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소설 별이 잠드는 바다 20화
14학번 김예진 2
나는 차마 예진이 쪽을 보지 못하고 창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만 흘려 보냈다. 그래도 다른 엔터사 보다는 경우 바른 회사라고 생각했던 뤼미에르와 이주란 디렉터에 대해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예진이와 유노이아 멤버들이 당시 엔터 판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은 회사와 디렉터 덕분이 아니었다. 그들이 엘리트 아이돌이라는 회사 컨셉을 충족시킨 덕분이었다. 만약 그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면 그들 역시 씹다 만 껌처럼 가차없이 버려졌을 것이다. 저들에게 어린 아이돌과 그 후보들은 사람이 아니라 다만 회계장부상의 자산에 불과했고, 버릴 때도 다만 자산손상차손에 불과했다.
10대 아이들을 세상에서 제일가는 보물처럼 여기며 30여년을 살아왔던 나는, 그 10대 아이들을 다만 자산으로 여기며 수익을 창출하다 폐기 처분하는 세상과 만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이주란 그 사람이야? 세라를 내 보낸 게?”
“그런 셈이죠. 공식적으로는 퇴출이 아니라 재배치지만.”
“인사이동처럼?”
“네. 계약 전 데뷔조는 일종의 프로젝트거든요. 그러니 말로는 이렇게 했겠죠.
‘음, 세라야. 넌 다른 프로젝트에서 뛰는 게 좋겠어.’
이 한 마디에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꿈이 무너져요. 학교 공부 다 팽개치고 매달렸다면 미래도 무너져요. 그런데 그 언니 연습생 경력 많거든요. 뤼미에르가 세번째 기획사였대요. 그러니 다 알죠. 이 회사에 런칭 준비하는 다른 걸그룹 없고 유노이아에 전력 다하고 있다는 거. 숙소에서 짐 싸서 다시 연습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
데뷔조로 숙소 생활 하다 다시 연습생들 사이에 나타나는 거, 그게 얼마나 큰 치욕인지 바깥 분들은 모를 거에요.”
“아.”
이 세계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나는 감탄사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회사에서는 세라가 스스로 떠났다고 말했어요. 연습이 힘들어 도망친 것처럼. 그래서 다른 멤버들이 처음에는 세라를 미워하고 원망했대요. 세라 때문에 데뷔 늦어지거나 엎어지게 생겼으니까. 그게 아니란 것을 안건.”
“죽었다는 소식 듣고서야 알았구나?”
“네.”
“세상에 이런 참혹한 일이.”
“하필 그 타이밍에 제가 합류한 거죠. 그것도 센터로. 연습생 오디션 한 번 본적도 없는 외고생이.”
참담했다. 예진이는 단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그 자리가 세라라는 소녀가 무너지고 난 자리였다. 가난 때문에 떠밀려 간 것에 가까운데 오히려 평생 죄책감을 안고가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2011년 가을에 봤던 아이돌 지망생 유족과 유명 엔터사 간에 법정 다툼이 일어났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기사에는 그저 A양, 그리고 B사 이렇게만 나왔다. 유명 엔터사인 B사 데뷔조였던 A양이 데뷔 직전 탈락하여 귀향한 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투신 자살했고, 유족이 B사를 정신적 학대 등등을 이유로 고소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안타깝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무심히 흘려 넘겼던 기사였다. 그런데 그 비극의 한 가운데 예진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온 몸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대체 왜 내보냈대? 세라.”
“자세한 내막은 저도 몰라요. 다만 세이 언니 말로는 연습할 때 ‘매혹적’이라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고 해요.”
“아이돌이 매혹적인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너도 한 매혹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예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게요. 매혹하되, 매혹적이면 안 된다. 그게 유노이아 청순 콘셉트의 철칙이죠. 교복 입고 춤추던 2012년 무대 한번 보세요. 상체랑 골반은 거의 고정이고, 손끝으로만 흐르듯 춰요. 포즈도 잠깐만 잡고 바로 흘러가고요. 시선도 카메라를 길게 응시하지 않아요. 눈만 마주치고 바로 피하죠.
‘당신이 매혹되는 건 내가 예뻐서지, 내가 유혹해서는 아니에요.’
우린 청순하고 도도한 모범생 컨셉이니까. 그걸 계속 전달해야 했어요.”
“너무 어렵다.”
“그쵸. 조금만 잘못하면 판타지가 깨지거든요. 그래서 겉으로는 쉬워보여도 청순돌로 성공하기 엄청 어려워요. 대신 성공하면, 섹시돌보다 팬덤 충성도랑 지속력이 훨씬 커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그래서 세라가 왜 안 맞았는지 바로 이해했어요. 춤은 잘 추었겠지만, 몸에 배인 ‘섹시 쪼’가 빠지지 않았던 거죠. 댄서 세계에선 그걸 ‘몸버릇 탔다’고 해요. 진짜 프로라면 무대에 맞게 쪼를 바꿔야죠.”
나는 화가 났다. 예진이가 이주란이란 사람 영향을 많이 받은건 알고 있었지만, 순간 마치 그 사람이 빙의해서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 너무 기획사 입장에서 말한다. 그걸 열일곱 살한테 강요하는 게 말이 되냐?”
기우였다. 예진이 바로 내 말에 수긍했다.
“안 되죠. 정말 안 되는 거죠. 지금의 제가 그런 요구 받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열일곱 살이었다면? 그건 너무 잔인해요.
쌤, 세라를 내보낸 게 옳았다는 말, 절대 아니에요. 다만 그 이유가 뭔지 알겠다는 거예요. 사실 판단이죠. 하지만 그 이유로 한 소녀의 꿈을 꺾었다는 건, 그건 가치 판단의 문제니까요. 열 일곱이라면 배워야 할 나이잖아요? 저도 쌤이랑 같은 생각이에요. 그건 정말, 너무 잔인한 짓이에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예진이는 차를 대전 추모공원 제2 봉안당 주차장에 세우고 있었다.
“여기구나?”
“네. 저도 처음 와요. 그때 일본에서 그렇게 약속해 놓고도, 일정이 바쁘고, 회사 눈치도 보느라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와 보네요.”
세라의 봉안함은 제2봉안소에 안치되어 있었다. 봉안함 앞에는 너무도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소녀의 사진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저렇게 아름다운데, 저렇게 어린데, 물건처럼 버려졌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주먹을 꾹 쥐었다.
“소이는 여러번 왔다 갔네요.”
스마트폰으로 사이버 추모공간을 둘러보던 예진이 말했다.
“둘이 각별했나 보구나.”
“같은 기획사 연습생 생활 한 적 있으니까요.”
“소이는 뤼미에르 에이스 아니었어?”
“아뇨. 원래 S엔터에 있었는데, 당시 그 회사 팀장이었던 이주란 이사랑 같이 뤼미에르로 도망왔어요. 이유는, 뭐 쌤이 상상하시는 그것과 비슷할 거에요. 이 바닥의 아주 뻔한 이야기죠. 소이도, 세이 언니도 다 이주란 이사가 이상한 개저씨의 마수에서 구해 온거죠. 다엘 언니도 아마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을 거에요.
소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도망 와서 데뷔조 -소이는 어딜 가든 자기는 무조건 데뷔조라고 생각하는 아이에요-합숙 들어가는데, 같이 연습생 했던 언니가 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런데….”
“그렇구나. 친언니 잃은 느낌이었겠다.”
“그러게요. 아, 어쩌죠? 손편지도 써왔는데 납골함 구역에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고 되어 있네요. 그냥 스캔 떠서 사이버 추모함에 올려야겠어요. 그럼 소이도 보겠죠?”
“그래. 좋은 생각이다.”
“그리고 세이, 하린 언니가 꼭 들려주라고 부탁한 노래도 들려줘야겠어요.”
예진이가 세라의 봉안함 앞에 스마트 폰을 기대 놓고 음원을 재생했다. 유노이아 노래를 통해 익숙해진 세이의 랩과 하린의 보컬이 부드럽게 들렸다. R&B 베이스의 부드러운 랩이 애절한 발라드에 살짝 살짝 얹히면서 감정선을 건드렸다.
처음엔 몰랐어
너 없는 연습실
조금은 어색해도
우린 그냥 견뎠어
웃으며 말했지
“곧 데뷔하겠지”
그 자리에 너 있었단 걸
그땐 알지 못했어
나랑 같은 꿈을 꾸던
너의 작은 숨결마저
회사도, 우리도
그냥 덮어버렸지
세라야, 데뷔 좀 하자
그땐 그렇게만 말했지
너의 눈물, 너의 마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어
세라야, 들리니 지금
이 노래는 너를 위한 거야
춤추던 너, 노래하던 너
우린 잊지 않을게
네가 힘들다고
누군가 말했지
그래서 우린
널 원망했었나 봐
근데 이제 알아
그건 거짓말이야
무너진 건 너였고
눈 감은 건 우리였어
돌아갈 수는 없지만
기억할게, 꼭 기억할게
그 자리에 넌 있었고
지금도 우리 안에 있어
세라야, 데뷔 좀 하자
이젠 부탁이 아니라 노래야
너의 무대, 너의 하루
우리 가슴 깊이 새겨 둘게
세라야, 고마워 정말
이 자리에 우릴 있게 해줘서
마지막 한 번만, 마지막 한 번만
너를 부를게
우리와 함께 있었던 너를,
영원히 기억할게.
나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너무 아름다운 멜로디였고, 너무 애절한 보컬이었으며, 위로하듯 얹힌 부드러운 랩이 슬픔을 증폭시켰다. 예진이가 틈 날 때마다 말한 “세이 언니는 천재에요.”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클래식에도 천재가 있고, 록에도 천재가 있다면, K Pop이라고 없을 이유는 없다. 얼굴 예쁘장한 아이돌이라고 천재가 아닐 이유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리스트도, 멘델스존도 당대에는 예쁘장한 아이돌이었다.
“이제 이 음원들도 사이버 추모공간에 업로드 할게요. 그럼 여기 일은 끝나요. 자, 이제 업로드 완료 인증샷 찍어서 세이 언니한테 보내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