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소설 별이 잠드는 바다 19회 14학번김예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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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꼭 같이 갔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어느새 계절이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나를 픽업하러 온 예진이가 말했다. 시승차는 스포티지에서 EV3로 바뀌어 있었다.
복장을 보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차림만 봐도 그건 알겠다. 성묘라도 갈 태세야.”
그런데 예진이 정말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을 멈추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린다는 것은 함부로 캐어 물을 소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진이가 알아서 털어 내길 기다려야 했다.
“가면서 말씀 드릴게요.”
예진이가 차를 움직였다. 전기차라 바퀴 굴러가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 정적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30여분이 지났다. 차는 어느새 동탄을 지나 계속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거 이러다 부산까지 가는 거 아닌가 싶을 때 예진이가 입을 열었다.
“대전까지 갈 건데 괜찮으시죠?”
“괜찮아. 남는 게 시간이라.”
“쌤, 세라 아세요?”
“음. 첨 들어보는 이름인데?”
“사실, 저도 모르는 언니에요. 하지만 모를 수가 없는, 몰라서는 안되는 언니기도 하죠.”
예진이의 목소리가 조금씩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고등학교 졸업식 마칠 무렵으로 돌아가요. 정신 없던 2월. 쇼케이스, 음악 방송 네 군데 뛰면서 컴백. 하루에 한 두 시간 자면서 일정 소화했어요.
컨셉 전환기라 더 바빴어요. 멤버들이 모두 대학생이 되었기 때문에 모범생에서 품위 있는 숙녀로 전환했거든요. 복장도 바뀌었어요.
2012년에는 내내 교복 베이스였고, 2013년에는 단정한 사복 개념이었는데, 2014년에는 대학 새내기 분위기를 냈죠. 과하지 않은 범위에서 크롭, 오프 숄더 같이 살짝 살짝 노출이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저한테는 잘 된 일이죠. 아시잖아요? 저 목, 어깨, 쇄골 라인 예쁜 거? 교복 베이스일때는 그게 가려져서 손해 많이 봤었죠.”
거의 틈만 나면 자신의 예쁨을 직접 말하는 이 아이의 버릇이 대체 어디서 온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살짝 짖궂게 받아쳤다.
“미안한데, 난 몰랐거든? 내가 네 어깨라인 쇄골라인 볼 일이 있었겠냐? 그랬으면 파면 걱정해야 하는 상황 아닐까? 마침내 쇄골라인 열었다, 대학 들어가면서 미모의 봉인을 해제했다 이 말 하는거야? 그럼 드디어 비주얼로 소이 이겼겠네?”
그러자 예진이 샤오룽바오 얼굴을 하더니 눈을 홀겼다.
“꼭 그렇게 말씀 하셔야겠어요? 아뇨. 못 이겼어요. 설마 저만 깟겠어요? 소이도 까던데요? 나름대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살짝 살짝. 그런 감각은 따라갈 수 없는 애거든요.”
민망해진 나는 엉뚱한 쪽으로 핑계를 돌렸다.
“크루즈 컨트롤 너무 믿지 마라.”
“알아서 잘 하고 있거든요.”
예진이 여전히 발끈하며 대답했다. 발끈하는 예진이라. 중학교때는 상상도 못하던 모습이다. 예니가 발끈하며 영국으로 떠나 버린 자리에 예진이가 들어와서 발끈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중학교 내내 모범생 중 모범생이었던 예진이가 내 앞에서 이럴 줄이야.
내가 웃음을 흘리자 샤오룽바오의 바람이 빠졌다.
“웃지 마세요. 이제 심각한 얘기 해야 해요.”
“그래. 계속 해보렴.”
“2014년 3월로 가요. 대학 첫 학기인데 사실 많이 설레고 기대도 많이 했는데,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어요. 일본에서 새 앨범 쇼케이스 열고 팬 미팅 잡았거든요. 일본은 4월이 개학이라 이때가 딱 좋은 타이밍이죠. 모든 현지 인터뷰가 다 제 담당이라 일이 많았어요.
제가 일본, 대만 이쪽에서 진짜 좋아하는 타입이래요. 그 사람들은 모범생, 우등생을 우리보다 훨씬 선호하거든요.
그러자 멤버들이 막 놀리고 그랬어요. 세이 언니가 제 발작 버튼을 마침내 찾아냈거든요.
‘야, 아깝다. 이대 영교과만 붙었으면 열도를 완전히 뒤집었을텐데.’
이러는 거에요. 그 소리 듣고 멤버들은 뒤집어지고, 저는 샤오룽바오 난사하고. 나중엔 아예 이걸 컨셉으로 잡아 팬 미팅이랑 일본 예능 나가서 쇼까지 했어요. 분위기 좋았죠.”
“아, 아하….”
나도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상처였을 ‘낙방’마저 팬서비스로 활용해 웃음으로 넘기는 걸 보니 조금 서글퍼지기도 했다.
“쇼 케이스랑 팬 미팅 잘 마치고, 칸나 언니들이랑 합콘도 했어요. 뭐 말이 좋아 합콘이지 사실상 칸나 단콘에 저희 슬쩍 끼워 팔기 한거죠.
어쨌든 열도 상륙은 완전히 성공하고 오사카, 요코하마 단콘까지 예약해 놓고 귀국했어요. 진짜 강력한 한 방은 감춰 놨어요. 단콘 때 루미 언니 영상 메시지 띄울 거거든요.
‘칸나가 유노이아 응원해요. 내 친구 다엘 짱, 지니 짱도 응원해요.’
그럼 일본은 뒤집히는 거에요. 일본 뒤집으면 대만은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중국은 뭐 겉으로는 대만 무시하면서 실제로는 대만 유행 따라하니까. 게다가 마인 그룹 계열사라는 치트키 까지 있죠. 일본이랑 대만은 한국보다도 마인 플랫폼 독점이 더 막강하거든요. 뭔가 전성기가 온다는 느낌이 왔어요. 웃기죠? 열 아홉 살에 전성기?”
나는 예진이가 열 아홉 살에 이런 흐름을 읽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덕분에 경영학과 보다는 영어교육과가 더 좋았을텐데 하는 마지막 미련도 싹 지워버렸다.
“그런데 도쿄 행사 마치고 오사카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세이 언니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는 거에요.
‘너도 이젠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너 오늘 크롭이랑 하이웨이스트 너무 잘 어울렸는데, 그 복장이 진짜 잘 어울렸던 사람을 꼭 기억했으면 해서.’
그러자 다엘 언니가 정색했어요.
‘서진아 하지 마.’
‘언제까지 쉬쉬 할 수 없잖아요? 예진이가 진짜 우리 멤버라면 알아야 한다고요.’
그러자 갑자기 하린 언니가 눈물이 터졌고, 소이도 같이 부둥켜안고 막 우는 거에요.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어요.
그러자 다엘 언니가 할 수 없다는 듯이 제가 있는 쪽으로 옮겨 왔어요.
‘서진아, 넌 하린이랑 소윤이 좀 달래줘. 예진이한테는 내가 말할게.’
‘예진아.’
다엘 언니가 이름을 불렀어요. 이름 두 글자에 그토록 무거운 감정이 담긴 적은 처음이었어요. 다엘 언니는 네 살이나 위인데다 성격도 꼼꼼하고 완벽주의자라 늘 어려웠어요. 이렇게 정색하니 거의 담임 선생님 같았죠.
꼼짝 못하고 바른 자세로 들어야 했죠.
‘미안해. 사실 처음부터 말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상황이 녹록치 않더라. 너 처음 숙소 들어왔을 때 우리가 좀 쌀쌀했지?’
‘특별히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그냥 낯가림들 하시나보다 했어요.’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처음 네가 들어왔을 때, 그리고 네가 연습생 출신도 아니고 외고 학생이라는 말 들었을 때, 미안해. 우린 네가 미웠어.’
‘네?’
충격이 컸어요. 내가 처음 합류해서 언니들과 섞이는게 조금 어려웠던 건 사실이지만, 미움까지 받았다니요?
‘제가 무슨.’
‘아니, 네 잘못이 아니야. 세라 때문이야.’
‘세라가 누구죠?’
‘유노이아 메인 댄서.’
‘네?’
그제서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어요. 유노이아의 메인 댄서, 그게 원래 내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세라라는 아이가 있었다는 것.
‘왜 처음부터 말해주지 않았어요? 내가 선 이 자리, 그게 다른 누군가를 밀어내고 차지 한 거라고?’
‘네가 흔들리면 우리 팀이 무너지니까. 네가 너무 잘했잖아. 센터로서, 메인 댄서로서. 그래서 더 말 못했어. 세라를 기억하면 네가 너무 미안해할까 봐. 그리고 우리도 잘못했거든. 세라 버림받을 때 우리도 외면했거든,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거든. 우린 데뷔해야 했으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메인 댄서였는데, 내가 그 자리에 들어왔다. 이건 이 바닥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거든요. 나도 여름방학 합숙 때 합이 맞지 않고 별로였다면 계약하자는 말 못 듣고 그냥 지나가버렸을 거에요. 그리고 더 나은 다른 누군가가 유노이아 멤버가 되었겠죠. 그게 그렇게 미안해 할 일인가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세라라는 친구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미안해 해야 하나요? 찾아가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나요? 그래야 언니들 마음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할 게요.’
그러자 다엘 언니가 고개를 돌렸어요.
‘세라는. 죽었어.’
‘네?’
가슴에서 정말 덜컹 소리가 났어요.
‘네가 우리 팀에 오기 얼마 전에. 네가 처음 숙소 와서 우리 만났을 때, 그때 우리도 처음 알았어. 세라가 떠났다는 거. 그런데 네가 들어온 거야. 회사는 숨겼어. 세라 떠난 것도, 심지어 세라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조차 지우려 했어. 신문에는 그저 유명 기획사 연습생 A양이 데뷔가 무산되고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유족들이 회사와 다투고 있다고 나왔지만, 우린 다 알았어. 이건 세라라고.’
그리고 말이 없었어요. 울고 있었어요. 그 강철같은 리더 다엘 언니가 울고 있었어요.
한참만에 다엘 언니가 말을 이었어요.
‘너한테 뭐라는 거 아니야. 넌 잘못한 거 없어. 회사가 세라 모른 척 할 때 우리도 데뷔 못 할까 봐 같이 모른척 했던 게 너무 힘든 거야. 그래서 기억해 주었으면 해. 넌 세라를 알지도 만나지도 못했지만, 네가 선 그 자리에 있었던 아이를 기억해 주었으면 해. 그게 다야.’
그리고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어요. 저도 그 누구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분위기였죠. 하지만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 끝날 상황이었어요.
‘내가 꼭 찾아 갈게요. 내가 세라라는 분을 꼭 찾아가서 고맙다고 인사 드릴게요.’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자 뜻밖에도 소이가 다가오더니 저를 와락 끌어 안더라고요. 그제서야 모든 게 이해 되었어요.
소이가 그 세라와 무척 친했구나.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그래도 팀을 위해 꾹 참고 여기까지 같이 왔구나.
이런 생각이 드니 도저히 울음 터지는 걸 막을 수 없었어요. 결국 우리는 오사카로 가는 버스를 눈물바다로 만들었어요. 밖에서는 웃음과 행복을 팔았지만 안에서는 같이 부둥켜 안고 우는 것이 무슨 운명처럼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