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싶은 욕망

by 심시현

지금 세대의 조어 능력은 신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어떤 조어는 참 뜬금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말하고자 하는 상황과 말하고자 하는 내용, 나아가 그 느낌까지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긴 문장으로 설명해야 할 상황을 짧고 간결한 하나의 어휘에 다 담아내고 있는 조어를 대할 때면 그 번뜩이는 재치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런 조어 중 하나가 감정 쓰레기통이다. 이 재미있는 조어에는 말하는 이의 뻔뻔스러움과 듣는 이의 괴로움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서 그 담화 상황을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 “그 사람이 나를 감정쓰레기통으로 삼았어”라고 말한다면 듣는 이는 그 상황을 영화처럼 그려낼 수 있다.

과거에는 없던 말이 -어쩌면 굳이 필요치 않던- 지금 생겨난 것을 보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쏟아 버려야 할 감정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하지만 그 감정을 잘 처리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기회를 만나면 불법으로 쓰레기를 버리 듯 자기감정을 쏟아내지만 듣는 이는 거북할 뿐이다...


어쩌다 보니 반평생 사람과 밀접하게 만나는 일에 종사했다. 사교육 분야에서 학교에서 문화센터에서 교회에서 학부모를 만나고 학생을 만나고 어른과 아이를 만나고 여자들을 만나고 남자들을 만났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의도치 않게 뚜렷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말하고 싶은 욕망’

많은 사람들에게 그게 있었다. 크고 분명한 욕망이었다. 작은 모임이나 수강생들이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강좌를 할 때 가장 필요하고도 어려운 일은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적당한 때 끊는 것이었다. 혼자 하는 발표가 아니라 본인 뒤에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일단 말을 시작한 사람은 그런 사실을 모두 잊었다, 아니면 모른 체하든지. 일단 시작한 말은 길어졌고, 긴 말이 주제를 벗어나는 것은 예정된 순서였다. 그런 말의 공통점은 그 주인공이 언제나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 자신의 경험, 자신의 생각, 자신의 의견, 자신의 고통, 자신의 충고... 객관적인 사실을 갖고 길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은 거의 없다. 어떤 주제든 어떤 화제든 그들은 비상한 재주로 이야기를 자신에게로 연결시켜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자신의 감정에 취한 사람의, 그 이야기가 어릴 때의 상처와 관련되어 있다면 더욱더, 말을 끊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인색하고 몰인정해 보일 수 있음을 무릅써야만 했다.


경험칙으로, 말하는 싶은 욕망은 크게 두 가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였다.

하나는 성향이고 다른 하나는 굴곡진 삶이다.


성향인 이들은 말에 요점 정리가 안 됐다. 운동화 하나 샀어요,-라는 말을 6하원칙으로 말했다. 더하여 운동화의 생김새나 무늬, 기능이 있다면 그 기능까지 설명했다. 물론 이들에게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불필요한 말과 필요한 말, 핵심과 그 주변이 구분이 안 될 뿐이었다.

대화다운 대화를 위해서는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이것을 ‘대화의 격률’이라고 하는데 4개의 대화의 격률 중 첫 번째가 양의 격률이다. 양의 격률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에게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필요한 만큼의 정보, 그 이상을 과하게 제공하는 것은 이미 대화가 아닌 것이다.


다른 하나, 굴곡진 삶을 산 이들, 이들은 충분히 동정받을 만하고 때로는 불굴의 의지라는 덕목으로 박수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하지만 구구절절 이어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때때로 ‘전가의 보도’가 되었다. 전혀 상관없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되어도 그들은 어김없이 자신의 굴곡진 삶의 어느 한 지점으로 사람들을 끌고 갔다.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끌려가야만 한다. 이들은 ‘의미의 객관화’가 안되었다. 지난 삶의 여정이 아무리 험난했어도 그 고통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의미’가 되지는 않음을 놓친다.


위의 두 가지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외로움이었다. 주변이 적적해서 말할 대상이 없는 외로운 사람들은 말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 그들은 마치 갈증을 참다가 생수를 들이키 듯 두서없는 말들을 끝없이 쏟아냈다. 슬픈 일이지만 이런 노년층을 많이 만났다.



안타깝게도 이들에게는, 말을 들어주는 것이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그래서 지금 자신이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리스트에는 정신과 의사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말을 들어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라고 여겨진다. ‘말을 들어줌’이 쉬운 것이라면 감정쓰레기통이라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잘 들어주는 것이 대화의 미덕처럼 자주 언급 되지만 ‘들어줌’에는 인내와 함께 자기 부인이 따른다. 자기 부인이 없이는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이야기, 혹은 길고 지루한 이야기, 혹은 관심 없는 남의 가정사를 들어줄 수가 없다.

듣기는 수동적인 의사소통 과정이 아니다. 자기 부인과 인내력, 그리고 성숙한 인간애가 필요한 과정이다.


놓칠 수 없는 한 가지, 내면에 힘이 있는 사람은 말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 못 해 밖으로 쏟아내야 할 필요가 크지 않았다. 어쩌면 순서가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밖으로 쏟아내야 할 정도로 감정을 주체 못 하지 않고, 그것이 내면의 힘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말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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