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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
평소 목소리가 작은 민경이 날카롭고 큰 소리를 냈다.
“이크!”
땅에 발을 딛자마자 휘청하던 오석이 조심하라는 민경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놀라 오히려 제대로 넘어질 뻔 했다.
“왜 그래? 놀랐잖아?”
오석이 힐난하는 눈빛으로 돌아보자 민경이 사슴같이 눈을 뜨고 두 손을 가볍게 비볐다.
“미안. 너 휘청 하길래.”
“너무 오래 앉았다 일어나니까 쥐가 살짝 났어.”
“그러게. 한 시간 반은 너무 심했다. 청평 가는 시간보다 상봉동 가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거 아냐?”
“청평이 뭐야? 그 시간이면 춘천까지도 갔겠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오석은 과대표 동성에게 87학번 MT는 꼭 가겠다고 약속했고, 마침내 그 날이 왔다. 동성은 MT 장소를 청평 안전유원지로 정했으니 상봉터미널에서 집합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같은 동네 사는 민경이 상봉 터미널 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
선릉역 근방에서 상봉터미널 까지는 꽤 먼 길이라 혼자 가기 심심하다는 것이다. 오석 역시 혼자 가는 것 보다는 같이 가는게 덜 지루할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상봉 터미널에 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 가서 70번 시외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이다. 오석은 이 방법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복잡한 잠실 사거리 정류장에는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서 아수라장을 이루기 때문이다. 유니버설 발레단 공연 보러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갈때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다른 하나는 17번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다. 이 노선은 굴곡이 심하기로 악명높은 노선이라 거의 Z자의 연속이라고 해도 될 정도이긴 하지만 어쨌든 갈아타는 귀찮음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두 번째를 선택했다. 하지만 완벽한 실수였다. 역삼동에서 상봉동 까지 한 시간 반이나 걸릴 줄은 몰랐다. 굴곡 노선이란 것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건 인내의 한계를 넘었다. 버스는 이리 돌았다 저리 빠졌다 해 가면서 서울 구석구석을 강제로 유람시키며 지쳐 쓰러질 정도가 되어서야 그들을 상봉동에 떨궈 주고 갔다.
하지만 이미 집합 시간에 20분이나 늦은 상태였다. 민경은 늦었거나 말았거나 태연한 모습이지만 오석은 등판에 땀이 날 정도로 초조했다. 그렇다고 민경의 손목을 잡고 억지로 뛸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민경의 박자에 맞춰 타일로 성의 없이 외장을 마무리한 상봉동 버스 터미널 대합실에 느긋하게 들어서자 쪼그리고 앉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모습의 동성이 보였다.
동성이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야! 너희 기다리다 망부석 될 뻔했다.”
“미안해. 버스를 잘못 탔어.”
“뭐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청평 가는 버스 자주 있으니까 아무 거나 오는 대로 타면 되. 어쨌든 오석아 엠티 안 빠져서 고맙다.”
“약속했으니까.”
“그래. 약속은 약속이지. 오해한 거, 미안하다.”
동성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오석은 까닭 없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미안할 거 없어.”
그러자 민경이 끼어들었다.
“오석이는 부끄럼쟁이야. 입학 첫날 내 얼굴도 똑바로 못봤다니까?”
“아, 그런 얘기는 왜 해?”
“어머, 골 내는 거 봐.”
민경이 오석의 모자 챙을 꾹 눌러 눈까지 덮이게 만들어 버렸다.
“야, 주민경, 너.”
이 때 하얗고 자그마한 손이 눈 앞에 나타나 모자를 원래대로 만들어 주었다. 눈을 가리던 모자가 치워지자 오석을 올려다보는 수현이 얼굴이 나타났다.
“아, 수현아. 안녕. 늦어서 미안.”
“괜찮아. 어차피 빨리 가고 싶어 안달 난 것도 아닌데. 너, 동성이 약속 지켰으니까 나하고 한 약속도 알지? 그거 아니면 나 엠티 오지도 않았어.”
“약속? 아, 그거. 응.”
오석은 대답은 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부담이 생겨 마음이 무거웠다.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그리고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니? 하지만 약속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당사자가 저렇게 진지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지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까?
수현에게 엠티 가서 분위기가 좀 이상해진다 싶으면 둘이서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이건 지켜도 문제, 안 지켜도 문제다. 약속 대로 계속 수현과 단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면 도대체 엠티에 간 의미가 없고, 과 친구들 모두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다들 기타 치고 손뼉 치며 대학생의 필수 교양이라도 되어 버린 데모가를 부르고, 재훈이 같은 녀석 침 튀기며 데모 이야기하고, 또 학회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논다면? 그 흔해 빠진 님을 위한 행진곡은 커녕 아침이슬조차 모르는 오석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이물질이 되어 버릴 것은 시쳇말로 안 봐도 비디오였다. 과연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자. 모이자.”
동성의 목소리가 오석의 고민 회로를 일단 판단정지 시켰다. 친구들이 어슬렁 어슬렁 모이자 동성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굴리며 숫자를 세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영이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못 온다 했고, 오석이 민경이 방금 왔으니까 이제 올 사람은 다 온 거야. 그럼 이제 출발할까?”
동성이 긴 다리로 성큼 성큼 승강장으로 가자 나머지 학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마치 교사 줄줄 따라가는 커다란 유치원생들 같은 모양이다.
금요일 오전이라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청평-가평-춘천’ 이라고 적혀 있는 버스에는 열 아홉 명이나 되는 일행이 다 들어간 다음에도 여전히 빈자리가 절반 가까이 남아있었다.
오석은 빈 좌석 하나를 골라서 앉았다. 그런데 하필 안전 벨트가 좌석 틈바구니에 박혀 아무리 힘을 써도 빠지지 않았다. 다른 자리로 가려고 일어서는데 하필 수현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 옆에 앉으려는 찰나였다.
모양이 이상해졌다. 오석은 자신을 노려보는 수현의 얼굴에 새겨진 ‘당황’ 두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왜 그래? 내가 옆에 오는 게 싫어?”
“아니야. 절대 아니야. 사실은 안전 벨트가 고장 나서.”
“너도 참.”
“너도 참 이럴 일이 아니야. 지킬 건 지키고 살자. 자리 많으니까 안전벨트 멀쩡한 데로 옮기자.”
“알았어. 지켜서 손해 보는 건 아니니까.”
수현이 배낭을 들고 쪼르르 오석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오석은 풍경이 보이는 창가자리를 수현에게테 양보하고 통로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가 망우리 고개를 넘어 경춘 가도로 접어 서자 오석의 입에서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이같은 긴 숨이 뿜어져 나왔다.
“뭐가 그렇게 좋아?”
“3년 넘게 수학여행 말고는 서울 밖으로 나가 보질 못 했어.”
“그럼 뭐 했는데?”
“짱 박혀 공부만 했지 뭐. 공부 지겨워 지면 시 쓰고 음악 듣고. 시, 음악. 내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어. 바깥 공기가 너무 그리웠다고.”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똑 같아. 어차피 여기 애들 거의 다 그럴 걸? 남자 애들, 괜히 수컷 냄새 풍겨 보려고 껄렁 대는 흉내 내지만 다들 시키는 대로 또박또박 따라하던 모범생들이었을 거야. 차라리 얌전한 모범생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네가 더 용감한 거야. 괜히 분위기 따라 허세부리는 애들보다.”
“그럴까? 정말 그럴까? 나만 이런 게 아니고?”
“오석아. 너 서울대학교 다니는 남학생들, 특히 지방 애들 특징이 뭔지 아니?”
“뭔데? 촌스러움? 고집?”
“자기가 모범생 아니었다고 말하는 거.”
“음. 듣고보니 정말 그러네. 왜 그러는 걸까? 난 지방 애들은 원래 좀 거친가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좀 논 걸로 보이고 싶은 마음? 나 샌님 아니고 숫컷이다 뭐 이런? 난 공부 열심히 안하고 놀면서도 여기 들어왔다 이런거. 더구나 우린 서울대에서도 꼬랑지잖아? 그러니까 핑계가 필요하잖아. 모범생처럼 열심히 했으면 법대도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좀 노느라 여기 왔다. 이런. 근데, 이게 말이 돼? 순도 100%의 모범생 아니고선, 이 학교 들어오기는커녕 원서라도 낼 수 있었을 것 같아? 더구나 시골에서 없는 살림들에? 걔들 아마 너 보다도 훨씬 지독한 공부 벌레들이었을 거야. 다만 지금 집 나와 사니까 기회는 이때다 하는 거지 뭐. 데모도 하고 또 금지된 책도 보고 금지된 노래도 듣고 부르고. 처음에는 선배가 하는 말 거역할 용기가 없어서 뭔지도 모르고 따라하다가 나중에는 뭐라도 된 것처럼 겉 멋 들려서 나라를 구하네, 민주주의가 어쩌네. 솔직히 말하면 선배는 가깝고 교수는 멀리 있으니 결국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모범생 버릇 대로.”
오석은 수현의 이런 냉소적인 말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달리 할 말이 없어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수현의 대답은 단호했다.
“응.”
“그렇구나. 넌 학생운동을 일종의 청소년 일탈처럼 보는 것 같다.”
“응. 지금은 너도 나도 또 데모 하는 애들도 모두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졸업하고 나면 분명 후회할 거야.”
“확신해?”
“응.”
“어떻게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주변에 청춘을 허송 세월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후회하는 언니 오빠들 많이 봤으니까.”
“난 전혀 몰랐어. 내가 맏이고 또 친척 중에도 대학생은 내가 처음이라. 그럼 이 4년을 어떻게 보내야 청춘을 허송세월 하지 않을까?”
“나도 몰라. 뭐 아직 우린 어리니까 살아가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아음.”
수현이 기지개를 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려 하품을 했다. 오석은 수현의 얼굴이 보는 각도에 따라 아이같기도 어른같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 순간에는 정말 아이같아 보였다.
수현이 오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오석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국민학교 졸업한 이래 여자애랑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마주 댄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어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여 봤다. 수현의 머리카락이 뺨에 닿았다. 살짝 간지럽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그 기분이 너무 좋다. 오석은 손을 살짝 뻗어 수현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계속 주저했다. 실행과 주저 사이에 씨름이 벌어지면서 엄청나게 많은 심리 에너지가 소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