧 한 번에 불을 켜지 못하는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던 아내는, 음식을 몇 번 만들면서 이제는 가스레인지를 탓한다.

‘우리도 인덕션으로 바꿔야 하는 거 아냐?’


시작이 좋다. 이러면 실패 할리가 없다.

기름을 두르고 달걀물을 붓는다. 젓가락과 숟가락을 양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첫 주름을 잡는다. 달걀말이를 할 때마다 긴장이 되는 순간이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는다. 찢어지지 않고 잘 접혔다. 시작이 좋다. 이러면 실패할 리가 없다. 이제 과감히 말기만 하면 된다.


댤걀을 말고 남는 꼬다리는 후후 불어 아내의 입에 넣어준다. 아내도 이제는 달걀을 말고 남은 꼬다리는 자기 것이라는 걸 알고 미리 옆에서 기다린다.


완성. 아내의 반찬 담는 스킬이 날이 갈수록 는다. 달걀말이는 12조각. 혹시 궁금하실까봐.

누룽지를 먹을 때면 언제나 신혼여행으로 갔던 트롬쇠의 추위가 떠오른다. 그리고 아내와 나의 몸을 녹여준 누룽지가 있던 밥상이 떠오른다. 떠오른 기억들은 끊기지 않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길었던 노르웨이 사람들, 최북단의 버거킹, 그리고 하늘을 뒤덮었던 오로라.


트롬쇠에서 먹었던 누룽지는 둘의 기억에 함께 각인이 되었고, 앞으로도 아내와 난, 누룽지를 먹을 때마다 신혼여행의 날들을 떠올리게 될 거다. 서로의 같은 기억을 꺼내어주는 음식. 이런 음식이 앞으로 하나둘씩 늘어가는 것이 둘이 함께 부부로 살아가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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