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_청소년
청소년기에 나도 그다지 할 말이 많은 건 아닌데 아무튼 나에게 나의 의견을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내 생각을 말할라치면 모두들 간단히 비웃으며 바보 같은 소리, 쓸데없는 소리, 하나마나 한 소리는 하지 말라고 핀잔을 퍼부었다.
그래서 난, 안 그래도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인데, 더욱 말을 안 하게 되었다. 내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 의견을 상대방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고사하고, 감기몸살을 심하게 앓아도 그걸 나 혼자 끙끙대면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 했다. 고열에 증상이 심해져서 쓰러질 때쯤이면 그제서야 이를 알아본 가족들이 나를 눕히면서 말했다. ‘왜 바보같이 말을 안 해!’
그렇게 소심하고 무기력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내 성격은 이렇게 굳혀지나 싶었을 때쯤
나는 놀라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내 사촌형은 나보다 10살이 많다. 내가 15살(중학교 2학년)이었으니 당시 그 형은 25살. 아니 뭐, 어른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 엄마아빠보다는 한참 어릴 텐데, 부모님이랑 대등하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어른스럽게 대화를 하는 모습을 난 넋 놓고 쳐다봤다.

<캬.. 저 형 말 잘한다. 어른들 앞에서 주눅이란 걸 찾아볼 수가 없네. 어쩜 저리 유머러스하게 대화를 잘할까. 대단하다…>
형은 말만 매끄럽게 잘하는 게 아니었다. 함께 농구하러 갈 때면 누구보다 여유롭게 패스며 슛을 날렸고, 희한한 필살 동작도 가지고 있어서 ‘아니 저건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약간 신비스런 느낌까지 들게 만들었다.
형은 농구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나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기타를 쳐왔지만 형의 실력은 나보다 (당연히) 훨씬 앞서 있었다. 우와, 형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나 좀 갈쳐줘!
“야, 그러지 말고 동네에서 기타 배우고 싶은 애들 있으면 다 모이라 그래. 내가 다 갈켜줄게.” 오오오. 멋져.
형은 기타만 잘 치는 게 아니었다. 잘생겼다. 우리 둘이 월미도를 갔는데 당시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형은 깨끗한 복장에 당시 젊은이들의 필수템 ‘무스’를 머리에 바르고 있어서 참 멋스러웠다. 바이킹에 타려고 오르는데, 우리 바로 뒤에 있던 20대 여성 2명이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랑 같이 타실래요?” 형을 보고 건넨 말이 분명했다. 난 모자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순간 중학생의 얼굴을 본 여성들은 아차 어린놈이 한 마리 있었구나 싶은 마음에 꽁무니를 내빼버렸다. 너무 아쉬운 마음ㅇ.. 아니 아무튼 형은 길거리에서 헌팅을 당할 정도로 아주 핸썸 보이였다.
적어도 내 눈엔 그랬다.
소설 <큰 바위얼굴>을 아는가?
큰 바위에 새겨진 인자한 얼굴을 동경하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얼굴을 닮은 인자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난 의도하지 않았는데 말투랑 하는 행동들이 그 형을 따라 하는 것 같다고 주변에서 알려줬다.
<응? 아냐 아냐. 난 따라한 적 없어.> 그러나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늘 억눌려 있던 내 삶, 의견이나 생각 따위는 없던 내 삶, 자신감 없이 늘 수줍어하고 눈물이 많던 나, 얼굴이 빨개지는 걸 들킬까 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던 나였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기타도 곧 잘 치고, 더 나아가 피아노와 드럼까지도 손을 대는 자신감을 보였다. 꾸준히 농구를 해서 누구와 플레이를 해도 재밌게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내 의견을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동경해 온 그 모습에 반해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와 정반대지만 너무 부러운 저 모습들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 내 의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를 연면히 체화시켜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예민하고 마음이 여리다. 예전에는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다면 이젠 다르다.
예민하다는 것은 단순히 짜증을 잘 낸다의 다른 표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잘 살필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마음이 여리다는 것은 타인을 배려하느라 잘 휩쓸린다는 말이 아니라 내 의견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때 당당하지만 상처되지 않게끔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굴이 빨개진다는 것은 상황 파악을 한 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기 성찰’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고,
눈물이 많다는 것은 감정이 촉촉하여 다른 이의 딱딱하게 건조된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릴 적 내 모습을 완전히 벗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여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세계관이 바뀐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고만 있는 나약한 내가 아니다.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눈을 부릅뜬다. 내 다리로 일어선다. 그리고 문을 열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딛는다.
청소년기에 만난 귀인으로 인해 나는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