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ed on Oct 24, 2021
식물을 기르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내 식물이 죽어가는데 어떻게 해야 해?' 혹은 '이거 죽은 거지?'인 것 같다.
가드너들이 식물이 죽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각자 다양한데 나는 주로 줄기 혹은 나뭇가지를 잘라 속을 확인하여 아직 줄기가 살아있는지 확인하거나, 식물을 파내어 뿌리를 확인한다.
나의 경험상 뿌리가 위와 같이 싱싱하게 살아있는 게 보인다면 위의 잎이나 나뭇가지가 어떻게 되었든 마른 잎 사이로 새 잎이 나고는 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나는 절대 이 식물은 죽었다고 단정 짓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뿌리는 식물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과는 다르게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른다.
사랑을 많이 받은 식물들은 뿌리가 고르고 두껍고 튼튼하다. 여기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충분한 햇빛과 바람을 받고, 일정한 물을 마셨다는 의미이다.
반면, 항상 목이 마른 식물들의 뿌리는 가느다랗고 실처럼 길며, 수가 많다. 모자란 물을 조금이라도 더 흡수하기 위해 그렇게 발달된 것이다.
죽은 식물과 살아있는 식물은 식물을 뽑을 때도 차이가 있는데, 죽은 식물을 뽑을 때는 힘없이 쑥 하고 뽑히는 반면, 살아있는 식물은 흙을 꼭 잡고 놓지 않아 잘 뽑히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나무가 많은 산에선 아무리 강한 태풍이 불어도 산사태가 나지 않는다.
내가 정말 존경하는 나무의사 우종영 님의 책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에서 우종영 선생님이 일하신 농장주 인분은 선생님께 아래와 같이 말하신다.
“ 고무나무는 여건상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자랄 수 없지만 따듯한 나라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만 하면 20~30미터를 훌쩍 넘는 거목으로 자라지. 나무를 키울 때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눈에 보이는 줄기가 아니라 흙 속의 뿌리란다.”
(우종영 님의 책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p.31)
그리고 이어서 선생님은 이렇게 덧붙이신다.
“ 아무리 큰 나무라도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고, 싹이 튼다 해도 몇 해 동안은 자랄 수 없다. 막 싹을 틔운 어린나무가 생장을 마다하는 이유는 땅 속의 뿌리 때문이다. 작은 잎에서 만들어 낸 소량의 영양분을 자라는 데 쓰지 않고 오직 뿌리를 키우는데 쓴다. 눈에 보이는 생장보다는 자기 안의 힘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힘을 비축하는 시기, 뿌리에 온 힘을 쏟는 어린 시절을 ‘유형기’라고 한다."
(우종영 님의 책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p.32)
나는 죽었다고 생각되어 버려진 식물들을 정말 많이 보았다. 물이 말라서, 해가 부족하여 혹은 다양한 이유 등으로 겉모습이 처음과 달리 생생하지 못할 수 있다.
초록색이던 잎들이 갈색으로 말라버리고, 풍성했던 가지가 앙상해져 볼품없어질 수 있다. 그것을 보고는 사람들은 '죽었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죽었다'라고 판단된 생명은 쓰레기통으로 버려진다.
하지만 뿌리만 살아있다면 죽었다고 생각된 식물은 다시 살아난다. 앙상한 가지에서 하나둘씩 조그마한 싹을 틔운다.
나는 우리의 삶이 식물과 참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한 때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과거만을 그리워한다.
누군가는 현재 행복을 눈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불행을 걱정하며 현재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낭비한다.
누군가는 아예 자신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불행하며, 남들과 다른 시작점에서 시작했다며 포기해버린다.
나는 누구나 마음속 뿌리만 살려두라 하고 싶다. 뿌리만 살아있다면 다시 빛나던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뿌리만 살아있다면 앞으로 다가올 태풍에 무너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뿌리만 살아있다면 곧 힘을 비축하는 '유형기'를 지나 누구보다 튼튼한 나무로 자랄 것이다.
뿌리만 살아있다면 겉은 죽어보여도 실은 살아있으니 말이다.
이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원하는 새싹을 틔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뜻이자 희망이다.
친구의 가게에서 죽어가는 화분을 발견했다. 잎은 다 떨어져 누가 봐도 죽었다고 생각하는 나무였다. 아마 잎이 가득했을 때는 노란 꽃을 피우는 레몬향이 나는 '애니시다'라는 식물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죽은 화분이라 이미 단정 짓고 버릴 거라고 하기에 그럼 내가 가져가겠다 했다. 가지를 하나 부러뜨려 보니 아직 가지 속은 살아있었다. 이 하나의 가지로 살려보자 싶었다. 식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니까.
저 무거운 화분을 비닐에 꽁꽁 싸서 한여름에 지하철을 타고 집 까지 왔다. 땀이 뻘뻘 나고 마지막엔 팔이 저려 힘들었지만, 오히려 마음은 가벼웠다. 이제 너를 살릴 수 있겠구나 싶어서. 빨리 해를 보여주고 신선한 공기를 쐬어주고, 시원한 물을 실컷 마시게 해주고 싶었다.
죽은 가지를 최대한 쳐주고 해가 잘 드는 곳에 자리해주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나도 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더 컸다. 사실은 죽었는데 내가 괜한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물을 줬다. 여름이라 한낮에는 더울까 해뜨기 전 새벽, 해 지고 난 저녁 그렇게 매일 물시중을 들었다.
누가 보기에는 죽은 식물에 계속 물을 준다고 바보라고 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식물이 살아나면 날 놀리던 사람들이 바보 되는 거다. 안 살아나더라도 난 최선을 다했으니 스스로 창피할 것 없을 것을 알기에 누가 보면 바보라고 할 짓을 해봤다.
결국 매일 물을 주고, 들여 보고, 기다려보니 마른 줄만 알았던 가지에서 새싹이 올라왔다.
하나가 올라오니 하루가 다르게 매일 새순을 올리더니 이제야 숨통이 트였는지 애니시다는 빠르게 본모습을 찾아갔다. 결국 그해 가을에는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전보다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애니시다가 되었다.
감격스러워 눈물이 난다기보다는, 기뻐서 웃음이 났다.
물론 모든 식물이 이렇게 기적처럼 본모습을 찾아 빠르게 살아나진 않는다. 그래도 잠깐의 실수로 혹은 방심으로 식물이 죽었다면, 아니 죽어버렸다고 생각 된다면 이미 보내주려고 생각한 거 마지막으로 한번 더 모든 방법을 시도해보자. 그래도 안되겠다 생각이 든다면 그때 보내줘도 된다.
그게 죽어가던 식물이던, 내 안에서 죽어가던 무엇이 됐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