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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소설 별이잠드는바다 23화 사랑하는 사람들

by 권재원

“메모리아와 친해지긴 했는데 그래도 이기고 싶었어요. 2017년 이후까지 이 그룹을 계속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지만 남아있는 1년 반은 최고이고 싶었죠.

이주란 이사와 멤버들, 그리고 스타일 팀장이 모여서 회의를 열었어요. 오징어 숏츠로 골탕은 먹였지만 메모리아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거든요.

이주란 이사가 단언했어요.

‘청순 컨셉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이건 모두 동의했어요. 이미 정상적으로 다녔다면 세이, 하린 언니는 대학 졸업반, 저랑 소이도 대학교 3학년이죠. 상큼 발랄 청량한 이미지를 유지하기엔 저희도 팬덤도 너무 나이 들었어요. 그 나이 먹도록 세상 맛을 모르면 청순한게 아니라 미숙한 거죠.

그런데 아이돌은 판타지를 제공하는 존재, 이데아죠. 그러니 세상 맛을 알았다고 그걸 직접 노래하는 건 아이돌의 영역을 벗어나요. 그건 록이나 포크에게 맡길 일이죠.

그럼 세상 맛을 알아버린 다 자란 성인의 판타지는 무엇일까요? 특히 여성이라면?

이주란 이사가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결국 섹시 컨셉으로 가야하나?’

아, 섹시라 그런다고 이상한 거 상상하지 마세요. 여기서 섹시라고 한 건 성숙한 아름다움을 감추지 않겠다 이런 뜻이지, 야하고 선정적인 모습으로 소비재가 되겠단 뜻은 아니니까요. 보통 기획자들은 생각은 섹시라고 하면서 말은 빙빙 돌려서 성숙한 여성미니 어쩌니 그러는데, 이주란 이사는 그딴거 없는 분이라.

우리가 잠시 말 없이 생각만 하고 있자 이주란 이사가 일어섰어요.

‘나랑 팀장은 다른 데서 기다릴테니까 너희끼리 잘 상의해 봐.’

그러자 스타일 팀장이 포트폴리오를 하나 건네주고 이주란 이사랑 같이 스탭 숙소로 갔어요. 포트폴리오에는 새 컨셉으로 전환할 때 제안할 의상 디자인들이 들어 있었죠.

여느 때 처럼 다엘 언니는 한발 물러나 대화에서 빠지고 나머지 네 멤버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너무 무방비해.’

한참 포트폴리오를 뒤적이던 세이 언니가 말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야? 그렇게 노출이 심했어?”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에요. 포트폴리오에 나온 옷들, 사실 우리 또래 대학생들이 여름에 일상적으로 입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요.

세이 언니는 이렇게 말했어요.

‘유노이아는 이런 표현 좀 젠더 빻은 표현이라 그렇긴 한데, 굉장히 여자여자 한 느낌이잖아? 나만 해도 말은 막 이렇게 해도 생긴 건 또 여자여자 하고? 체구는 여리여리 얼굴은 순둥순둥.

메모리아 애들 봐봐. 빤쭈 같은 반바지 입고 허벅지 다 내놓고 뛰어다니는데 다들 그거 체육복으로 보지 야하다고 안 해. 몸집 크고 힘 좋게 생겼거든. 그런데 우린? 천상 여자, 그것도 이상화된 여자로 브랜딩 되어왔어. 모범생 이미지, 단정함, 이런 게 원초적 욕망을 막고 있었다고. 그런데 그걸 치운다? 난 상관 없어. 그런데, 너희는 그 다음에 쏟아질 시선, 그리고 너희가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온갖 상황들 다 견딜 수 있겠어?’

소이가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남자들이 우릴 그렇게 본다고요?’

‘무슨 소리야? 유노이아는 남자들이 정말 정말 벗기고 싶어하는 팀이라고. 섹시돌 비키니 보다 유노이아 반바지가 훨씬 자극적이야. 왜냐고? 승리감을 안겨주거든. 저 도도한 것들이 마침내, 이런 느낌?’

나는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 들었어요. 이미 경험하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네가? 네 복장은 단정한 편 아니었어?”

“보기엔 그렇지만 메인 댄서 포지션 때문에 동작이 크고 점프나 턴이 많아서, 치마 나풀거리는 건 상수죠. 하, 그런데 웬 미친놈이 속바지 보이는 장면만 수십 장 찍어 움짤로 만들었더라고요. 그 기분이 어떤 지 아세요? 내가 조각조각 나서 남자들에게 나누어진 것 같은 그 더러운 기분. 내 속바지가 공공재 된 것 같은 기분.

그런데 소이가 의상 포트폴리오 쭉 둘러 보더니 방실 웃는 거에요. 그리고 헤맑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이 옷, 이쁘다.’

아이고, 이 순진한 녀석은 자기 어깨 라인하고 각선미를 자랑하고 싶었던 거에요. 알거든요. 소이 투어 때 관광 일정 있으면 항상 끈 나시에 미니 스커트 입고 뽐내고 다녔던거.

세이 언니가 정색하고 말했어요.

‘잘 생각해. 이렇게 되면 전혀 다른 팬덤이 유입된다고. 유니스하고는 질이 다른. 난 상관 없어. 그런데 소윤이랑 하린이는 생각 많이 해야 할 거야.’

세이 언니가 ‘난 상관없어’라고 한 건 쿨한 척 한 말이 아니에요. 그 전과 다른 팬덤이 가장 ‘벗기고 싶은’ 멤버가 세이 언니는 아닐테니까요. 저도 아닐거에요. 댄서의 신체는 정복욕을 돋구는 대상이 아니니까.

그럼 둘이 남아요. 청순 라인. 하린 언니랑 소이. 소이는 정말 그 쪽으로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은 순진한 느낌을 주죠. 하린 언니는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저항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게다가 두 사람, 얼마나 예뻐요? 그런데 이거 정말 위험한 거에요.

그런데 하린 언니가 뜻밖의 말을 했어요.

‘나도 해 볼래.’

‘진심이야?’

‘2년 내내 같은 노래만 하니까 지루해. 컨셉에 갇혀 있으니까 곡도 같은 것 만 나와. 다른 옷을 입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누가 알아? 레이디 가가 같은 곡이 나올지? 우리가 이 정도 소화 못 할 나이는 아니잖아?’

아이고, 순진한 언니.

속으로 생각했어요. 언니가 레이디 가가처럼 노래 할 수 있다는 것은 추호도 의심 안함. 하지만 멘탈은요? 레이디 가가가 멘탈 없이 가능한 줄 알아요?

분위기가 이쯤 흘러가자 세이 언니가 체념한듯 말했어요.

‘벗자. 벗어. 그런데 섹시가 뭐야? 뭘 해 봤어야 섹시를 알지? 난 이 나이에 썸도 한번 못 타봤다. 이 중에 연애 말고 썸이라도 타 본 사람?’

다들 꿀먹은 벙어리였죠.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다엘 언니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들었어요. 그리고 인공지능 같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네, 그 의상 안건. 진행해주세요.’

이렇게 된 거에요.”

“그래도 너희 팀은 회의를 다 했네.”

“인정해요. 우리는 예외적이죠. 회사가 소중하게 다룬 팀이죠. 사람이라기 보다 일종의 귀중품 같은 느낌이지만.

다른 팀 같았으면 일방적으로 벗겨졌겠죠. 어느 날 피팅룸 가보면, 배꼽이며 가슴 골이며 훤히 드러난 옷이 나와 있겠죠. 반발하면? 그럼 넌 대체 언제까지 청순 콘셉트 할래, 이제 다 컸잖아, 이런 식으로 몰아가고, 그러다 안되면 프로의식 부족하다고 몰아가죠.

심지어 공연 당일 의상팀 실수 빙자해 속바지 없이 무대에 올려버리는 경우도 있었어요. 실수? 아니죠. 그런데 공연 당일 속바지가 없다고 안 올라가요? 어림 없죠. 결국 그날 ‘엉덩이 개방’ 이따위 소리나 들으며 움짤 엄청 찍히는 거죠.

우린 그래도 스스로 벗었고, 포트폴리오 보면서 스스로 수위도 정했어요. 그래 봐야 민소매, 크롭탑, 숏츠, 혹은 슬릿 드레스 정도지만 우리가 그런 착장을 했다는 것 자체가 아이돌 판에서는 경천동지할 소식이긴 했죠.

그런데 의외로 당시 여돌들 중, 심지어 섹시돌 포함해도 바지 제일 짧은 애들이 메모리아였거든요? ‘여름방학에 여행간다’ 이 핑계 대고 거의 속바지 수준 반바지 입고 뛰어다녀요. 그런데도 청순돌을 의심받지 않았죠. 정말 이상하죠?”

“그랬어?”

듣는 나도 깜짝 놀랐다. 메모리아 영상을 적잖이 봤지만 ‘야하다’는 생각을 한번도 안했기 때문이다.

“일단 그렇게 기획회의는 끝났어요. 그러자 세이 언니가 껄껄 웃었어요.

‘뭐, 좋아. 너희가 견뎌 준다면 예술적으로는 괜찮은 선택이야. 한 방향으로만 뽑았던 곡을 팔방으로 뽑을 수 있으니까. 우리 그런 의미에서 19금 영화나 보자. 섹스를 알아야 섹시를 하지? 우리 컨셉은 이거라고. 엘리트 여성의 섹스. 이게 그냥 핫 핫 하고 들이대는 그런 것일순 없잖아?’

이때 뜻밖에 다엘 언니가 대답했어요.

‘아웃랜더.’

‘네?’

‘야한 장면 많이 나와. 세이가 말한 그런 장면. 그런데 분류는 순정이야. 여주는 엘리트 여성이야. 그러니 우리가 아웃랜더 본다고 이상한 상상하는 사람 없을거야.’

정말 철저한 언니죠.

그리고 우린 쪼르르 모여 앉아 아웃랜더 정주행 했어요. 아, 정말 많이 나오더군요. 소이가 어쩔줄 몰라하는 거 보는 것도 재미 있었어요.

우리는 각자 제이미 같은 남자가 앞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섹시해지기로 했어요. 생각만 해도 정말 설레더군요. 그리고 그 설레임이 확실히 10대 때와 다른 느낌이었고.”

나는 다엘에게 감탄했다. 아이돌 그룹의 리더가 그냥 연장자에게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 혹은 반대로 리더가 제대로 서지 못하면 그룹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완벽히 이해했다. 이주란이 아이돌 관두고 공부하겠다며 대학교 2학년까지 다니고 있던 다엘을 설득해 데려온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다엘이 비극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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