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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소설 별이 잠드는 바다 18회

미안해 너무 미안해 3

by 권재원

나는 강화도를 반 바퀴 돌고, 다리를 건너 최전방 교동도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소나무 여러 그루가 둘러싸고 있고 루프 탑이 예쁜 카페였지만, 아직은 날씨가 추워 다시 실내로 쫓겨 들어왔다.

예진이가 편안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2013년 가을 되면서 진짜 비상이 걸렸어요. 저랑 소이가 수능 보게 되었거든요. 소이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아무리 유노이아가 엘리트돌이니 모범돌이니 해도 소이 만큼은 비주얼 멤버라는 데 팬덤도 동의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지니. 처음부터 현역 외고생 프레임 깔고 시작했고, 자퇴나 전학 안 가고 끈질기게 외고생으로 버텼으니 이제 수능으로 뭔가 보여줘야 할 타이밍이 왔죠. 아티스트 행세했던 언니들은 거기 맞는 대학에 골인 했으니, 우등생 행세했던 저를 증명할 차례가 온 거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말 암담했어요. 일단 수시는 내신 때문에 완전히 물 건너 갔고요.”

나는 나이가 서른인데 틈만 나면 소이에 대한 깨알 같은 디스를 집어넣는 예진이가 너무 귀여워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10% 맞췄다 안했어?”

“데뷔 전까지 얘기고요, 일단 데뷔 한 다음에는 기를 써도 안되요. 사실 데뷔 첫 해에 자퇴하던가 일반고 전학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외고생 지니’ 이게 그냥 한 덩어리 브랜드였어요.

광고 받을 땐 좋았죠. 그게 그대로 족쇄가 되었어요. 내가 전학 가거나 자퇴하면 광고주들이 이미지 훼손 어쩌구 하면서 위약금 수십억원 나올 판이었어요. 꼴등을 하는 한이 있어도 짤리지 않을 정도로 출석은 해야 했던 거죠. 하지만 제 성격에 어떻게 그래요?”

“도대체 내신이 얼마나 떨어졌길래?”

“상식선 만큼 떨어졌죠. 유노이아 활동, 학업 다 놓지 않으려 기를 썼지만 학교가 학교다 보니 어림 없더라고요. 일반고였다면 15% 선은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여긴 와, 인정사정 없던데요? 그나마 우리 학년이 외고 경쟁률 제일 약했을 때 들어온 애들이라 바닥은 안 깔았어요. 70% 근방에서 오르내렸죠.

정신 건강에 정말 해로웠어요. 저, 10% 라도 엉엉 울던 아이였잖아요? 70% 가 뭐에요? 너무 챙피했어요. ‘난 가수야.’, 이렇게 생각해도 저 내신을 보니까 미치겠는걸요? 모르죠. 그 밑에 애들은 연예인보다도 못했다고 혼났을지.”

문득 지난 학교에서 축구부 학생 보다 성적 떨어지는 아이 세명을 엄청나게 혼냈던 기억이 소환되었다.

“기회는 오직 하나, 수능 정시 뿐. 회사에서도 심각성을 알고 있었죠. 저랑 소이는 수능 60일 전부터 활동 중단시키고, 다엘, 세이, 하린 언니 유닛 활동으로 대체했어요.”

“놀랍다. 회사가 너희 둘을 위해 돈 벌 기회를 포기하고.”

“다 잃을지 모르는 리스크 관리한 거죠. 단기적으로도 손해 본 거 없고요. 일단 대학생 세 언니들만 출격해도 다비치, 씨야 그림 나오니까 공연에 아무 문제 없었어요. 댄스 줄이고 보컬 집중하면 그것대로 마켓팅 되거든요.

‘센터와 비주얼 빠진 유노이아, 다비치화?’

‘공부하러 간 아이돌, 무대는 언니들이’

‘팬들 지니, 소이 수능 응원하며 완전체 기다림’

이런 기사들 줄줄이 나왔는 걸요?”

“아.”

“그게 다가 아니에요. 수능 50일 전 맞춰 ‘소이와 지니를 응원해 주세요’ 그러면서 ‘수능대박’ 찍힌 꽃모찌, 초콜렛 이런거 엄청 팔았어요.”

“야, 정말 악착같은 회사네. 마인 그룹 다워.”

“그쵸? 그런데 모찌랑 초콜렛이 정말 산더미처럼 온 거에요. 그걸 보고 소이가 이러는 거에요.

‘이거 어떻게 다 먹어? 난 몰라.’

그땐 진짜 너무 귀여워서 내가 소이를 깨물어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였어요. 어쩜 저렇게 순진할까?”

“그런데 나도 궁금해. 그 많은 떡 어떻게 했어?”

“가난을 아는 저니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해결했죠.”

“으응?”

“저소득층 수험생들에게 보내자 했거든요. 회사에서 얼씨구나 하면서 ‘소이와 지니가 합격 기원하며 보내 드려요’ 라는 문구 넣어서 형편 어려운 수험생들한테 싹 다 보냈어요. 당연히 미담 기사 나왔고.”

“맞다. 그 무렵 버스 정류장마다 ‘소이, 지니가 수능을 응원합니다’라는 문구와 너희 둘 교복 입고 파이팅 하는 사진 도배 되어 있었어. 그게 다 광고 판 거지?”

“그럼요. 뭐, 이해해요. 나름 윈윈이죠. 어쨌든 전 수능공부할 시간을 벌었고, 회사는 무대 안 돌리고도 돈 벌 방법 찾았으니까. 이걸 상품이 아니라 브랜드를 판다고 하죠.”

“굿즈 팔고, 광고 팔고, 할 건 다했네?”

“그게 전부가 아니랍니다. 60일간 활동 소강기잖아요? 언니들에게 황금 같은 컴백 준비 시간이 주어진 거죠.

저랑 소이 시험공부 하는 동안 세이, 하린 언니는 멤버 전원이 대학생 되는 그룹 특성 살려 -이거 정말, 정말 아이돌 그룹에서는 희귀한 거에요- ‘캠퍼스 청순’ 컨셉 신곡 작업 들어갔고, 거기 맞춰 안무 팀 움직이고, 다엘 언니는 수능 이후 앨범 녹음, 뮤비, 프로필 촬영 등등 스케쥴 조정 들어갔어요.”

“그러는 동안 너희 둘은 수능에 전념하고?”

“네.”

“수능 준비는 어떻게 했어?”

“저도, 저지만 회사도 결사적이었어요. 저 족집게 과외도 받았어요. 보컬이랑 댄스는 바우쳐 긁어보아 동냥하듯 배웠고, 입시 공부는 최고급 사교육으로 떡칠한 아이돌이라. 웃기지도 않았죠.

물론 그 동안 저 나름대로 수능 준비 안 한 건 아니었어요. 학교 내신 엉망인 것도 수능 선택과목 아닌 것까지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어 평군이 낮아서 그랬던 거고.”

“아, 국영수는 90점, 다른 과목은 30점 이랬나 보군.”

“딱 그거. 그래서 수능으로 어떻게 비벼볼 수 있다는 생각은 했어요. 회사에서 세운 목표는 중대, 경희대, 외대, 숙대. 모두 영어 교육과가 있는 학교죠. 팬들도 제가 외고생 트랙 다 따라가는 거 불가능한 거 알거든요. 자존심 상하지 않을 정도 입결은 내 달라, 이게 암묵적 요청인 거죠.”

“그런데 왜 영어교육과야?”

“이미지가 맞으니까. 외고, 영어, 모범생. ‘교생 지니’ 상상만 해도 마케팅 포인트가 줄줄 나오지 않나요?”

“그런데 수능 대박?”

“네. 요즘 말로 미쳤어요. 아니 찢었다? 저도 어떻게 그 점수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수능 당일 컨디션 엉망이었거든요. 기자들이 몰려와서 고사장에 들어가는 것부터 전쟁이었어요. 카니발 내리자 마자 플래시가 터지고 갑자기 마이크 들이대면서 ‘각오 한 마디 해 주세요.’ 이러고. 난 정말 시험 심각한데, 마인드 컨트롤 하면서 들어가야 하는데 계속 방실방실 웃으면서 ‘시험 잘 보고 오겠습니다. 수험생 여러분들도 팟팅!’ 이러면서 30미터를 걸어야 했어요. 그 와중에 혹시 사진 이상하게 찍히지 않도록 표정, 얼굴각도 신경 쓰면서. 이러고 무슨 시험을 쳐요?

그런데 오히려 정신 없이 들어간 게 긴장을 풀어 준 모양이에요. 생각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 쳤고, 심지어 찍은 게 거의 다 맞았어요. 진짜 찍었다니까요.

가채점표 받아 본 회사에서 학원 원장들하고 회의하더니 목표를 올렸어요. 이대 영어교육과!

이건 아이돌 안하고 그냥 S 외고 제대로 다녔어도 정배코스잖아요? 더구나 지니 이미지로는 최고의 그림이고.”

나는 예진이가 이대 캠퍼스에서 공부하는 그림을 상상해봤다. 정말 그림이 너무 완벽했다. 사실 서강대보다 그쪽이 그림은 훨씬 좋았다.

“하지만 저는 경영학과 생각을 굳혔어요. 마켓팅 당하지만 말고 내가 좀 알아야겠다. 재무제표도 제대로 배워야 정산 똑바로 받고 계약도 제대로 한다 이런 생각이죠.

서강대가 가군, 이대가 나군, 건대가 다군이더라고요. 그래서 서강 경영, 이화 영교, 건국 경영 이렇게 썼어요.”

“이화 영교 쓰긴 썼네?”

“사실 서강 경영은 기대 안 했어요. 그냥 써 본 거고, 이화 영교, 건국 경영 다 붙으면 그때 뒤통수 치면서 건국 경영 가려고 했죠.

어럽쇼? 서강, 건국은 붙었는데 이화 영교만 똑 떨어졌어요. 회사에서도 어쩔 수 없어 했죠. 이대 떨어지고 건대, 서강 중 고르라면 당연히 서강이죠.”

“서강대 붙고 이대 떨어진 건 조금 의외다. 애초에 그 학교들 지원했다는 건 너 수능 3% 이내 찍었단 뜻인데.”

“놉. 2%. 네네. 계속 놀라세요. 저 먼치킨 맞다니까요? 제 생각에 이대 영교는 교직적성면접에서 과락 났다고 봐요. 교수님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아이돌 따위가 들어와? 너 탈락’ 이랬을 수 있거든요.”

“그렇게 까지?”

“이해해요. 누가 봐도 교사 할 생각 없는 애가 영어교육과를 왜 들어와요? 저 같아도 떨어뜨렸어요. 회사가 교육계 우습게 보다 당한 거죠. 만약 이대도 영교과 말고 경영 썼으면 오히려 셋 다 붙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서강 경영이잖아요? 제 인생 최고 대박이었어요. 솔직히 블루밍 데이즈 차트 1위 했을 때 보다 그때가 훨씬 기뻤어요. 아이돌 안하고 제대로 학교 다녔어도 좋은 그림인데 둘 다 움켜쥐고 해낸거잖아요?

하긴 아이돌 안했으면 붙어도 돈 없어서 못 가고, 등록금 싼 교대나 시립대 갔겠죠. ”

예진이는 이런 식으로 아무리 아이돌 활동을 오래 했어도 그 본질은 모범생임을 말끔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수능 마치고 정신 없이 바빴어요. 바로 컴백 준비 들어갔거든요. 새 앨범 녹음하고, 새 안무 연습하고, 머리랑 피부 다시 손질하고. 그래서 이대 면접 망쳤는지도 몰라요. 컴백 직전이라 한창 미모가 물올랐거든요. 절대 교사가 되어선 안되는 애로 딱 찍힌거죠.

서강대 합격 확정되던 날, 서울대 수석보다 제 기사가 신문에 더 많이 나왔어요.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딱 그 짝이죠. 기자들이 숙소 포위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참, 소이는 ?”

“소이요? 성신여대 뷰티산업학과 갔어요. 다엘 언니 없으면 못 사는 애라, 처음부터 성신 찍고 있었어요. 다엘 언니가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2학년 다니다 휴학하고 데뷔했거든요. ”

“음, 생각보다 잘 갔네? 내가 너한테 전해들은 소이의 이미지로는. 텅….”

“아이, 쌤. 제가 그랬나요? 아니에요. 소이는 순진한 거지 머리 나쁜 애가 아니랍니다.”

“회사도 한 시름 놨겠구나.”

“잔치판이죠. 번듯하니 대학 잘 갔으니까. 저 이대 떨어진 건 계속 애석해 하더라고요. 왜겠어요? 마켓팅 때문이지.

일본, 대만 진출해야 하는데 서강대도 명문이지만 이대만큼 브랜딩 되어 있지 않거든요. 아이돌이 이화여대 다녀요 그러면 바로 ‘와!’ 반응 나오는데 서강대는 설명을 해야죠.

그런데 내가 떨어지고 싶어 떨어졌냐고요? 안 갈 생각이긴 했지만, 막상 떨어지니까 굉장히 속상하더라고요. 그런데 자꾸 내 앞에서 이대, 이대 거리니까 매니저고 나발이고 그냥 막 때려주고 싶었어요.

어쨌든 유노이아는 외고생이 센터 서는 것을 자랑하던 걸그룹에서 전원 인서울 대학생으로 구성된 걸그룹이 되었어요. 전무후무죠. 대학생들 모아서 만든 게 아니라 고등학생 활동시키면서 진학까지 완료한 그룹은 두 번 다시 나오기 어려울 거에요.

엄청난 화제거리가 되었지만, 씁쓸했어요. 가령 산울림, 넥스트 생각해 보세요. 신기해 했나요? 그 분들은 저희보다 학벌이 위였다고요. 그건 당연한 거고 걸그룹은 신기한 거고, 그런 이중잣대가 어디 있어요?”

“듣고 보니 그러네. 나도 그때 너희 그룹 신기하게 생각했던 사람 중 하난데, 미안해. 늦었지만 사과할게.”

“엑스큐자티오넴 아치피오. 다음으로 넘어가요. 졸업식. 슬픈 날이었어요. 엄마가 졸업식때 같이 사진 한 장 못 찍은 거에요. 아니 아예 근처에 오지도 않았어요.”

“아니 왜?”

“스스로 빠지셨어요. 사진 찍히면 곤란하다고. 엄마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너무 자랑스러우실텐데, 너무 대견할텐데. 그런데 그 기쁨을 함께 못하고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으려 하세요. 엄마가 이 학교 다른 학부모처럼 모피 코트 입고 루이 뷔통 백 들고 독일차 타고 왔다면 기자야 있건 말건 같이 사진도 찍고, 찍히기도 하고 그러지 않았을까요?

이런 생각 하자마자 눈물이 막 쏟아졌어요. 그런데 정말, 이게 뭔지. 내가 울음을 터뜨리자마자 카메라 든 사람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었어요. 이 미친, 아 죄송해요, 내가 우는것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에요. 기가 막혀서 정말. 그리고 ‘정든 학교를 떠나며 오열하는 지니’ 기사가 되어 버렸죠.”

슬프고 화나는 이야기였다. 가족도 가까이 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졸업식 사진 하나 같이 찍을 사람 없이 혼자 남은 예진이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예진이 보조개를 만들며 말했다.

“저 외롭지 않게 가족 역할 해준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 유노이아 멤버? 회사 사람?”

“아뇨. 예니요.”

나는 깜짝 놀랐다.

“예니가 거기 갔다고?”

“네. Y예고 교복 예쁘게 차려 입고 왔어요.”

“어떻게 알고? 뉴스나 이런 데서 봤나? 아니면 너희 팬덤 ‘유니스’ 카페?”

“유니스 공식 입장은 세이, 하린 언니때도 그랬는데 졸업식, 입학식에는 찾아가지 않는 거에요. 졸업식, 입학식은 사적 행사니 팬덤이 끼어들면 민폐다 이런 입장이죠. 예니는요, 사실 제가 와달라고 했어요.”

더욱 놀랐다. 내 마음은 예진이가 외로웠을 거라 걱정하던 마음을 기본 레이어로, 그래도 예니가 가 주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중간 레이어로 깔렸지만, 그 위를 다시 배신감이 덮어버린 이상한 모양이 되었다.

그래도 예진이는 꿋꿋하게 예니의 미담을 이어갔다.

“예니가 제가 졸업장 받을 때 사진 찍어주는 사람이 되어 주었어요. 졸업식 끝난 뒤에는 학교 친구들 하고 사진도 찍어 주고, 같이 찍기도 하고 그랬어요. 애들이 나랑 사진 찍고 가려고 줄 엄청나게 섰는데, 예니가 그걸 다 찍어 주었어요. 200장 넘게 찍었을 거에요. 고맙고 너무 미안했어요.

애들이 ‘동생인가봐.’ 이러면서 수근대는 소리가 나한테도 다 들렸어요. 예니가 누군지 아는 애들도 꽤 있었고요. 그런데 제 가정 형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언니는 K Pop, 동생은 클래식 아이돌 -인정하세요. 예니 아이돌 맞다니까요- 인가보다 하고 멋대로 상상하더군요. 포스터, 프로그램 어디에도 예니는 본명 안 나오고 저랑 이름도 비슷하니 졸지에 김예니 된거죠.

너무 좋았어요. 기자들도 그런가 보다 하고 굳이 사진 찍거나 하진 않았어요. 이런 행사에서 가족 찍고 그러면 렉카 취급이거든요. 그 중에는 예니가 가족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꽤 있었을텐데 굳이 파고들지 않았어요.”

인정한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나의 이성은 예니의 고운 마음 씀씀이에 감탄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 아이들이 그 전에 상당히 자주 연락하고 만났을 거라는 생각에 시기심이 유치한 모양의 녹색 안개가 되어 피어 올랐다.

“죄송해요. 쌤 몰래 저희 자주 만났어요.”

내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예진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애써 객관적인 톤을 유지했다.

“언제부터 연락 했어?”

“두번째 팬 사인회 때요.”

“오래 되었네?”

“네. 대치동 아파트로 숙소 옮기면서 바로 쌤 생각이 났어요. 아, 여기 오석쌤 사시는 곳인데. 그런데 문득 예니가 팬싸 올 거란 생각이 떠올랐어요.”

“거기서 연락처 교환이 돼?”

“절대 안되죠. 매니저가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어요. 연락처 교환? 절대 못해요.”

“그런데 어떻게 했어?”

“이렇게요.”

예진이가 메모지를 꺼내 오선지를 그리더니 악보를 그렸다. 모두 여덟 개의 음표로 구성된 동기 두 개였다.

“예니 차례가 와서 제 앞에 앉았었요. 저는 처음 본 사이인 척 하면서 말했어요.

‘어머, 너 첼로 하는 예니 맞지?’

그러자 예니도 시치미 뚝 떼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반가워. 나 예니야. 나 언니 광팬.’

그래서 재빨리 이 악보를 그려서 주었어요.

‘내가 요즘 노래 하나 만드는데 악상이 이래. 한 번 볼래?’

이러면서요. 예니가 부디 무슨 뜻인지 알아채기 바라면서.

예니가 그 악보를 잠깐 보더니 귀엽게 웃더라고요. 그러면서 바로 악보를 쓱쓱 그려서 내밀었어요.

‘그 다음 소절에 이렇게 연결해 봐. 예쁠거야.’

매니저도 회사 쪽의 누구도 당연히 의심 안 하죠. 오히려 ‘어, 이거 그림 좋은데?’ 이랬을 걸요?”

아, 기억났다. 그 팬싸 다음날 ‘K POP 요정 지니와 클래식 요정 예니가 악보로 대화한다.’ 계통의 사진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왔었다.

나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예니가 예진이 팬 사인회 가는 건 진작 알고 있었고, 거기서 서로 악보를 그려 주고 받는 모양이 내 눈에도 무척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악보를 아무리 뚫어지게 봐도 도대체 이걸로 어떻게 연락처를 교환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쌤, 그 악보를 음 이름으로 옮겨보세요.”

보다 못한 예진이 훈수를 두었다.

“E♭, G, G, A♭, A, F, E♭, D…”

나는 안경을 고쳐 쓰며 한 음 한 음 읽어 내려갔다.

도무지 익숙한 선율이 아니었다. 어떤 곡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아니 곡이 성립될 것 같지도 않았다.

예진이 웃음기 없는 눈으로 살짝 놀리듯 말했다.

“예니는 1초 만에 알아봤어요.”

그 말이 자존심이 찔린 나는 두배로 집중해서 음이름을 노려 보았다.

그 순간 깨달음이 번개처럼 스쳤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음이 터져버렸다.

“너희… 정말… 아하하하하!”

그리고 음 이름 아래 쇤베르크 음렬에서 사용하는 각 음에 대응하는 시리얼 코드를 적어 나갔다.

37789532

내가 비밀을 알아냈음을 확인한 예진이가 웃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맑고 장난스러운 웃음이었다.

“010만 빼면 이거 네 번호잖아.”

예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죠? 어떻게든 연락은 해야 했어요. 그런데 방법이 없으니, 음악의 힘을 빌린 거죠. 그게 우리 둘이 말 안하고 통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나는 고개를 돌려 두 번째 악보를 들춰보았다. 예니가 그린 것.

E(4), C♯(1), E(4), D(2), A(9), G(7), C♯(1), C(0)

→ 41429710

해 보나 마나의 결과가 나왔다. 당연히 예니 전화번호였다.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통쾌했다. 내 눈 앞에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음악이 담긴 악보가 놓여 있었다.

분야는 달라도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한 아이들. 그리고 그 음악은, 세상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서로의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나는 다시 메모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 사진 찍어서 기사 낸 사람도 있었잖아.”

예진이 피식 웃었다.

“쌤도 그 기사 보셨군요? ‘K-POP 요정 지니와 클래식 신동 예니, 악보로 교감하다.’ 그거 보고 회사 사람들이 난리였어요. 이게 대체 얼마짜리 바이럴이냐고.

나는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본의 그 집요함에 기가 질려 버렸다. 음악이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었지만, 그 마저도 또다시 상품이 되어 팔려 나간 것이다.

예진이는 내가 잠시 감상에 빠질 틈을 주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졸업식 마치고 숙소에 오니까 다엘 언니가 ‘이제 너도 와.’ 그러는 거에요.”

“나도 궁금하네. 어딜?”

“클럽이요. 아무나 안 받아서 우리 같은 아이돌들이 외부 노출 안되고 만나서 놀 수 있는 클럽. 루미 언니가 저 너무 보고 싶어한다고. 그래서 졸업 축하 턱 낸다고. 그래서 가서 신나게 놀았죠. 그야말로 광란의 밤을 보냈어요.”

나는 엄격한 리더 이미지로 ‘기품돌’이라 불리던 다엘, 한국과 일본에서 ‘요정돌’이라 불리던 루미, 그리고 ‘모범돌’ 지니가 모여서 대체 어떤 광란의 밤을 보낼 수 있을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무심코 판단의 말을 내 뱉았다.

“그래도 미성년자가 클럽은 좀….”

내 말꼬리를 잡고 예진이 발끈했다.

“그래서 언니들이 졸업식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준거라고요. 게다가 쌤, 대입 끝난 고삼들, 세상 없을 모범생도 졸업 전에 다들 마셔요. 김예진도 마찬가지라고요.”

나는 어깨를 으쓱 했다.

“그건 나도 알아. 옳다곤 생각 안하지만 어쨌든 현실은 인정. 그런데 뭐 하고 놀았어?”

“처음에는 리더 언니까지 같이 있겠다, 에라 오늘 완전히 모범생 집어치우고 막나가자 이랬는데, 결국 춤 췄어요.”

“춤? 거기서도 춤?”

“네. 새벽 네 시까지. 랜덤으로 아무 노래나 틀어놓고 즉석 안무하기. 지는 사람은 벌주로 하이볼. 이러고 놀았어요. 결국 제가 끝까지 춤췄고, 언니들은 연거푸 벌주 마시면서 케이오. 그러다 새벽 여섯시에 편의점에서 사발면 먹으면서 해장하고 오늘 일 절대 발설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그러다 손님들한테 들켜서 손가락 하트 뿜뿜 열심히 해주고 도망.”

나는 대학원 박사 동기들끼리 강릉에 엠티 가서 밤 새도록 아렌트의 ‘혁명론’과 ‘공화국의 위기’에 대해 토론하느라 금쪽같은 휴가를 탕진하며 ‘놀았던’ 기억이 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는 거기가 그렇게 우리끼리 모여 놀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알았어요. 유명한 선배 아이돌이 주인이라 정말 믿었죠. 다엘 언니도 루미 언니 소개 받고 거기 입성했고요. 급 안되는 연예인은 받지도 않았어요. 말은 안했지만 세이 언니도 종종 드나드는 느낌이었고요.”

“아니, 같은 그룹인데도 드나드는 걸 몰라?”

“그만큼 사생활 보장이 철저하거든요. 그래서 루미 언니한테 필요한 장소였어요. 집도 일본에 있고, 활동도 주로 일본에서 했기 때문에 한국 오면 안전하게 사적 만남 할 곳이 없었거든요. 대부분 거기서 했어요. 그런데 그게 불행의 씨가 될 거라고는 우리 중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우리가 세상의 눈을 피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그런 곳일 줄은.”

순간 나는 그 클럽이 어딘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진이도 입을 닫았다.

그 참담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 그 클럽의 이름, 그 클럽 주인의 이름은 사회의 금기어가 되었다. 나도 그 암묵적 동의를 지키기 위해 그 이름들은 밝히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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