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는 이유

일상의 깨달음

by 밝을 여름


주말 아침, 아이들이 깨워서 일어났는데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남편의 카톡이 와있었다. 건강검진받으러 일찍 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주말에 우리 집은 아침 일찍 준비해서 어디든 나가는 편이라, 남편이 돌아오면 곧바로 나갈 생각으로 애들 먼저 준비시키고 나도 오래간만에 꽃단장했다.


애들 아침까지 다 먹이고 나니,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단정하게 차려입은 내 모습을 남편이 보고는 한마디 하였다.


"그 옷은 어디서 났어? 예쁘네?"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칭찬하는 남편 말에 내심 기분은 좋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언니가 준거지."


그러고는 화제를 돌리려고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우리 시장 구경 가자. 애들도 시장 가고 싶다네."


원래는 수동적인 스타일이라, 어디 가자는 말을 잘하지 않는 편인데 오늘만큼은 적극적으로 먼저 얘기를 꺼냈다.

당연히 그것도 흔쾌히 오케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어... 오늘 2시쯤 엄마 집에 소파 들어오기로 했거든. 어디 나가기엔 시간이 좀 애매할 것 같기도 하고..."


난감해하는 남편의 표정을 보는데, 순간 나 또한 표정관리가 안되었다.


'아니, 미리 얘기를 해주던가. 나갈 준비 다 하고, 게다가 오늘은 특별히 꽃단장까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아까운 주말에 또 시댁을 가자고?'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간 괜히 있는 말 없는 말 다 끄집어내어 싸움하게 될 것 같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시댁 갈 일을 만드는 남편이 오늘따라 되게 얄미웠다.


어머님 하고는 잘 지내고 있고 불만도 없지만, 남편이 얄미우니 시댁 관련된 사람은 괜히 다 불편하게 느껴지고 시댁도 가기가 싫어졌다.


표정관리 안된 내 모습을 남편이 보고는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곧바로 대안을 제시하였다.


"엄마 집엔 2시까지 가면 되니까, 지금 빨리 나가자. 시장도 멀지 않고 또 2시간 정도면 시장 구경 충분하니까 빨리 갔다 오자."


이미 마음이 상해있던 터라, 남편이 어떤 얘기를 해도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도 할머니 집에 간다는 남편의 말에 시장 구경은 잊은 듯 시장 말고 할머니 집에 빨리 가자며 성화였다.


난 옷방으로 가 운동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짧게 한마디 하곤 혼자 집을 나왔다.


"운동 좀 하고 올게."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오디오북을 들으며 탄천을 빠르게 걸었다. 오디오북에 집중하려 해도 다른 생각이 자꾸 떠올라 집중할 수 없었다. 기분 전환하려고 하늘도 쳐다보고 심호흡도 크게 해 봤지만, 좀처럼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날씨도 꿀꿀하고 내 기분도 꿀꿀하고.


습한 날씨에 기운 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귀에 꽂은 에어 팟 사이로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내가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를 참지 못하고 전화했나 싶어 씩씩거리며 가방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냈는데, 당연히 남편인 줄 알았던 전화는 다름 아닌 어머님, 시어머니의 전화였다.


평소 전화든, 카톡이든, 문자든, 웬만하면 연락 자체를 잘 안 하시는 어머님인데 그런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오니, 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냉큼 통화버튼을 눌렸다.


"네~ 어머니~"


"어디야?"


"저.. 지금 탄천 걷고 있어요."


"애들은 어쩌고? 아범은 건강검진받으러 갔다며?"


"다 받고 왔어요. 집에 애들하고 같이 있어요. 저 혼자만 운동하러 나왔어요. 2시쯤 소파 들어온다면서요? 시간 맞춰 갈게용~"


"그래~ 아 그리고 애들 먹이려고 삼계탕을 좀 끓였는데, 올 때 너희 먹을 김치 조금 가지고와~ 집에 김치가 다 떨어졌네~"


"넹~ 알겠어용~ 이따 갈게용~"





전화를 끊고, 난 피식 웃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분명 기분이 안 좋았는데,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시어머니의 전화라 기분이 좋아질 일이 없는데, 어머님과의 통화에서, 난 가식적인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친한 친구하고 통화하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심지어 말끝마다 "용용"거리며 애교까지 부렸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는 속담과는 반대로 남편이 미우면 시댁 관련된 사람은 다 꼴 보기 싫어지는데, 방금 어머님과의 통화는 이전과는 다르게 딱딱하지도 사무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서 나 스스로도 놀랐다.


도대체 내 마음에 무슨 변화가 생긴 걸까?

이 더운 날 자식하고 손주들 먹이려고 불편한 팔로 손수 삼계탕까지 끓이셨다니, 어머님의 정성이, 진심이 그대로 느껴져서 일까?


어느덧 결혼 10년 차가 되고 보니, 어머님과의 다름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며느리인 나와는 다르게 당신 아들과 손주들을 향한 그 애틋한 사랑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님과 통화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남편에 대해 안 좋았던 내 마음도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기분이 나아진 채 활기차게 걷고 또 걸었다.

덥고 습하고 우중충한 날씨였지만, 어느새 내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한 시간을 걸어 대형마트에 도착했고, 난 곧바로 서점이 있는 3층으로 향했다.

법륜스님의 책이 눈에 바로 띄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겼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화가 나는 이유

화가 나는 이유를 잘 살펴보면
'내가 옳다 '는 생각이 마음 깊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런데 잘 살펴보면
화를 낼 만한 상황이라는 기준 자체가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각자 살아온 환경과 그 안에서 축적된 경험,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가치관에 따른 것이니까요.
말로는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 생각이고, 내 취향이고,
내 기준에 불과합니다.
화가 난다는 건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내 분별심(판가름)때문입니다.
사사건건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습관이
내 안의 도화선(마음의 습관)에 자꾸만 불을 댕기는 겁니다.

<법륜스님 '지금 이대로 좋다' 중에서>


글을 쭉 읽어 내려가는데, 복잡했던 내 마음이 한순간에 스르르 녹아내리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머리로 읽지 않고 마음으로 읽어서인지, 무슨 말인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오늘 내가 겪은 이 복잡하고 기분 나쁜 감정, 즉 화가 나는 이유를 법륜스님은 책에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마지막 구절을 읽고 책장을 덮으려는데, 가방에서 진동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을 보니, 이번에는 남편의 전화였다.

남편은 어디 있냐고 묻더니, 비가 온다며 내가 있는 곳으로 차를 끌고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집 나올 때의 찬바람 쌩쌩 불던 모습이 아닌, 나긋해진 나의 태도에 남편도 기분이 더 좋아진 듯 상냥하고 다정하게 얘기했다.


난 그렇게 발걸음 가볍게 어머님 집으로 가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어머님이 만든 삼계탕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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