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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명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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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머스캣 Mar 12. 2024

커피, 나에게 없지만 당신에겐 있는 것


 무명씨, 저는 성인이 되고 아메리카노를 처음 먹어봤어요. 요즘은 중고등학생들이 카페에 모여 공부를 하거나 시간을 보내는게 꽤 흔하던데, 제가 어릴 땐 그렇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식후에 믹스커피를 항상 드시던 부모님께서는 '너네는 아직 어려서 커피 먹으면 안돼'라고 우리 남매에게 매번 신신당부 하셨어요. 지고지순한 우리 남매는 스무살이 될 때까지 커피를 먹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저는 드디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스무살이 되었어요. 그러나 커피를 즐겨보기도 전에 제게 불면증이 먼저 찾아왔어요. 그렇게 제 인생에서 커피는 완벽히 사라졌어요. 카페인에 굉장히 민감해서 커피를 한 입만 먹어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야하거든요. 너무 아쉬워요. 직장인의 모닝 커피로 시작하는 왠지 부지런해보이는 아침, 후식으로 먹는 달달한 디저트와 씁쓸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 하실래요?'라는 몽글몽글한 대사, 인스타그램에 넘쳐나는 세련된 카페들, 땡볕의 여름에 단비같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 모든 것들을 저는 누리지 못해요. 그래서 제가 커피에 대해 말할 수 있는건 완벽히 타인의 취향들 뿐이에요. 평범한 사람과 커피의 이야기는 그저 평범하지만은 않더라구요.




- 남동생의 커피

카페인 초민감자인 저와 달리 카페인 초적응자인 5살 터울의 제 남동생은 '아 자기전에 씨~원하게 아아메 한 잔 때려야지'라는 기상천외한 대사를 종종 해요. 자신이 말한대로 프랜차이즈 큰 컵 아메리카노를 벌컥 벌컥 비우고는 숙면합니다. 남동생은 아빠의 유전자를 받은 모양이에요. 아빠가 학창 시절에 벼락치기로 밤새 시험공부를 하겠노라 양푼이에 커피를 한 사발 말아 원샷을 하곤, 바로 곯아떨어졌다고 했거든요. 



- 아빠의 커피

말했듯 아빠는 커피를 하루에 대여섯 잔 마셔도 잘 주무세요.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는 아빠는 최근에 발을 다치셔서 잠시 우리 남매가 사는 집에서 같이 지냈어요. 일을 쉬어야하는 답답한 마음때문인지 커피를 쉬지 않고 드시더랍니다. 머그컵에 찬물을 채우고 카누 가루팩을 두 개 풀고 전자레인지에 2분, 그게 아빠의 커피예요. 그렇게 전자레인지에 커피를 돌리는 소리가 하루종일 끊이지 않았어요. 전자레인리 소리와 아빠의 한숨 소리가 같이 들려올 때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곤 했어요. 금연을 시작하시고 그 빈자리를 커피로 채우시다보니 더 많이 마시는 것 같기도 해요. 다행히 지금은 다시 회복해서 일을 시작하셨네요.



- 엄마의 커피

엄마는 아빠와 남동생만큼 카페인 강자 아니라서, 오후 4시 전에 커피 딱 한 잔까지는 괜찮다고 하세요. 어렸을 때 엄마는 212였어요. 커피2, 설탕1, 프림2. 우리집 부엌 찬장에는 항상 커피용 작은 스푼과 유리병에 옮겨담은 맥심 커피가루, 황설탕, 프림이 있었어요. 너무 단 커피는 좋아하지 않는 엄마는 212, 아빠는 333을 드셨던 기억이 나네요. 두분 다 요즘은 그렇게 드시지 않는 것 같아요. 카누를 드시거나 밖에서 사드시더라구요.



- 직장 동료 S의 커피

처음 발령난 학교의 동료 S는 자타공인 커피 애호가였어요.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원두를 공수해오고, 커피콩을 직접 팬에 볶고, 커피를 내려먹는 크고 작은 온갖 장비를 모두 갖추고 사는 사람이요. 그게 S였어요. 커피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표현이 제일 어울리는 사람이었달까요. 최근에 다른 학교에 근무하게 되면서 연락이 심하게 뜸해졌는데 알고보니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해요. 아마 여자친구도 커피를 무척 좋아하거나, S가 내려주는 커피에 반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 부장님의 커피

재작년에 함께 일 년을 보낸 부장님은 지금 교감선생님이 되셨어요. 그만큼 나이가 지긋하셨지만 후배 교사들에게 그리 많은 것들을 강요하진 않으셨던 분이였어요. 부장님은 점심 급식 후에 먹는 캡슐 커피를 참 좋아하셨어요. 우리 학년 연구실에는 캡슐 커피 머신이 있으니 부장님이 커피 캡슐은 다같이 돈을 모아서 구비하자고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사다놓은 커피 캡슐의 대부분은 부장님이 다 드셨고, 저는 커피를 먹지 못하니 애먼 돈만 계속 냈어요. 그때는 나서서 말하지 못 하겠던 걸 보면 조금 어렸나봐요. 다음해에 새로운 학년 구성원들이 모였을 때 저는 돈을 모아서 간식이나 커피를 사는 건 없애자고 선포했어요. 돈을 모아 연구실 간식을 구비하는게 모든 학교의 너무도 오랜, 당연한 전통이자 문화인데 그걸 대뜸 없애자고 하니 그 해의 새로운 부장님께서 적잖이 당황하시는 게 느껴졌지만, 뭐 어때요. 전 커피를 못 먹는 걸요. 다른 간식들도 거의 먹지 않아요. 자기가 먹고 싶은건 자기가 사먹읍시다. 이 세상엔 커피를 못 먹는 저같은 성인도 있다구요.



- 지인 M의 커피

모임에서 만난 M은 TV 음악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한 사람이에요. 나이가 꽤 많은데 지나치게 높은 텐션과 술에 취하면 걸걸한 목소리로 입에 욕을 달고 사는 사람이기도 해요. 아. M은 락을 주로 불러요. 그런 그가 신기하게도 커피 로스팅 공장을 건실하게 운영하더라구요. 모임에서 최고급 원두 한 봉지를 제게 선물로 줬어요. 커피를 내려먹을 장비가 없는 저는 원두 봉지에 뽕 뚫린 작은 구멍으로 커피 냄새만 맡아요. 향이 기가 막히더라구요. 봉지를 버석버석 주무르면 구멍 사이로 빠져나오는 향을 주기적으로 흡입하곤 합니다. 이 얘기를 M에게 해줬더니 커피를 내려먹을 장비를 제게 보내주겠다고 집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네요. 제가 한사코 거절하니 부담갖지 말고 택배는 받고 자기와 밥 한 끼 하자고 하길래 택배도, 밥 약속도 거절했어요. 저는 그의 걸죽한 입담이 꽤 싫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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