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민이는 내가 만난 '다문화 아이들' 중 가장 안타까운 경우다
동민이는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무렵 한국에 들어왔다. 입국하자마자 학교에 입학을 했고 입학하자마자 학교장의 추천으로 센터에 들어왔다. 또래에 비해 왜소한 몸피에 작은 키, 까무잡잡한 피부의 아이는 온몸 가득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는 불안과 방어본능으로 일렁였다. 낯선 나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아이가 보이는 불안은 지극히 당연했다.
내가 일하는 센터에 '다문화'라 이름 붙여진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십 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다양한 나라, 다양한 배경의 아이들이 들어왔고, 아이들은 대부분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았다.
아이들이 들어오는 과정은 무지막지했다. 아이들은 사전 준비 기간 하나 없이 입국하자마자 제 나이에 맞는 학년으로 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다음 아이들이 겪을 과정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것은 아이들 개인의 역량, 담임 선생님의 소양, 그리고 주위에 어떤 친구들이 있을지에 대한 '운', 대체로 그런 것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불편한 진실'이겠지만, 아이들의 적응에는 어쩔 수 없는 선천적 요소가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6개월 정도 지나면 어느 정도 우리말을 읽고 말할 수 있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차이가 작지 않았다. 학교 적응이나 학업성취도 대체로 이에 비례했다. 또랑또랑한 아이일수록 적응력이 좋고 학업성취에서도 내국인 아이들에 뒤지지 않았다. 나라나 국적에 무관하게 어디에서든 자기 삶을 야무지게 영위해 갈 아이들이란 생각이 들게 하는 아이들이었다 이런 아이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와 정 반대인 아이들이 있다. 1년이 지나도 '듣기'조차 안 되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은 예상대로 학습에서도 부진했고, 교우관계도 어려웠다.
이 가운데는, 방과 후부터 저녁까지 내내 혼자 있어야 하는 아이가 있고, 부모가 있지만, 형제들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아이도 있고,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말을 못 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마트를 가는 아이도 있었다. 마트에서 아이가 하는 일은 계산원과 엄마 사이의 통역..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엄마를 창피스러워하며 이 '통역사'를 그만두었다.
언젠가 그런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적절한 비유는 아니다-, 다문화 아이들이 내국인 아이들을 떠나게 해서 다문화 아이들이 더 많은 초등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이런 학교들이 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다문화 아이들이 많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일 것이다. 10년쯤 뒤에는 이 아이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 있을 것이다.
국가는 이 아이들에게 많은 혜택을 준다. 합법적 입국이라면 입국하자마자 학교에 제 학년으로 입학해 학교를 통한 여러 지원을 받는 데 그 자체가 큰 혜택이다.
이 아이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을 따로 운영하는 학교가 많을 만큼 국가의 노력은 훌륭하지만, 조금 머리가 굵어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 '고마운 나라'에 고마움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정말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반대의 감정은 많다. '서운함' '적개심'.
나의 좁은 경험을 일반화할 수 없지만, 내가 본 한에서는 "한국에서 열심히 잘 살 거예요"- 하는 아이들보다 "나중에 우리나라로 갈 거예요"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동민이는 먼저 입국한 엄마의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와 한국인 새아빠와 함께 살았다. 한국인 새아빠는 동민이에게 무서운 아빠였던 것 같다. 처음에 어리바리했던 동민이는 시간이 지나자 다른 눈빛을 했다. 친구들은 동민이가 늘 PC방에 있고, 학교에서는 욕을 제일 잘하는 애라고 일렀다. 중학생이 된 동민이를 만났을 때, 동민이는 출석일수를 못 채워 학교에서 곧 제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이의 눈동자는 이미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