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대 과잉】
주민센터 같은 관공서에 가면 민원인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소리를 쉽게 듣는다.
관공서뿐 아니라 단체나 언제부턴가 ‘샵’이 된 가게들, 매스컴에서도 ‘선생님’은 이제 흔하게 듣는 호칭이다. 무뚝뚝한 소리로도, 불친절한 어투로도, 심지어 화를 내면서도 ‘선생님’이다.
아무 의미 없는 선생님,
그럼에도 꼭 선. 생. 님.
공갈빵 같은 존칭은 쓰는 이나 듣는 이 모두에게 공허하고 어색하다.
“사장님이 내 다리를 쓰다듬으셨어요.”
“원장님이 우리 아이를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가셨대요”
“피해자에게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현장감을 중시하는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비일비재 나오는 말이다. 너무 많이 나와 놀랄 것도 없지만, 그 불필요함이 지나쳐 불편하기만 한 존대다.
화자와 청자만 있는 대화에서는 존대의 요소가 양자의 관계로 국한되지만, 객체 존대에서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뿐 아니라 화자와 객체의 관계, 청자와 객체의 관계까지 모두 고려 대상이다.
객체 존대는 이런 관계의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쓸 수 있다.
이런 규칙을 무시하며 압존법이 사라지는 것은 언어를 장황하게 만들 뿐이다. 왜 그렇게 존대가 받고 싶은지 사실 이해하기도 어렵다.
봉건사회가 아님으로 목적어의 내용도 고려해야 한다. 객체가 화자나 청자에게 존대의 대상이라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행위가 목적어라면 존대는 불필요하다.
‘나를 성추행한 사업주’ ‘내 아이를 성폭행한 교육기관 원장’ 그리고 ‘범죄자’는 청자가 누구든 객체 존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저 말들은 마땅히,
‘사장이 내 다리를 쓰다듬었어요.’
‘원장이 우리 아이를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대요.’
‘피해자에게 할 말 없습니까? 가 되어야 한다.
저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몰라서’라고 할 수 있다.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모르면 존대보다는 하대가 더 자연스럽다. 모르는데 하대가 아닌 존대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유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우리가 숨 쉬는 이 사회에 존재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때로는 분위기고 때로는 문화고 때로는 남들의 시선이고 때로는 그 모든 것이 아닌,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힘’은 필연적으로 압력이 된다.
그 압력이 크고 강하다 해도
무의미하고 어색하고 불필요한 존대를 강요하는 힘, 그것은 깨져야 한다.
괴상한 존대의 사멸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임에 분명하다.
【카톡 과잉】
카톡 알림 소리를 무음으로 바꾼 지 한참 되었다. 봐야 할 카톡을 보지 못해 난감할 때가 있기는 했지만-굉장히 드물게- 무음으로 바꾼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카톡은 소리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숫자로도 존재를 과시했다. 핸드폰을 켜면 숫자를 달고 있는 카톡 아이콘이 바로 보였다.
숫자는 쉽게 40, 50을 넘어간다. 숫자가 한순간 눈에 들어오면 어쩐지 그 숫자의 무게만 한 짐이 내게 턱 안기는 느낌이 든다. 내가 유별난 걸까...?
어쩔 수 없이 카톡을 연다. 카톡을 여는 건 그 내용이 궁금해서이기보다는 숫자를 지우기 위해서가 더 큰 이유다. 정확히는 숫자가 주는 버거운 무게에서 벗어나고픔이다.
카톡을 열면 숫자가 쓰여 있는 빨간색 동그라미들이 칸칸마다 아우성치듯 들어차 있다.
나는 그가 뭘 먹었는지 어디에 놀러 갔다 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다.
경찰청 발이라며 보내는 위험 문자는 거의 믿지 않는다. 서명해 달라며 보내는 주소로 들어가 서명을 하지도 않는다. 이미 기분이 나쁘기 때문에 개그도 재미있지 않다. 온갖 명언과 아름다운 동영상은 전혀 감동스럽지 않다.
왜 본인이 먹은 음식 사진을 보내는 걸까? 자신의 명상을 보내서 어쩌자는 건가? 오만가지 것을 캡처해서 굳이 보내지 않아도 내게 필요한 거라면 이미 알고 있거나 앞으로 알 것이다.
소심한 나는 감히 그런 말을 톡으로 답하지 못한다. 단톡에서 과감히 나오지도 못하고 핸드폰을 포기하지도 못한다.
숫자를 지우기 위해 칸칸의 톡을 빠르게 연다. 숫자가 사라지면 홀가분해지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매일 이 짓을 반복한다.
바라는 한 가지!
카톡의 경제.
톡은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 의미 있는 내용으로.
나는 그대의 과잉 친절이 몹시 무겁습니다.
【몸 과잉】
마음이 아픈 것보다 몸이 아픈 게 차라리 낫다는 말은 흔히 듣는 소리다. 그 말에는 사람은 지극히 정신적인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정신의 강조에는, 사람은 영혼 없는 동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고귀한 존재라는 오만이 은연중 엿보인다.
‘정신’은 오만의 이유가 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다른 문제다.
가치는 가치일 뿐 중요성과 등가를 이루지 못하는 게 아마도 우리의 ‘현실’ 일 것이다.
현실의 주제는 ‘정신적인 존재인 인간’과의 이율배반성으로 다소 희극적이지만 현실은 현실임으로 권력은 충분하다.
‘몸’
‘몸’이 이토록 중요한 주제로 부상한 때가 인류 역사상 있었을까...?
과거에도 노예나 권력자의 여인들처럼 몸이 중요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런 이들은 제한적이었고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지금처럼 광범위하게 보편적으로 ‘몸’이 중요한 주제이었던 때는 없었다.
'몸'은 이제 대치가 안 되는 중요한 화두로 사회 곳곳을 장악하고 있다.
방송에서 강연에서 책에서 사적인 모임에서까지, 몸의 권력은 무소불위다. 이유는 늘 분명하다. 건강, 그리고 건강을 핑계 삼은 외양.
성공담이 인간승리인 듯 방송을 타고, 책이 출판되고, 들어본 적 없는 이국의 어느 지역에서 나온다는 이름도 낯선 제품들이 쏟아져 나와야 할 만큼 다이어트는 중요한 걸까...? 아니, 날씬한 몸매는 중요한 걸까?
강박증같이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가?라는 잣대 하나로 온갖 먹거리와 온갖 행태를 재단하고, 취미처럼 병원을 찾아 갖은 검사를 할 만큼 건강은 절대적인 가치일까...?
주사를 맞고, 콜라겐을 먹고, 과학에 경탄하며 만 가지 기능성 화장품을 쓰면 늙어가지 않으려나?
진시황은 실패했지만 미용이 과학을 소비하는 이 시대는 기어코 성공할까?
과한 것이 사람의 욕심인지 어리석음인지 알 수 없지만 생로병사는 인간의 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 ‘몸’에 대한 과잉 몰두가 늙고 죽음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원하는 사람의 간절함 때문이라 해도, 그 이유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지점은 벌써 지나쳤다.
로마의 공공욕장이 몸을 깨끗이 씻는 목욕탕의 정도를 저 멀리 지나친 것처럼.
몸을 위해 담쟁이덩굴을 찾아내고 멀리 남극해에 있는 새우에게서 기름을 짜내고... 아마도 몸을 위해 박쥐를 먹었을 것이다.
그 ‘과잉’의 결과가 지금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차라리 모자라는 게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