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40에 이러고 있다(1)

행복_유년기

by 조운생각

태어나보니 나의 세상에는 나보다 먼저 우리 집에 거주하고 있던 여성(누나)이 3명이나 있었다. 엄마를 포함하면 4명의 여성이 지배하는 세상에 무슨 배짱으로 끼어들었는지 올챙이 적 일이라 생각은 안 나지만 암튼 대단한 용기였던 것 같다.

함 시작해볼까나?



귀한 아들이 태어났으니 모두들 좋아해 줬을 거란 기대는 김칫국. 여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나는 라이언 일병이 된 듯 홀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가 결국엔 ‘아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 순간 영웅이 나타나 날 구해주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절뚝거리며 살아갈 운명이었다.


나의 유년기는 왜 그리 전쟁터 같았을까


첫째. 너무 찢어지게 가난했다.

처음엔 그렇게까지 없는 형편은 아니었다고 했는데, 내가 태어난 이후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돼지 사육으로 로또를 노려봤건만 돼지 파동이 일어나 눈물을 머금고 돼지들을 땅에 묻어야만 했다.

집에 불이 나기도 했고,

간신히 전세로 들어간 집은 지하 2층인데 곰팡이가 먼저 살고 있어서 우리에게 텃세를 부렸다. 그 덕에 얻은 기관지 질환은 덤.

장마철에는 하수구라고 생긴 곳에서는 모두 물이 역류해 온 집안을 세척해 주었고, 환기시킬 창문도 변변찮이 없는 꽉 막힌 집에 살았다.

일수 아저씨들이 매일 같이 찾아오면 그 앞에 모든 식구들이 굽신거리며 인사를 했고, 그중 돈을 못 받은 어떤 분께서는 우리 집에 석유를 붓고 집을 태워버리겠다고 윽박질렀고, 우리 가족은 벌벌 떨며 밤을 지새웠다.

라면 한 개를 끓여 먹으면 한 명뿐이 못 먹기 때문에 국수를 왕창 넣어 싱겁기 그지없는 라면국수를 2~3명이 나눠 먹고,

과일 장수가 찾아올 때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떨이’를 쓸어왔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식구 입이 6개라 과일정도는 가뿐히 순삭이었으므로 기회를 잘 포착하지 않으면 처참하게 벗겨진 과일의 껍질만 구경하게 될 뿐이었다.


둘째. 매를 너무 많이 맞았다.

요새 ‘정기 구독’들 많이 하는 것으로 안다. 혹시 ‘정기 매’라는 걸 들어봤는가? 어렵지 않은 개념이다. 정기적으로 맞는 거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30대 정도를 그냥 정기적으로 맞으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도록 유도하는 효과적인 시스템이다.

그리고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잘 아실 텐데 ‘연대책임’이라고. 형제들 중 누군가 한 명이 잘못을 하면 모두가 함께 처벌받는 우정형 시스템이다. 이것도 한 명당 20~30대 정도로 마사지받게 된다.

매를 많이 맞아본 사람만이 안다는 ‘공매’를 아는가? 매를 맞을 때, 맞는 사람이 카운트를 세게 되어 있다. <퍽! 하나!> <퍽! 으악 둘!> 이런 식으로 맞을 때 잘 세어야 하는데 그걸 놓치면 방금 맞은 매는 공매라서 안 맞은 걸로 치는 공짜 매다. 참으로 감사한 시스템이다. 뭘 이런 걸 공짜로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별 매’가 있는데 이건 아빠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면 즉시로 처형당하는 시스템이다. 이걸로 난 한 번 죽을 뻔한 적이 있다. 퇴근하신 아빠가 집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는데 어린 내가 잠시 졸다가 그걸 못 듣고 10분 정도를 쿨쿨 자버린 것이다. x 됐다 싶어 눈을 비비며 달려가 문을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풀파워 양싸대기를 20대 정도 맞았다. 난 살기 위해 가드를 올렸지만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그냥 잘못했다, 살려달라 애원만 하다가 다행히 기절하기 직전 종료되었다. 이런 게 바로 특별 매.


셋째. 막내누나와의 생존대결

이해 해줄라 치자면 막내누나는 좀 억울했다. 가난한 형편에 본인은 맨날 언니들이 입던 옷만 물려 입는데, 동생인 나는 남자라고 (시장표 싸구려지만) 새 옷을 입힌다는 사실. 그래서였을까.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나이 차이는 2살인데 어렸을 때 2년은 꽤 큰 차이라서 내가 많이 밀리긴 했지만 나도 악으로 깡으로 덤벼들었다. 너무 자주 싸워서 그 어렸던 내가 ‘사는게 지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 번은 싸우고 나서 6개월인가를 서로 말도 하지 않은 적이 있다. 정말이지 내 삶에는 왜 다들 적들 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평화를 갈구했던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음악은 슈퍼맨이 등장할 때 나오는 배경음악이었다. 내 삶에도 슈퍼맨이 좀 나타나줬으면… 날 좀 구해줬으면… 그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 어린애가.


나에게 슈퍼맨은 엄마였다. 엄마만은 날 위로해 줬고 안아줬다. 막내아들인 내가 어리광을 피우면 그걸 다 받아주고, 조금만 잘하는 게 있어도 주변에 자랑을 하며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엄마는 가난한 형편에 보탬이 되기 위해 늘 밖에 나가셔야만 했기에 나랑 같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날 보호해줬어야 하는 슈퍼맨 엄마가 없는 틈을 타 전쟁터의 적군들은 항상 나를 무찌르면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 듯했다. 어린 나 하나 해치워서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8살짜리에게도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

어떠한 전쟁을 치르고 나서라도 잠자는 시간만큼은 늘 포근하고 평화로웠다.

단칸방에 6 식구가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워서 불을 끄면 그때부터 그곳은 천국이 되었다. 김치찌개에 들어간 고기(비계덩어리)를 두 번 연속 먹었다고 내 머리를 쥐어박는 사람도 없고, 누나가 잘못한 일을 가지고 연대책임을 물어 나를 때리는 사람도 없고, 다만 내가 좋아하는 내 파란색 베개를 포근하게 베고 누워서 깜깜한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나는 내 머릿속 주크박스를 켜서 먼저 슈퍼맨을 한 번 불러온 다음 내가 만든 노래를 흥얼거린다. 조운 즉흥 환상곡 2번. 제목은 ‘오늘도 내가 이겼다.’ 모두들 내 입을 틀어막느라 정신없었겠지만 그들도 쉼이 필요한 이 시간. 그래, 모두 편히들 주무시오. 하고 싶은 것 많은 꼬맹이를 억압하느라 다들 고생 많으셨소.


그렇게 8살짜리 꼬맹이는 전쟁 같은 하루를 마무리하며 행복하게 잠이 든다. 눈을 감은 채 미소를 머금으며 생각한다. 내일은 오늘보단 행복할 거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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