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팔자에도 없는 미술을 한다고, 몇 날 며칠째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있다. 번호가 다 적혀있는 그림 바탕에 물감으로 칠하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샀더니, 이게 이게 보통 중노동이 아니다. 가볍게 생각했다가큰코다쳤다. 낮에는 아이들 때문에 색칠하지 못하니, 아이들이 잠든 밤이 되어서야 색칠할 수 있는데, 조금 집중해서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우리 집 둘째 울음소리가 들린다. 방에 가서 아이를 토닥토닥한 다음에 다시 거실로 나와 색을 칠하려고 하면 이미 집중력은 떨어져 붓질은 여기저기 튀어나오고, 눈은 더 침침해져 눈 앞이 흐릿흐릿해진다. 10분 앉았다 잠시 일어나면 허리는 마치 꼬부랑 할머니가 된 듯 펴지지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새집으로 이사 가신 시어머님께 선물로 드리기 위해서다.
평소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으신 어머님은 나랑 아들이랑 같이 만든 해바라기 종이접기 액자를 참 좋아하셨다. 어머님은 가끔씩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들에게 "할머니도 색종이로 해바라기 꽃 접어줘~"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여러 번 듣다 보니 자꾸 신경이 쓰였다.
어머님의 이사날짜가 정해지고, 남편이랑 시동생 부부는 새집으로 이사 가는 기념으로 가전제품을 선물해준다고 했다. 남편은 인덕션, 시동생 부부는 냉장고.
난 마인드가 옛날 스타일이라, 뭔가 마음을 담은 정성스러운 선물을 해드리고 싶었다. 직업이 전업주부인지라 돈으로 무언가를 사드리는 건 어머님도 아예 기대도 안 하실 테니 내 수준에 맞게, 내 형편에 맞게 의미 있는 선물을 해드리고 싶었다.
'요즘 종이 접기에 물 올랐는데 학을 천마리 접어서 드릴까?'
'네 잎 클로버 종이접기 해서 액자에 넣어드릴까?'
'해바라기 꽃 얘기 많이 하셨으니 종이접기 해드리면 좋아하시겠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무래도 종이접기는 좀 궁상맞은 것 같아서, 검색을 해보니 'DIY 해바라기 그림 그리기'가 눈에 딱 띄었다.
'바로 이거구나!'
상세 설명 대충 훑고 상품평 서너 개 보고 구매 버튼 누르니 '품절'이었다.
그때 그만뒀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사람 심리가 품절이라는 글씨를 보게 되면 더 사고 싶은 욕구가 생기니 참 희한하다.
그렇게 며칠을 기다린 후 구매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원래 계획은 어머님 이사 가시는 날, 딱 완성해서 짜잔 하고 드리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다. 해도 해도 진도가 안 나간다. 어머님 이사 가신 지 7일째인 오늘도 미완성이다.
굳이 이렇게 힘들어하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알쏭달쏭 알 수 없는 내 마음이 그냥 하라고 했다.한 번쯤은 진심을 담은 선물을 하고 싶었다.
시어머니라는 존재는 여전히 편한 것보단 불편한 점이 많지만, 이상하게 여자 대 여자, 같은 여자로서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언젠가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전생이 있다면, 그래서 어머님이 내 엄마였다면, 하늘에선 그러겠지.'
"이 바보야, 그렇게 애틋해하던 엄마가 네 눈 앞에 바로 있는데, 눈도 마주치지 못하니!"
이런 생각이 드니 그다음부터는 어머니를 대하기가 한결 편해졌다.
시어머니랑 며느리의 사이는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관계이지만, 그래도 세월이 지날수록 당신의 아들인 내 남편보다 며느리인 나를 더 편하게 대하는 어머님을 보면서한편으론 마음이 흐뭇해지기도 한다.
어떤 날은 절친 만난 듯 수다 떠는 편한 사이이다가도, 또 어떤 날은 처음 만난 것처럼 어색해지는, 참 알다가도 모르는 사이가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인 것 같다.
어떤 날은 잘해드려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말 한마디에 상처 받아 표정관리가 쉽지 않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기에, 당신과 똑 닮은 내 남편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이기에, 이번만큼은 내 진심을 담아 소질에도 없는 붓을 들고 오늘도구석구석 조심히 칠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