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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기와 얽힌 기억이 떠오르자 수현은 오석의 옆자리에 앉지 못한 것이 아쉽다 못해 화가 났다. 그 반응은 가방을 옆에 있는 빈자리에 올려 놓는 것이었다.
공연한 심술이다. 내가 오석이 옆자리에 앉지 못했으니, 내 옆에는 누구도 앉히지 않으리라, 이런 유치한 마음이다.
이 때 강의실 앞에 서 있던 위험 인물 동성이 주변을 쓰윽 둘러본다. 훤칠한 키, 부리부리한 얼굴, 묵직한 바리톤 목소리, 깍듯한 매너로 같이 집회 가자, 시위 가자, 이러며 사람들을 설득하는 위험 인물.
그 동성이 묵직한 바리톤 음성을 내 던졌다. 강의실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알림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오후 두 시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총 학생회장 선거 유세가 있습니다. 이번 수업 끝나면 다 같이 모여서 내려갑시다. 모두 함께 가서 힘찬 투쟁의 말씀을 들읍시다. 다들 갈거지?”
수현의 얼굴이 잠깐 찌푸려졌다. 어쩐지 올라오는 길목 마다 온갖 지라시가 도배되어 있더라니 요즘이 총 학생회장 선거운동 기간이었구나.
학생회장.
맙소사. 이 말 때문에 수현은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고, 지우고 싶지만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고통스럽고 모멸스러운 기억을 소환해야만 했다.
눈 앞에서 학생주임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오수현. 이거 네가 했냐?”
노려보던 학생주임의 매서운 눈초리와 뇌를 쥐어 짤 것 같은 목소리가 고스란히 되살아 났다.
“네? 무슨 말씀이신가요?”
수현은 사슴 눈을 뜨고 반문했고, 그 순간 사정없이 날아오던 손바닥. 이른바 귀 싸대기. 그리고 그 앞에 던져진 파리한 종이조각.
종이조각 위에는 이 세 글자가 박혀 있었다.
‘진술서’
그리고 그 옆에 종이 뭉터기 하나가 툭 던져졌다. 손글씨를 복사한 유인물이었다.
유인물에는 너무도 선명한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80년 광주 5.18 학살의 진실을 알려 드립니다’
그 아래 깨알같은 손글씨들.
수현은 그제야 무슨 일인지 알아챘다.
몇몇 친구들이 어디서 광주 비디오를 보고 그야말로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렸다. 그 친구들은 자기들 끼리 화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어디서 얻어왔는지 모르겠지만 ‘광주의 진실’ 이런 제목의 유인물을 수백부 만들어 화장실, 탈의실 같이 선생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렸다. 여고지만 교사 대부분이 남자라 그 두 장소는 교사 눈을 피할 수 있는 사각 지대였다.
하지만 그 친구들이 너무 욕심을 부렸다. 유인물을 복도 벽에 게시까지 했다. 학교가 왈칵 뒤집혔다. 선생들은 누가 유인물을 뿌렸는지 눈이 벌개져서 찾으러 다녔지만 이미 뿌릴만큼 뿌리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그 친구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마침내 학교측은 당시 학생회장을 족쳐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 그리고 그 학생회장이 바로 수현이었다. 더구나 그 유인물의 글씨체가 수현의 글씨체와 비슷하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결국 수현은 학생부에 불려가서 취조 아닌 취조를 받았고, 징계받을 위기에 몰렸다.
수현 하나 징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교사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자식 과외공부 시켰다고 공무원 모가지가 날아가고 자식도 퇴학당한 사건이 있었다. 딸이 학교에서 불온 인쇄물을 살포한 주동자라면 교사 모가지 하나는 우습게 날아갈 것이고 그러면 여섯 식구가 길바닥에 나 앉게 된다.
수현은 상황이 이 정도쯤 되면 유인물 뿌린 친구들 -수현은 그 아이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이 와서 자수할 것이라 생각했다. 정의를 위해 나선 아이들인데 다른 친구가 누명을 쓰고 인생을 망치게 생겼는데 그걸 모른 척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끝내 침묵했다.
수현도 꼭지가 돌았다. 자기들이 정의를 구현한다면서 일을 저질러 놓고 그 댓가를 엉뚱한 사람이 치르게 한다고? 그러면서 침묵한다고?
귀싸대기가 얼얼하다 못해 쓰라렸다. ‘내가 맞을 매가 아니었어. 내가 받을 징계도 아니야.’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희생할 이유는 없어. 위선자들.’
결국 수현은 광주 비디오를 보고, 유인물을 돌렸던 친구들에 대해 학생주임에게 소상히 털어 놓았다. 덕분에 징계 위기에서 벗어났고, 진범이 잡혀서 모질게 얻어맞고 정학 처분을 당했다.
하지만 수현은 학교가 아닌 학생들의 징계를 받았다. 날마다 책상에 누가 써놓고 갔는지 모르는 쪽지가 붙었다.
“배신자.”
“비겁한 년.”
책상뿐 아니라 잠깐만 자리를 비우면 교과서, 공책에도 누군가가 저런 낙서를 했다.
그때부터 수현은 친구니 우정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기로 했다. 학교 선생이라는 족속에게는 아예 만정이 다 떨어졌다.
“미안하다. 선생들이란 사람들이 원래 이렇다.”
학교에 불려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던 아버지가 수현의 뺨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손바닥 흔적을 어루만지며 울먹였다.
청승맞다.
이런 옛날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만 눈물 몇 방울이 뚝 떨어졌다.
싫다.
수현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정말 싫다.
“에이. 아직도 최루탄 냄새 나.”
얼른 최루탄 탓을 하며 눈을 비볐다.
그러는 동안 교수가 들어왔다.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남은 머리는 온통 잿빛인 교수가 뭐라고 뭐라고 열심히 떠들어 대며 수업을시작했다.
그냥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다른 친구들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교수 자신도 학생들이 알아들었는지 말았는지 아무 관심 없어 보였다. 그저 주어진 시간, 주어진 분량의 교재를 읽다가 나갈 궁리가 뻔히 보였다.
수현은 강의 교재 대신 C언어 교재를 펼쳐 놓고 교수 목소리를 백색 소음 삼아 나름의 공부를 시작했다. 어차피 전공 공부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열심히 공부할 생각도 없었다. 수현은 독일 문학은 물론 문학 자체에 관심이 없었고, 교육에 관심은 커녕 평생 알바나 뛰며 살았으면 살았지 교사든 강사든 가르치는 일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
대학 수업은 학점이나 그럭저럭 받을 정도면 충분했다. 필요로 하는 것은 대학에서 뭔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서울대학교 졸업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현도 안다. 여자가 교직이 아닌 다른 직장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남자는 서울대 졸업장이면 학과나 전공 따지지 않고 무조건 취직이지만 여자는 반드시 거기에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프로그래밍 언어를 알파로 선택했다. 처음에는 파스칼을 공부했다. 그리고 포트란과 코볼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공대 다니는 언니 남자 친구가 미래는 C언어라고 해서 다 엎고 새로 공부를 시작했다. 수현이 오석과 같이 8열람실에서 주로 하는 공부도 전공이 아니라 프로그래밍 언어와 TOEFL이었다.
굳이 사범대학을 온 까닭도 순전히 등록금 때문이었다. 교사 혼자 벌어 네 자식 다 대학 보내는 게 보통일이 아닐 것이니까. 물론 아버지한테는 그렇게 말 안했다. 그럼 가장으로서 자존심 너무 상할테니.
수현은 자신의 가정이 겉 보기에만 그럴듯한 중산층이지 실제로는 빈곤층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 월급이라고 해 봐야 뻔하다. 외곽이긴 하지만 어쨌든 서울에 여섯 식구 살수 있는 집 한 칸 마련한 것이 아버지로서는 할 수 있는 최대치였을 것이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본인 능력 이상을 했다.
더구나 언니가 등록금 비싸기로 유명한 이화여대를 갔다. 그래서 수현은 무조건 등록금 싼 대학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등록금이 절반인 서울대학에서도 다시 절반인 사범대학은 이런 처지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합격선 맞추다 보니 독어교육과가 걸렸을 뿐이다.
아버지는 왜 하필 사범대학이냐며 말렸지만 수현은 등록금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점수 맞춰 안전지원 하는 거라고 안심시켰다. 절대 발령 따위는 받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자 아버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렇다 쳐도, 선생 사위는 보고 싶지 않다. 연애는 사범대 말고 다른 데 애들하고 해라.”
“아빠는 무슨. 합격도 하기 전에 연애 타령부터 해?”
대충 이렇게 얼버무렸다.
이런 생각을 하며, C언어의 라이브러리 개념에 대해 한창 공부하다 보니 수업이 끝나버렸다.
“자. 아크로 가자.”
교수가 나가자 동성이 손짓 하며 일어섰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비적비적 일어서서 동성을 따라 나가기 시작했다.
오석이 수현을 보며 눈 짓으로 “어떻게 할까?”하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수현은 가만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다른 학생들이 다 나간 다음 천천히 나가면 될 일이다.
“오석이. 니는 안 갈 끼가?”
하지만 곽재훈이 오석을 그냥 두지 않았다. 오석이 데모 판에 뛰어들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되었는데 굳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수현이 보기에 저건 순전히 꼴 보기 싫어 괴롭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뭐가 그렇게 꼴 보기 싫을까? 물론 오석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긴 했다. 다른 아이들이 고등학교 때 부터 계속 입었을 점퍼를 입고 다닐 때, 오석은 대학 들어오면서 새로 맞춘 것으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블레이저 자켓을 그것도 여러 벌을 요일마다 바꿔가며 입고 다녔다. 물론 거기 맞춰 신발, 가방도 여러 개를 돌려가며 사용했다.
수현이 확인한 신발만 해도 운동화가 나이키 하나, 프로스펙스 하나, 캐주얼 슈즈로 랜드로바 하나 엘칸토 하나, 그리고 정장 구두까지 다섯 켤레였다. 늘 워크맨으로 음악을 들으며 다녔는데 운동화를 신고 올때는 삼성 마이마이, 캐주얼 슈즈를 신고 올때는 파나소닉 워크맨을 사용했다.
수현은 워크맨이 없다. 과에서 워크맨이 있는 학생은 네 명 뿐이다. 그 중 두 개 이상 쓰는 학생은 오석과 민경 뿐이다. 마이마이만 해도 지하철을 1년 내내 타고 다녀도 될 정도의 돈인 75,000원이고 파나소닉, 소니 이런 것들은 10만원이 훌쩍 넘으니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오석은 그 비싼 워크맨으로 듣는 음악도 전부 클래식이다. 얼굴도 여자인 수현이 부러워할 정도로 하얗고 피부도 곱다. 같은 과 다른 남자 아이들과 너무 달라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아이 같다. 서울 출신인 그리고 어쨌든 중산층인 수현에게도 낯설게 느껴졌으니 지방 출신에 중산층에 미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보낸 학생들이 고깝게 보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오석 본인은 정작 재훈이 자신을 괴롭히고 자꾸 시비건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갔다.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그라지 말고 한 번 가서 들어 봐라.”
“싫어.”
“와? 데모하자 그럴까 겁나나?”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하여간 안되겠어. 너희들이나 가서 많이 보고 들어.”
그런데 뜻밖에도 민경이 끼어들었다.
민경이 오석이 손목을 살짝 잡아당기며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석아, 가자.”
오석이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꾸 수현에게 구원의 눈빛을 던졌다. 수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 모양으로 “안 돼!” 를 강하게 만들어 보였다.
그 신호를 받은 오석이 민경이 손을 부드럽게 풀어 내렸다.
“아이, 오석아아!”
민경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이때 별안간 곽재훈이 민경의 어깨 위에 손을 턱 얹더니 거친 목소리를 던졌다.
“치아라. 억지로 데려가면 뭐하노? 고마 우리끼리 가자.”
아, 그랬구나.
수현의 머리 속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있었다. 알았다. 재훈이 왜 자꾸 오석에게 은근히 시비를 걸며 거칠게 구는지 그 이유를.
‘어쩜 좋아? 재훈이 저 놈. 민경이한테 관심 있었네?’
수현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잠시 호흡을 멈추어야 했다.
재훈이 말로는 맨날 부르주아가 민중을 착취하니 어쩌니,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느니 어쩌니 하더니 막상 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어느 모로 보나 강남 여학생 티가 물씬 풍기는 부르주아 2세 민경에게 마음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민경 주변에는 재훈 뿐 아니라 평소 급진적인 발언 잘 하는 남학생들이 마치 날벌레 처럼 주위를 맴도는 것이 눈에 띄곤 했다. 어쩌면 민경이 학회도 열심히 참석하고, 교내 집회나 시위에도 자주 참가하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몰랐른다. 남학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민경은 재훈에게 끌려가다시피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를 들으러 갔다.
수현은 민경의 저런 점을 이해할 수 없었. 민주주의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 운동권 이론이 결국 민경네 같은 계층을 타도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어중이 떠중이 다 같이 나눠 먹자는 것 아닌가? 뻔히 보이는대 그걸 왜 모를까?
어쨌거나 마침내 수현은 원하는 대로 강의실에 오석과 둘만 남게 되었다.
오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뭐하지?”
“총학 유세 한다면 어차피 시끄러워서 도서관에 가도 공부 안 될 거고. 일단 나가자. 어디 교외라도 나갈까?”
오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는다.
“미안해. 그럴 기분이 아니야.”
이럴 수가. 거절이라니?
수현의 눈이 번쩍 커졌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그 동안 오석은 수현이 하자는 것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오석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현을 따라 갈지 저들과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를 들으러 갈지 망설인 것이다. 수현은 그 망설임의 원인이 어쩌면 민경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그 생각이 기분 나쁘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자신 때문에 더더욱 기분 나쁘다.
일단 강의실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복도 바닥을 차곡차곡 밟아가며 9동과 11동 사이의 잔디밭으로 나섰다.
이런. 충분히 시간 보내고 나서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유세 보러 간다고 먼저 나갔던 아이들이 아직 안 가고 거기에 모여 있었다.
문무대 퇴소하던 날에 이어 두번째로 딱 걸린 꼴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곽재훈이 버럭질을 시작했다.
“결국 둘이 데이트하려고 그랬던 기라? 그래 잘 해 봐라. 내 참 눈꼴 시려서.”
“흥분하지 말고 가만 있어. 재훈아.”
이번에도 동성이 펄펄 뛰는 재훈이를 눌러 앉혔다. 그리고 오석과 수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정말 안 갈 거야?”
“응.”
오석이 주저하고 있는데 수현이 먼저 나서 단 칼에 자르듯 대답해 버렸다.
“할 수 없지. 이건 그렇다 치고 그럼 다른 부탁이나 하자.”
“무슨 부탁?”
“이런 건 어쩔 수 없다 치고, 그렇다면 정치성 없는 다른 과 모임에는 함께 참여해 주었으면 해.”
“그런 게 어떤 모임인데? 그런 게 있기는 해?”
수현이 계속 따져 물었다. 하지만 동성의 목소리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다.
“87 학번 끼리 야유회를 간다거나, 엠티를 간다거나 하는 경우 말이야.”
“그런 모임은 안 빠질게.”
수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오석이 불쑥 대답했다.
“약속하지?”
“약속해.”
“좋아. 믿을게. 얘들아. 우린 아크로로 가자.”
동성이 과 친구들을 이끌고 중앙 도서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들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가다가 마침내 수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마자 수현이 눈을 위로 치켜 뜨며 오석을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봐?”
“그런 약속을 덜컥 하면 어떡해?”
“같은 과 동기들인데 언제까지 모른 척 하며 대학 생활 할 수는 없잖아?”
오석이 살짝 골을 냈다. 이상한 날이다. 거절을 하지 않나, 골을 내지 않나,
수현이 마치 세상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어른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학생회관 가서 동아리들 이름 한 번 봐. 철학 연구회, 민요 연구회, 기독교 학생회 등등 참 다양하지? 있을 게 다 있는 것 같지? 그런데 다 똑같아. 결국 다 운동권 써클이야. 이런 시국에 친목모임 따위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캠프파이어 하고 논다고 쳐. 그때 무슨 노래 부를까? 다들 신나게 목청 높여 운동가요니 민중가요니 부르며 놀고 있을 때 넌 뭐 하고 있을래?”
“미안해. 거기 까진 미처 생각 못했어.”
“미안할 건 또 뭐니? 기왕 이렇게 된거, 너만 보낼 수 없으니 나도 갈게. 애들 데모가 부르며 놀 때, 또 재훈이 같은 애가 흥분해서 계속 정치타령 하면 분위기 봐서 슬쩍 피하면 돼. 만약 분위기 그렇게 되면 우리 둘만 살짝 빠져서 따로 노는 거야. 어차피 그 쯤 되면 다들 꽐라되서 누가 어딨는지 관심도 없을거야. 너 약속 잘하니까 나 하고도 약속해. 그럴 거지?”“응. 약속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