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1987년 1부 봄 13화 권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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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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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멈추었다. 창 밖에 청평 정류소라는 간판이 보였다.

오석은 너무 허름한 풍경에 깜짝 놀랐다. 청평이라는 지명은 워낙 자주 들어 보았고, 또 명색이 직행버스 주요 경유지라 그럴듯한 터미널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버스가 한바퀴 돌아 나가는 정류소에 불과했다.

“자, 내리자.”

동성이 손뼉을 치며 모두를 일으켰다.

학생 열 여덟명이 우르르 내리자 버스는 시골 노인 몇분만 탄 거의 빈차가 되어 가평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이쪽으로.”

다들 동성이 이끄는 대로 병아리마냥 졸졸 따라갔다.

그렇게 10분 정도 따라가다 보니 ‘안전 유원지’라는 표지판이 나오고, 조금 더 지나자 같은 이름의 간판이 걸린 아치가 마치 사찰 일주문 같은 서 있었다. 아치 아래를 지나자 방갈로와 민박집들이 줄줄이 들어선 넓은 터가 나타난다.

방갈로와 민박집 사이 사이에는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는 장작더미, 족구를 할 수 있는 네트 등이 보이고, 건너편에는 한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개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물이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반짝이는 잔물결이 마치 은 비늘을 가진 물고기 떼가 뛰어노는 것 같다.

동성이 여러 방갈로들 중 비교적 상태가 좋아 보이는 큰 방갈로 앞에서 멈춰섰다.

“여기가 우리 숙소야. 회비가 부족해서 큰 방 하나 밖에 안 잡았어. 아니 못 잡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오늘 밤은 음. 이런 표현 미안하지만 집단 혼숙이야.”

동성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했지만 학생들은 그저 혼숙이라는 말이 재미있어 웃음보를 터뜨렸다.

“나, 보트 태워줘.”

한바탕 웃고 있는데 수현이 오석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더니

강물- 오석은 나중에 그게 강이 아니라 조종천이라는 것을 알았다-에 유유히 떠 있는 보트를 가리켰다.

“그래. 재미있겠다.”

그러나 수현은 오석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선착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오석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뒤를 다른 친구들도 와아 소리 내며 따라갔다.

선착장에 가 보니 30분에 500원이라는 적지 않은 요금을 받고 보트를 대여하고 있다.

“500원이면 솔이 한 갑이잖아?”

벌써 담배를 배운 녀석 몇몇이 담배 한 갑 값이라며 투덜거렸다.

오석도 30분에 지하철 세번 타는 값이라면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담되는 돈은 아니라 일단 주저없이 보트를 빌렸다. 오석이 수현을 보트에 태우고 노를 저어 출발하자 다른 친구들도 결심이 섰는지 짝을 지어 보트를 빌리기 시작했다.

보트는 오석이 처음 생각했던것과 많이 달랐다. 처음 보트에 오를때는 수현과 보트 위에 마주앉아 두둥실 떠 있으면 꽤 한가하고 낭만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로맨틱한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장면이기도 했다.

막상 타 보니 현실은 그렇게 한가하지도 몽환적이지도 않았다. 난생 처음 잡아보는 노라 배를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힘도 훨씬 많이 들었다. 노를 한 번 저을 때 마다 손바닥에서 불이 나는 것 같고, 평소 자주 쓰지 않던 흉근과 배근이 경련을 일으킬 것 같았다.

심지어 유유하게 가만 떠 있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 넓지 않은 보트장에 한꺼번에 보트 일곱대가 움직이다 보니 곳곳에서 잔 물결이 일어 보트는 고요하게 떠 있는 대신 계속 출렁거렸다.

그런데 마주 앉은 수현을 보니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배 앞전에 다리를 모으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자세로 다소곳이 앉아 있다. 오석은 어떻게 그렇게 있을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정적인 자세로 마주보고 앉아 보니 수현의 몸가짐이 정말 단정하다는 것이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앞에서 보면 완벽한 I자, 옆에서 보면 완벽한 S자. 선생님 딸이라 그런가?

수현이 등을 지고 있는 배경도 너무 좋았다. 조종천, 호명산 그리고 조종천에 비추인 호명산의 그림자가 함초롬한 모습의 수현의 등 뒤에서 마치 모나리자 뒤의 풍경처럼 아른아른거리고 있었다.

“와, 그림같아.”

마침내 오석이 한 마디 꺼냈다.

“내가? 풍경이?”

“풍경 속의 네가.”

“아무 말도 안하고 노만 젓고 있더니, 그래도 한 마디 꺼낸게 그나마 마음에 드는 말이라 다행이네.”

“난 말은 양보다 질이야.”

“난 박리다매, 규모의 경제라도 상관 안해. 계속 말해 줘.”

“너를 정면에서 이렇게 오래 본 건 처음이야.”

“소감은?”

“예뻐.”

“빈 말 아니지?”

“아니야.”

실제로 오석은 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작업성 말 할 주변머리도 없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정면으로 수현의 얼굴을 오래동안 본 것이 처음이라는 것도, 그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예뻐 보인 것도 모두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사실 오석은 처음 볼 때부터 수현이 예쁜 얼굴을 가졌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피부가 곱고 눈썹이 짙고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눈동자가 짙고 반짝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해서 때때로 어린이처럼 보인다는 것이 약점이라면 약점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단정하게 앉아있는 자세에서는 수현의 장점인 윤기있는 피부와 짙은 눈썹과 선명한 눈동자는 두드러지고 키가 작다는 약점은 오히려 완벽하게 감추어졌다.

오석은 순간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이런 생각을 떨쳤다. 오석은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 즉 육체적인 욕망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석 자신도 수현의 키에 대해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 평균 신장에 조금 못 미치는 주제였으니 말이다. 오석은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수현과 마주 앉아 영혼의 창이라 불리는 그 맑고 선명한 눈동자를 바라보는 시간이라면 그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공감하고 싶었다.

순간 수현이 뭐라고 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석은 보트를 타고 왁자지껄하는 다른 친구들 소리, 그리고 14개의 노가 물을 때리는 소리 때문에 전혀 듣지 못했다.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독어교육과 87학번 20명 중 여학생이 6명 뿐인데, 하영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끼리 탑승한 보트가 몇 척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자끼리 탑승한 보트들은 누가 남자 아니라고 할 까봐 그러는지, 보트장을 한산도 앞바다 내지는 트라팔가로 착각해서 그러는지 보트끼리 서로 부딪쳐가며 거칠게 놀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와 탑승한 보트에 대한 시샘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소란 속에 안 그래도 차분하고 낮은 톤으로 말하는 수현의 목소리가 들릴리 없었다. 오석은 한 손을 귀에 대고 다른 손으로 수현이를 가리킨 뒤 고개를 가로 저어 들리지 않는다는 제스쳐를 열심히 취해 보였다.

그 모양이 그렇게 웃겨 보였는지 수현이 웃었다. 그 또래 여자 아이들이 하듯이 까르르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의성어가 “후후후.”가 아닐까? 그렇게 한 바탕 웃은 뒤 수현이 웃음기 가시지 않은 얼굴로 오석을 바라보며 계속 입모양으로 뭐라고 뭐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오석은 도무지 입 모양을 읽을 수 없다. 사실 알아 볼 필요도 없었다. 수현의 웃는 얼굴과 입술이 꼬물 꼬물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까.

이렇게 마주 앉아 수현의 반짝이는 웃음을 바라볼 수 있다면 30분이 아니라 3시간이라도 노를 저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은 마음일 뿐, 30분이 다가오자 팔근육에 알이 박히고 무엇보다 하얗고 부드러운 오석의 손바닥이 더 이상의 노동을 견디기 힘들다는 신호를 보냈다. 여기서 노를 더 저었다간 손바닥에 물집이 잡힐 판이다. 시간 연장은 커녕 30분을 다 채우는 것도 어려웠다.

다른 친구들이라고 딱히 오석보다 더 육체 노동에 익숙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다 서울대학교 책상물림 샌님들 아니겠는가?

특히 해전을 벌였던 남학생들은 이미 탈진 상태로 보였다. 결국 30분이라는 임대 시간을 다 채운 보트는 한 척도 없이 모든 보트가 속속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전멸인 셈이다. 오석은 그나마 오래 버틴 편이었다. 체력이 더 좋아서라기 보다는 수현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어서였다.

사실 훤칠한 동성을 제외하면 오석을 포함한 남학생들의 신체는 하나 같이 서울대 남학생 표준형이었다. 작은 키, 얇은 팔, 조금 굽은 어깨의 조합들. 오랜 시간 노를 저을 수 있는 몸들이 아니다. 다들 뭍에 오르자 마자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여기 저기 등판에서 땀이 증발하며 모락모락 아지랭이를 이루고 끙끙거리는 소리가 아카펠라처러 들렸다.

“얘들아. 다른 일정 생략하고 바로 밥 먹을까?”

역시 동성은 리더답게 상황 파악이 빨랐다. 족구고 배구고 그냥 다 생략했다.

당연히 모두 동의했다. 그리고 다들 나름 준비해 온 식재료들을 끄집어 냈다.

하지만 오석이 배낭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내자 모두들 입을 떡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오석의 배낭에서 20 명이 배 불리 먹을수 있을 정도의 쇠고기가 불판 위에 올리기만 하면 바로 불고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잘 다듬어진 상태로 나왔기 때문이다.

오석 어머니의 솜씨였다. 어머니는 오석이 국민학교 다닐 때 부터 소풍이나 학교 행사가 있으면 꼭 학급 전체에게 크게 음식 턱을 냈는데, 이게 대학생 학부모가 되어서도 이어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선생님 도시락이 없다는 것, 그리고 조리가 다 된 음식이 아니라 스스로 해 먹는 재미를 느끼게 반쯤 다듬어진 재료 상태로 제공했다는 것.

“와우! 어머님한테 꼭 말씀드려. 고맙다고.”

동성이 박수를 쳤다.

다른 친구들도 다 웃으며 고맙다고들 했다. 심지어 곽재훈 조차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학생들은 방갈로 밖에 있는 평상에 블루스타 버너와 그릇들을 펼쳐놓고 고기를 굽고 찌개를 끓이고 밥을 지었다. 밥은 삼층밥을 겨우 면했고 오석이 준비한 불고기가 아니면 반찬이라고 해 봐야 김치와 고추장을 풀어 넣은 감자찌개 뿐이었지만 보트장에서 힘을 뺀 탓인지 꿀보다 더 달게 느껴졌다.

오석은 남이 차려준 식사가 아니라 집 밖에 나와서 스스로 지어 먹는 식사가 이렇게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이렇게 긴 시간동안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놀아 보는 것 역시 국민 학교 입학한 이래 처음이었다.

몇몇이 소주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억지로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무도 정치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렇게 서서히 시간이 지나고 날이 저물자 도시와 달리 인공조명이 거의 없는 조종천 일대는 더 이상의 유희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깜깜한 암흑세상이 되었다.

“남은 음식이랑 술이랑 다 싸서 방으로 가지?”

동성이 방문을 열자 학생들이 소주병들과 남은 고기와 찌개 따위를 챙겨 숙소로 들어갔다.

방은 겉에서 봤을 때 보다 훨씬 넓었다. 열 아홉명이 빙 둘러 앉아도 절반을 채우지 못했고, 열 아홉명이 모두 드러 누워도 자리가 넉넉해 보였다.

“자! 우리 노래나 하며 노는 게 어떻겠나?”

곽재훈이 기타를 들고 빙 둘러 앉은 꼭지점에 턱하니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오석이 걱정했던 시간이 왔다. 운동가요를 부르든, 대중가요를 부르든 클래식 밖에 안 듣는 오석은 따라 놀만할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운동가요든 대중가요든 다 부르며 놀 준비가 되어있는 모습이다. 재훈이 기타를 치기 시작하자 다들 즐거운 모습으로 노래들을 불렀다.

거칠은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있는 저 언덕넘어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젊은 그대 잠 깨어오라 아하~
젊은 그대 잠 깨어오라
아~ 아~ 사랑스런 젊은 그대
아~ 아~ 태양같은 젊은 그대
젊은~ 그대~

이건 그나마 오석이 아는 노래였다. 하지만 김수철이라는 가수가 불렀다는 것과, TV에서 잠깐씩 들어서 후렴구 정도 아는 정도일 뿐, 함께 부를 정도로 아는 것은 아니었다. 후렴구에서는 따라 부르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꿀먹고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다음 노래 부터는 오석이 모르는 노래가 계속 이어졌다.

고래가 어쩌구 하는 노래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는 하지만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이 한 소절만 어떻게 주워들어서 알고 있을 뿐, 나머지 부분에서는 꿀을 먹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본격적으로 재훈이 ‘메아리’ 라는 노래 써클에서 만든 운동 가요 모음집 악보들을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부터 운동 가요들을 부를 모양이다.

오석만 빼고 다들 운동 가요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잘도 따라 불렀다. 심지어 수현 조차 그토록 운동권을 싫어하면서도 노래는 알고 있는지 자그마한 소리로 따라 부르는 시늉을 하고 있다.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고운 노래가락이 들렸다.

그 배경에 깔린 기타 반주의 화성도 아름다웠다. 뜻 밖에도 오석이 잘 아는 가사가 나온다. 고등학교 2학년때 그 악몽의 문화제때 시화전에 걸었던 시가 노래가 되어 대학생들 사이에 불리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오석은 문예반이었다. 당시 문예반은 성진과 정우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주장하여 축제때 ‘모교를 빛낸 시인들’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사실상 저항 시인 김지하 시화전을 개최했다. 정우 따라 문예반에 들어갔던 오석은 그때 김지하의 시를 많이 읽었고, 그 아름다운 글밭 아래 감춰진 아픔과 고통에 전율했다. 하지만 오석은 여전히 왜 이 고운 시, 고운 노래에서 꼭 죽음이나 피를 다루어야 하는지 안타까웠다.

저 청한 하늘 흰 구름 왜 나를 울리나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마지막 살의 그리움

피만 흐르네 더운 여름날 썩은 피만 흐르네

함께 답세라 아 끊없는 새하얀 사슬소리여


낮이 밝을 수록 어두워가는 암흑속에 볕밭

청한 하늘 푸르른 저 산맥넘어 멀리 떠나가는새

왜 날 울리나 눈부신 햇살 새하얀 저구름

죽어 너 되는 날의 아득함 아 묶인 이 가슴

하지만 여기까지.

그 다음부터 나오는 노래들은 오석의 구에 점점 엉망으로 망가져 갔다. 단지 슬라브 행진곡의 변형 혹은 일본 군가의 변형에 불과한 가락에 거칠게 표현된 정치적인 내용, 투쟁의 내용이 얹혀 있을 뿐이었다.

이런 노래들을 듣는 것은 오석에게 고문이나 다름 없었다. 3분도 안 되는 노래 한 곡 한 곡이 마치 말러 교향곡 3번 같이 길게 느껴졌다.

“자, 다음은 한 사람씩 돌아가며 불러 보자.”

재훈이 여태까지 나오던 노래보다 훨씬 밝고 경쾌한 코드를 연주하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기타를 튕기면서 민경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주민경, 니 부터 먼저 하자.”

“야, 왜, 하필 나부터야?”

민경이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재훈이 노래를 독촉하는 노래를 불러댔다. 그러자 평소 민경 근처를 어슬렁 거리던 녀석들도 좋다고 따라 부르며 민경의 노래를 독촉했다.

노래를 못 하면 시집을 못 가요. 아 미운 사람.

시집을 가더라도 아들을 못 낳아요 아 미운 사람.

아들을 낳아도 고자를 낳아요. 아 미운 사람.

고자를 낳아도 쌍둥이로 낳아요. 아 미운 사람.

오석은 살면서 이 보다 더러운 노래를 들어 본적이 없었다. 귓구멍을 누가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이런 노래를 들어야 하는 민경이 불쌍했다.

“알았어. 할게, 할게.”

마침내 민경이 굴복하고 ‘메아리’ 책을 뒤지다 노래 하나를골랐다.

재훈이 슬폇 보더니 D-G-D-A7 이 반복되는 단순한 코드를 치기 시작했다.

그 기타 소리에 맞춰 민경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아쉬움이 쌓이는 소리, 내 마음 무거워지는 소리~

가사 대로 오석의 마음에서 무거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요일이 다 가서가 아니라 민경을 저 거친 녀석의 횡포에서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재훈은 평소에도 유난히 민경에게 들이댔다.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수업 시간에는 꼭 그 옆 자리에 앉았고, 다음 수업을 위해 강의실을 옮겨 갈때도, 심지어 점심 식사때도 어떻게 타이밍을 잡는지 늘 민경의 옆에 앉았다. 이쯤 되면 절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입만 열면 똥지개인지 똥장군인지를 짊어지고 농사일을 도왔던 가난한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고, 우리나라의 이 부조리한 불평등에 대해 다 갈아 엎어야 한다며 혁명을 이야기 하는 놈이 왜 하필 민경에게 저렇게 들이대는지 오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민경은 민중적이지도 민족적이지도 않은 오히려 이 둘과 정 반대 스타일의 아이였기 때문이다.

재훈의 평소 주장대로라면 민경은 제일 먼저 배격되고 타도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심지어 민경네 집안은 같은 강남 출신이며 대한민국 상위 1% 이내에 드는 오석네 보다도 더 부유해 보였다. 같은 강남이라돟 테헤란로를 경계로 북쪽이 남쪽보다 부유하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오석의 아버지가 아무리 월급이 많다 하더라도 민경네 집안에서 보자면 어차피 남에게 고용된 노동자에 불과했다. 오석의 어머니가 약국을 경영한다고 하지만 민경네 집안에서 보자면 기껏 자영업자에 불과했다. 민경의 아버지는 회사와 빌딩을 가지고 있는 명실상부한 부르주아이며, 어머니는 굳이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모님 그 자체였다.

민경은 옷차림부터 달랐다. 오석은 점퍼, 자켓, 블레이저를 여러 벌 바꿔 입고 거기 맞춰 운동화, 구두, 캐주얼 슈즈를 바꿔 신고 다니는 정도지만 -이것도 다른 학생들 눈에는 사치스럽게 보였겠지만- 민경은 어찌나 옷이 많은지 한번 입었던 옷을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옷만 자주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오석이 확인한 민경의 신발만 옥스포드 화가 셋, 플랫 구두 둘, 로퍼 둘, 펌프스 둘, 메리제인 둘, 운동화가 세 켤레였다. 곧 날이 더워질텐데 그러면 샌들 종류도 여럿 등장할 것이다.

민경은 가방도 많았다. 대학생들이 흔히 매고 다니는 책가방이나 배낭 뿐 아니라 멋진 버클이 달린 고급 숄더 백, 토트 백, 크로스 백 등등을 날마다 옷에 따라 맞춰 들거나 매고 나타났다.

당장 엠티만 해도 처음 보는 차림으로 나타났다. 학교에서는 주로 세미 정장 차림으로 다니는 민경이 나이키 캡을 뒤로 돌려쓰고 리바이스 데님 바지와 아놀드 파마 셔츠를 발랄하게 차려 입고 나타난 것이다. 이게 뭔 소리냐 하면 엠티에 입고 가기 위해 따로 쇼핑을 했을 것이란 뜻이다.

재훈이 평소 떠들던 말 대로라면 민경에게는 적대감을 드러내던가 그게 너무 오버라면 거리를 두어야 마땅했다. 오석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재훈뿐 아니라 자신의 가난을 내세우고 부자와 권력자를 싸잡아 비난하는 몇몇 다른 과격한 남학생들 역시 민경의 주변에 날파리 처럼 얼씬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틈만 나면 근처에 있으려 했고, 말 한마디라도 더 걸어보려 했다. 그래서 민경은 겉 보기에는 늘 남학생들에 둘러싸인 알파걸 같은 모양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본인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럭저럭 노래 시간이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재훈과 몇몇 패거리는 민경이 노래를 다 부르자 노래를 집어 치우고 술병과 술잔을 들고 돌아다녔다. 어느새 오석의 앞에도, 수현의 앞에도 넘치도록 술이 채워진 소주잔이 놓였다.

“원샷. 원샷.”

다들 언제 술들을 그렇게 배웠는지 일제히 이렇게 외치더니 소주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오석도 마지 못해 소주 한 잔을 원 샷으로 마셔야 했다. 소주 한 잔이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온 몸이 비명을 치며 보내는 강력한 경고 신호를 보냈다. 맥박이 빨라지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너 얼굴이 안 좋아.”

민경이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석을 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머리가 좀 아프긴 해.”

“그 정도가 아니야. 좀 봐.”

민경이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보여주었다.

손거울 속에서 얼굴이 무른 대추 빛으로 물들어 버린 멍청한 녀석 하나가 피곤한 모습으로 오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빛의 시각적 효과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실제 오석이 느끼는 것 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더이상 아무도 오석에게 술을 권하지 않게 되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지도 않은데다 얼굴까지 대추색이 된 남자녀석에게 술잔 들이댈 남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대신 민경이 술잔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심지어 재훈은 서로 팔을 교차하는 일명 ‘러브샷’까지 강요하다시피 했다.

나머지 녀석들도 사정없이 소주를 목구멍에 퍼 부으며 때때로 술잔을 서로 돌려 가며 권커니 받거니 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오석이 명절 때마다 보아 오던 아저씨들 모습이었다.

여기저기서 혀 꼬부라진 목소리들이 들리고 방안은 순식간에 술 냄새와 담배연기로 가득 차버려 마치 군대 같다온 사람들이 전설처럼 이야기하곤 하는 화생방 교육 실습실 같이 되어 버렸다. 오석은 이런 공간에서 어떻게 여학생들과 같이 밤을 지새우자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재훈의 목소리가 압권었다.

녀석은 침을 튀기며 한 손으로는 술잔을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담배를 휘두르며 거의 악을 쓰다시피 열변을 토했다. 오석의 귀에는 언어라는 형태로 자기 마음의 응어리를 배설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오직 투쟁만이 사람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기라 이기다. 투쟁하지 않는 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인 자주성이 없는 기다 이기라. 인류의 역사를 유사 이래 주욱 보면 말이다. 그게 항상 자주성을 찾으려고 하는 피 억압 계급과 그것을 억누르는 지배 계급의 투쟁의 역사였다 그 말이라.”

이때 갑자기 차가운 여자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리며 재훈의 말을 끊었다.

수현이었다.

“야! 역사고 뭐고간에 너희들 담배들 좀 작작 피워.”

“미안하다. 이젠 그만 필 끼다.”

재훈이 마구 흔들고 있던 담배를 소주병 속에 집어넣었다. 담배 꽁초가 풍덩 하고 약간 남아있던 소주에 빠지며 마지막 불꽃을 접고 생명을 다했다.

하지만 피우던 담배를 끈다고 그 동안 생성된 연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방 안은 여전히 매캐한 담배연기로 가득했다.

수현이 여전히 코 막히는 시늉을 하며 문을 열었다.

“나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 공기 보충해야지 이러다 질식해 죽겠어.”

수현이 나가면서 손짓과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오석은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보았지만 수현이 나가고 바로 따라 나가는 게 눈치 보여 일단 고개만 끄덕인 뒤 손가락으로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기다려.”라고 소리 없이 말했다.

오석은 잠시 술 기운을 못 이기는 모습으로 방 구석으로 물러나 벽에 기대었다. 그렇게 한 동안 시간을 보내다 10분 정도 지났다 싶을 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술 기운 좀 깨야겠어. 바람 좀 쐬고 올게.”

혹시 민경이 “나도.” 하고 따라 나설까봐 살짝 긴장되었다.

민경이 따라 나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민경이 따라 나오면 재훈과 몇몇 남자 녀석들이 자석처럼 따라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민경은 남학생들이 억지로 권한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벽에 기대 졸고 있었다. 확실히 민경은 딱 부러지게 거절 하는 수현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어쨌든 오석은 민경은 벽에 기대 졸게 두고 방갈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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