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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소설 별이 잠드는 바다 22화 사랑하는 사람들 1

by 권재원

예진이와 다시 만난지 일곱달이 넘어갔다. EV3에도 익숙해져 마치 내 차처럼 능숙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예진이가 하늘색 바탕에 흰색 무늬가 물결처럼 흘러가는 민소매 원피스와 하얀 샌들 차림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나도 예진이 즐겨 입는 로고 안 보이는 명품이 대체로 셀린느, 약간의 막스 마라라는 것을 알아 볼 정도가 되었다.

예진이가 가난했던 중학교 시절에도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학용품도, 액세서리도 고급 아이템들만 사용하는 아이였다는 기억이 났다. 아마 중고 마켓 부지런히 털었을 것이다. 대부분 로고가 드러나는 물건들이었다.

그런데 아이돌로 성공한 이후에는 거꾸로 로고가 거의 노출되지 않는 셀린느를 애용한다. 고급 아이템 쓰는 것을 드러내려 했던 가난한 예진이, 돈은 잔뜩 쓰면서 로고는 가리는 아이돌 지니. 마치 한 편의 댓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예진이 모자도 마스크도 선글라스도 없이 얼굴을 그대로 훤히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가려?”

“좀 드러 내려고요.”

“그래도 괜찮아?”

“그래야 할 때니까요.”

사실은 내가 사람 많은 번잡한 장소를 싫어하기 때문에 차를 끌고 서울을 벗어났다. 그렇게 한 시간을 달려 김유정 역 근처에 있는 노란 색 카페에 차를 세웠다. 평일 오전이라 주인과 우리 둘 뿐이었다. 그나마 주인이 지역 커뮤니티 활동이 있다면서 커피 리필과 쿠키 하나를 주고 자리를 비워버렸다.

예진이가 마치 연극 배우처럼 말을 시작했다.

“지니 앤솔로지 계속 됩니다. 2014년. 상반기는 그렇게 세월호와 함께 조용히 지나갔고, 덕분에 1학기를 제대로 수료할 수 있었어요. 이건 정말 비극의 역설이죠.

하반기에는 일본 투어 때문에 휴학했어요. 다엘 언니가 ‘휴학은 1년에 한 학기’ 이렇게 엄명을 내렸으니 14년도 몫을 채운 셈이죠. 언니 본인도 꾸준히 한 학기씩 다녀서 4학년이 되어 있었어요. 아니 쌤. 아이돌 세계에서 현역이 대학교 4학년까지 가는거 진짜 힘든거라고요. 반응 좀 하세요.”

나는 열심히 박수를 쳤다.

“아 그래. 대단하다. 일본 일은 잘 풀렸어?”

“칸나 언니들이 도와 주고, 루미 언니 영상 편지까지 띄워 주었으니 반은 먹고 갔죠. 나머지 반은 우리가 실력으로 채웠죠. 내친 김에 대만까지 같이 접수했죠. 외계인이 들으면 유노이아가 제국 이름인 줄 알겠다.

그렇게 알차게 2014년을 마무리 했는데, 문제는 2015년이 2014년의 복붙이라는 거죠.

세이 언니는 완전 새로운 음악을 하고 싶어했지만 그건 걸그룹, 더구나 청순 컨셉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청순 컨셉으로는 그 어떤 그룹도 우릴 넘어설 수 없었는데, 거기 우리까지 포함되어버린 거죠. 할 수 있는 포즈, 표정, 노래, 안무 다 했고요, 조명 각도도 다 정해졌어요. 어느 순간, 감동이 아니라 매뉴얼이 되렸어요.

대신 그 동안의 음원과 뮤비가 퍼지면서 일본, 대만, 동남아시아에 거대한 팬덤이 만들어졌어요. 2015년은 이걸 수확하러 다니는 시기였죠. 그 동안의 히트곡들로 세트리스트 짜서 대형 콘서트 투어 돌았어요.

두 가지 점에선 좋았죠.

하나는 자잘한 행사 일정 거의 스킵 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 그래서 2015년에는 학점이 조금 안습하긴 하지만 두 학기를 채울 수 있었어요. 아시죠? 서강대, 출결관리 거의 수도원 급인거?

다른 하나는 돈이 잘 벌렸다는 것. 일본, 대만 팬들, 굿즈 소비량이 어마어마하거든요. 올림픽 체조에서 대형 콘서트 열고, 후쿠오카, 나고야. 오사카. 요코하마, 도쿄를 돌아 싱가포르, 방콕, 홍콩, 가오슝, 타이베이 찍고 돈을 쓸어 담았죠.

회사는 신났지만 우린 우울했죠. 흔하디 흔한 인형 같은 아이돌이었으면 엄청 들떴겠죠. 두 달 일해서 일년 놀고 먹는 구도가 되었으니까요.

이주란 이사는 엘리트 컨셉이 아니라 정말 엘리트들을 모아서 팀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 지점 까지는 생각 못하셨던 것 같아요.

이론적으로야 2016년, 2017년 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 돈을 퍼 담을 수 있죠. 그리고 발전적으로 해산하면 되죠. 평생 벌 돈 다 모아 놓고.

그런데 무대 하나 끝나면, 똑 같은 노래, 안무, 대본으로 다음 무대 다음 팬미팅. 복사되는 기분이었어요. 멈추고 싶었어요. 그 두 해가 너무 길어 보였어요.

석 달 마다 들어오는 정산도 자극이 되지 않았어요. 따박따박 3천-5천만원씩 들어왔는데, 씀씀이만 헤퍼졌어요. 특히 소이는 돈을 너무 쉽게 썼어요. 스물 한 두 살에 천 만원 넘는 월급이 들어오는 꼴이니 오죽했겠어요?

하지만 저는 이게 끊어질 날이 얼마 안남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악착같이 저축도 하고 펀드도 하고 그랬죠.

아티스트가 아니라 뭔가 생활인이 된 느낌. 딱 그거였어요. 남자 아이돌이 약물 유혹에 빠지기 쉬울 때가 이럴 때죠. 우리 멤버는 대신 쇼핑에 빠졌고. 멤버 중 제일 알뜰한 저도 셀린느 병에 걸렸으니까요.

그러다 2016년이 되었어요. 변화가 필요했어요. 블루밍 데이즈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계속 블루밍 데이즈 2탄, 3탄 같았거든요.

이때 놀라운 아이들이 나타났어요. 제대로 미친 아이들. 바로 ‘메모리아’죠.

우리가 모두 스무 살을 넘겨 소녀 노릇을 탈피할 무렵 기다렸다는 듯이 열 여섯, 열 일곱 이런 애들로 짠 그룹이 나타나서 우리가 벗어놓은 교복을 입었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컨셉이 겹쳤어요.

교복, 옅은 메이크업, 상냥하고 순진한 이미지, 착하고 친근한 성격. 그런데 멤버가 여섯이었어요. 제일 막내가 메인 댄서 시아와 국제중 출신의 금수저 이미지의 아라.”

“정말 노골적이네?”

“그쵸? 저를 둘로 자른 거에요. 외고생이면서 메인 댄서, 이건 저 말고 또 나오기 어려운 캐릭터죠. 그래서 메인 댄서와 국제중 출신 둘로 나눈거죠. 아라도 저처럼 공부 잘 하고, 연습생 경력 없는 아이니까. 그런들 어쩌겠어요? 전 대학교 3학년. 애교 떨 나이는 지났죠.”

메모리아라면 나도 제법 이름을 들어본 걸그룹이었다. 나는 바로 아는 척을 했다.

“아, 청춘돌이라 불리던?”

“봐요. 선생님도 아실 정도네요. 시아가 들으면 진짜 좋아하겠다. 얘들 데뷔 방송 보고 깜짝 놀랐어요. 무대를 엄청나게 넓게 쓰는 거에요. 저렇게 넓게 서면 대형 바꿀 때 거의 뛰어 다니겠다, 이런 생각 했는데, 정말 뛰더군요. 동작은 얼마나 크고 빠른지 그 긴 팔이며 다리며 쭉쭉 뻗어대는데 진짜 멋있더라고요.

체격도 우리와 딴판이었어요. 제일 작은 멤버가 165 였다니까요. 나머지 멤버들도 168, 169, 170, 171, 173. 보이 그룹 프로필 보는 줄 알았어요. 유노이아는 제일 큰 다엘언니가 165에요. 제일 작은 하린 언니가 161. 비교가 확 되죠.

세이 언니가 기막혀 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저게 배구팀이지 걸그룹이야?’

6인 그룹이라 비유가 정말 딱 맞았어요.

데뷔 하자마자 뜬 것도 우리랑 같았어요. 쇼케이스 데뷔하자 마자 음악방송 네 군데 섭외 들어왔고, 음악방송 데뷔 때 방청석에 팬들 몰려와 응원구호 외치고 난리를 쳤어요. 사실 우리도 얘들 데뷔영상 보고 바로 ‘쟤들 뜬다. 백퍼 뜬다.’ 했거든요.

좋은 후배 그룹 생기는 거, 나쁘지 않죠. 문제는 걔들이 데뷔곡으로 차트 1위 차지했다는 거에요. 데뷔곡으로 1위? 그것도 우릴 누르고? 쌤, 아시잖아요? 유노이아는 모범생 컨셉이 아니라 정말로 모범생이 모인 그룹이라고. 그럼 어떤 정서가 있을까요?”

“지고는 못 살지.”

“그렇죠? 우린 컴백 할 때마다 1위 못 찍은 적 없었어요. 그런데 신인이 데뷔곡으로? 기특하던 마음은 멀리 사라지고 분해서 잠을 잘 수 없었어요.”

나는 김예진이나 지니나 결국 본질이 같다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웃음을 참아야 했다.

“우리보다 팬덤이 더 분노했어요. 유노이아 팬덤 유니스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죠. 유니스 멤버들도 나이를 먹어서 대부분 대학생이고 심지어 직장인도 많아 화력이 장난 아니었어요. 보고서 쓰듯 조목조목 메모리아를 비난했어요.

당황한 메모리아 애들이 ‘저희는 중학교 때 유노이아 팬이었어요. 우리 중 유니스 회원들도 있어요.’ 이렇게 읍소했는데, 불난 집에 부채질 한 격이 되었어요. 신인이 선배 아이돌 팬덤의 공격 받을때 하는 전형적인 대답이거든요.”

“정말 지극 정성이다. 너흰 복 받았어. 팬들이 이렇게 헌신적이니.”

“그런데 유니스가 예상 못한 변수가 있었어요. 메모리아 팬덤이 생각보다 컸어요. 데뷔하고 석달도 안된 그룹인데 글쎄 10만명이 넘었다니까요. 어마어마한 기세죠.

당연히 메모리아 팬덤 반디스에서도 반박글이 나왔아요. 겸손한 문장으로 씌였지만 태도는 단호했어요. 점점 사태가 장난 아니게 되고, 팬덤 대전이 벌어졌어요. 20만 유니스, 10만-15만 사이의 반디스.

상대방 공연에 야유하거나 무반응 관람하거나 하는 그런 매너 없는 짓은 하지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메모리아도 모범생 컨셉이라 그쪽 팬덤도 비슷한 타입이 모여든 거죠. 다만 연령대가 조금 다를 뿐.

쌤은 아시죠? 학교에 ‘김예진 같은 모범생’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성적은 중상위권인데, 오히려 선생님들이 더 예뻐하던 그런 아이들 있잖아요.

체육대회 하면 포스터 들고 교실 돌아다니고, 남학생들 말 안 들으면 직접 불러다 다그치고, 교실 청소 열심히 하고, 학급 주도하는 아이들. 선생님들의 총애는 우등생 보다 이런 아이들이 받죠.

메모리아가 딱 그런 느낌의 팀이었어요. 기획 정말 잘 한거죠. 모범생 그룹 유노이아가 뜨고 엔터사들이 외고생, 예고생 헌팅 다니느라 정신없을 때 학교에는 유노이아와 다른 유형의 모범생도 있다는 것, 우리가 친근감을 느끼거나 그리워하는 모범생은 다가가기 어려운 유노이아과가 아니라 바로 그런 친구들이라는 걸 포착한거죠. 유노이아가 성취와 성장의 서사를 만들 때, 메모리아는 청춘과 우정의 서사를 만들겠다. 기획 정말 잘했죠.

그래도 팬덤이 부딪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죠. 학교에서도 두 모범생 그룹이 싸우고 그러진 않잖아요? 학생회장은 주로 유노이아 유형에서 나오지만 집행부는 메모리아 유형에서 나온다고요.”

“맞아. 내 33년 경력이 보증해.”

“하지만 저한테 메모리아는 컨셉이고 뭐고 다 필요없고 그냥 엄청난 퍼포먼스의 팀이었어요.

일단 그 군무. 메인 댄서인 저에게도 상당히 도전이 될만한 안무를 메댄 따로 없이 여섯 명이 똑 같이 해요. 소름이죠. 보컬도 그랬어요. 언젠가는 갑자기 방송사고 나서 MR 뚝 끊어진 적 있는데 그냥 6인조 아카펠라 그룹 되더라고요.

저한테는 이게 본질이었어요. 교복을 입건 말건. 컨셉이 카피건 아니건.”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그럼요. 메인이 왜 메인이에요? 보통 군무는 간단한 동작으로 곡의 분위기를 표현하고 더 세밀하거나 강한 표현은 메인 댄서가 담당해요. 유노이아는 군무가 좀 더 복잡하고 메댄인 제 춤도 그만큼 더 까다롭죠. 그래서 브릿지에서 세이 언니가 하이라이트 직전에는 소이가 나서요. 그 틈에 제가 호흡 회복하고 난 뒤에 엔딩 장식하고. 보컬은 하린 언니가 독보적이라 소이가 리드 보컬로 종종 들어가 휴식 확보해 주고, 다른 멤버들은 하모니만 넣다가 각자 자기 포인트 나올때 그 파트만 불러요.

그런데 메모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같이 춤추고 다 같이 노래해요. 메인 댄서 시아, 메인 보컬 유린이 있긴 하지만 확실하게 구별되지 않아요. 시아가 발목 부상으로 빠져도, 유린이 성대 결절로 쉬어도 멀쩡하게 굴러가요.

메모리아 영상들 갖고 연습실에서 따라 해봤어요. ‘안무 복사기’ 모드 발동한 거죠.

근데요, 일단 숨이 차더라고요.

팔은 직선적이고 힘 있게 쭉쭉 뻗어 회전시키고 다리는 굉장히 빠른 턴과 스텝, 글라이드, 점프가 숨쉴틈 없이 이어져요.

열심히 따라하고 있는데 세이 언니랑 소이가 왔어요. 프로잖아요? 누가 먼저 말할 것 없이 바로 따라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시아, 세이 언니가 하나, 소이가 아라 자리를 맡아서 안무 돌려 봤어요.

‘여기서 저기까지 두 박자 만에 가라고?’

세이 언니가 깜짝 놀랐어요.

‘글라이드 동작 두번으로 센터에서 사이드까지 바로 가서 거기서 바로 턴 하고 대각선 정렬이야.’

그 순간 소이가 꽈당 넘어졌어요.

세이 언니가 계속 큰 소리로 구령을 넣으며 진행했어요.

‘일어나, 일어나 바로 다음 박자에 사이드에서 센터로 집합해서 원 만들고, 메인 보컬 스탠딩 커버 치면서, 다 같이 스파이럴 턴. 점프, 점프, 그리고 바로 글라이드로 사이드까지 넓게 퍼지라고?’

소이가 또 넘어졌어요. 결국 세이 언니가 완주를 포기하고 플로어에 주저앉았어요.

‘10대 애들 따라 하려니 골병들겠다. 소윤아 괜찮아?’

소이가 무릎을 주무르며 고개를 흔들었어요.

‘기럭지 차이 때문에 쟤들 동선 못 따라가겠어요. 아라 한 걸음이 나 두걸음이야.’

‘무슨 안무가 이러다 텀블링까지 나올 각이네.’

순간 제가 웃음을 터뜨렸어요.

‘나와요. 진짜로. 다른 노래에. 그것도 메댄이 아니라 메보가. 메보가 텀블링하고 자세 잡으면 메댄이 핸드 마이크 집어 던지고, 그럼 그거 받아서 바로 고음 치고 들어가요.’

‘아하하하!’

세이 언니가 통쾌하게 웃었어요.

‘청춘이 좋다. 쟤들 청순돌이 아니라 청춘돌이네.’

우리 모두 그 말에 뒤집어졌어요. 그래 봐야 우리도 다 20대 초반인데 ‘청춘을 돌려다오’ 모드라뇨? 일반인 세계라면 22세 여성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만 이 바닥에서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우린 메모리아에 입덕 한 것처럼 영상을 뒤졌어요. 지방 행사 공연 도중 폭우가 쏟아지자 인이어 뽑아버리더니 그 비를 쫄딱 맞고 20분 동안 공연을 계속하는 영상도 있었어요. 인이어 뽑는 동작이 카리스마 있더라고요.

유노이아 같으면 그렇게 비 철철 맞고 공연하면 그날 저녁 전부 열 펄펄 끓으며 뻗어 버렸겠죠. 애초에 우리를 금이나 옥처럼 다룬 회사가 무대에 세우지 않았겠죠. 그런데 메모리아 애들은 그 비를 맞고 공연한 이틀 뒤 200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행사장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어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슬픔을 느꼈다. 메모리아 메인 댄서라는 시아와 예진의 나이 차는 다섯 살. 고작 다섯 살 어린 팀의 젊음을 부러워해야 하는 세계. 너무 허무했다.

“남은 과제는 팬덤을 화해시키는 거였어요. 회사에서는 굳이 그럴 것 없다고 했고, 다엘 언니도 끼지 말라고 단단히 말했어요. 사실 두 그룹 팬덤은 점잖은 사람들이라 스트리밍 수 늘리는 스밍 경쟁으로 싸웠어요. 그러니 양쪽 회사 입장에서는 이 싸움이 오히려 이득이었죠. 하지만 저는 이런 꼴 더 보고싶지 않았어요. 내가 메모리아를 받아들인 상황에서 팬들에게 소모전을 시킬 수는 없었어요. 내 팬이지 회사 팬은 아니잖아요?”

“어떻게 화해시켰어? 화해의 편지 이런 거 올렸어?”

“예의가 있지 어떻게 그래요?”

“으응?”

“다엘 언니가 팬덤 싸움에 끼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만 싸워요 따위 메시지를 날릴수는 없죠. 좀 영리한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이럴 때 쓰는 방법이 챌린지에요. 음, 쌤 은 무협지 세대니까 도장 깨기라고 할까요? 저하고 소이가 메모리아 연습실에 찾아갔어요.”

“너랑 세이가 갈 줄 알았는데?”

“노림수가 있어요. 너희들 인정하긴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쉽게는 안 물러난다는 걸 보여주려고.”

나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그 속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메모리아 연습실에 들어갈 때 걱정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메모리아 멤버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거에요. 그 거대한 녀석들이 와 하고 달려오니까 깔려 죽을까 겁나더라고요. 그리고 세상에, 싸인을 해 달래요. 그러니까 중학교 때 유니스였다는 게 진짜였나봐요.”

“그럼 도장 깨기 안 해도 되겠네?”

“절대 안되죠. ‘와, 언니!’ 이러는 정도로는 팬들이 설득 안되요. 다 짜고 한 거 아니냐 이럼 끝이고. 팬들은 춤으로 설득해야 해요. 예정대로 챌린지 진행했어요.

메모리아가 안무 몇 개 제시해요. 그럼 저랑 소이가 그걸 따라하고, 시아가 거기에 대해 잔소리를 하죠. ‘여긴 이렇게, 저긴 저렇게 하셔야 해요.’ 이러면서. 그렇게 몇 번 교정 받고 메모리아 멤버들과 같이 그 동작 하면 클리어.

다음은 우리가 안무 몇 개 보여주고, 그걸 메모리아 멤버들이 따라 해요. 큰 동작이 익숙한 친구들이라 섬세한 유노이아 동작들 의외로 쉽지 않아요. 쌤 이해하기 좋게 비유하자면 메모리아가 베토벤이라면 유노이아는 모차르트라고 할까요? 마찬가지로 제가 그 동작에 대해 이거 저거 교정해주고, 같이 동작 하면서 클리어.

그리고 이 과정을 숏폼으로 만들어 각자 채널이나 인스타에 올리면 마무리에요. 여기에 화해해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따위 메시지는 필요 없어요. 그냥 춤 한 합씩 겨루고 인사하고 나왔다, 끝. 하지만 팬들은 이해하죠. 그만 화해하자. 어때요, 쌤? 이 세계 만만하지 않죠?”

나는 감동했다. 나이가 많아봐야 20대 초반인 사회에서 저런 고도의 사회적 기술들이 구사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예진이가 덧붙인 한마디가 엄청난 반전이었다.

“그런데 저랑 소이는 챌린지 영상 찍는 동안 아름답게 찍히는 앵글이랑 포지션을 계속 티 안 나게 선점했어요. 우리 둘이 그렇게 카메라 장악하면 같은 프레임에서 예뻐 보이기 쉽지 않아요. 오징어 안되면 다행이죠. 그날 메모리아 친구들 느꼈을 거에요. 백댄서 할 게 아니라 아이돌 할 생각이라면 자기들이 아직 부족한 게 무엇인지. 유노이아는 역시 어렵다고.”

나는 그제서야 예진이가 세이가 아니라 소이를 데리고 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예쁜 것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예뻐 보이는 건 기술의 영역이고, 소이는 그 기술에서 아이돌 최고수였던 것이다. 예진이가 입버릇처럼 “소이는 머리 나쁜 애가 아니에요.”라고 한 말의 뜻도 그런 의미였다.

문득 선배들에게 오징어 각도로 밀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춤에 몰두하고 있었을 메모리아 멤버들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영상 보면서 그들은 선배들이 자기들 골탕먹였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한 수 가르쳐주고 가셨다고 생각할까? 메모리아란 그룹이 훌륭한 인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 나 같은 사람이 다 알 정도니- 후자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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