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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소설 별이잠드는바다 21화 14학번 김예진3

by 권재원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죽전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보정동 카페거리에 차를 세웠다. 카페며 레스토랑이 너무 많이 늘어서 있어 한참 선택 장애에 시달린 끝에 빈티지 스러운 분위기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너무 공개된 곳 아니야?”

내가 살짝 걱정하자 예진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동네 오는 애들은 저 몰라요. 세대가 좀 어리죠. 알아봐도 요즘 애들한테 저는 아이돌이 아니고 광고 모델이에요. 어, 저기 데상트다. 뭐 이 정도죠. 애들이 바비 브라운이나 셀린느를 쓰진 않을테니. 무대 안 오른지 7년이에요.”

“아, 그런가? 다행이라고 말하긴 좀 그러네.”

“슬슬 다시 시작해야죠.”

“다시 한다고?”

“어머 실망하시는 거 봐. 아니, 쌤. 다시 무대 올라갈 생각 아니었으면 제가 왜 매달 피부며 뷰티에 200만원씩 들여가며 관리하고 명품 사서 코디하고 그랬겠어요? 허영이 남아서? 저 복귀 할거에요. 반드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진이가 뷰티와 착장에 쓰는 돈을, 나는 그동안 왕년의 스타가 영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해 벌이는 전형적인 행태쯤으로 여겨왔으니까.

예진이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곧바로 말을 날렸다.

“별로 안 좋으시죠, 쌤? 티 나요. 너무 나요. 제 첫 단콘 때 이야기 듣고 ‘아, 드디어 저를 예술가로 봐주셨구나’ 그런 느낌 받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딴따라 놀음에 미련 못 버린 철없는 애처럼 보시는 거 같아요.”

“네 첫 콘서트 가서 감동 받고, 지니를 아티스트로 인정한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이돌 판을 받아들인 건 아니야. 네가 아이돌 판에서도 어떻게든 예술을 하는구나 하고 감동한 것이지, 아이돌 판을 바라보는 내 관점은 바뀌지 않았어.

외모와 애교를 파는 상업주의, 물신주의. 너무도 잔인한 세상. 네 콘서트 덕분에 어느정도 돌아섰던 내 마음을 다시 되돌린 건 바로 그 영상 때문이야. ‘도나 노비스 파쳄’”

“아, 그거.”

“기억 하는구나.”

“그게 왜? 쌤 혹시 일베, 그런 거 아니시죠?”

“무슨 소릴 하는거냐?”

“그런데 왜?”

“아무리 아이돌 판이 상업주의에 찌들었다지만 그건 해도 해도 너무했어. 물론 너희들 잘못이란 뜻은 아니다.”

나는 10년 전, 지금도 잊고 싶은 그날을 떠올렸다. 2014년 4월 16일.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잊지 않겠습니다’ 같은 소리만 반복하지. 하지만 실제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던 교사들에게, 그날은 정말 ‘잊고 싶은’ 날이었어.”

잠시 말을 멈추어야 했다. 또 다시 감정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나는 잠시 마음을 추스린 뒤 말을 이어 나갔다.

“거의 한 달 간 아무 일도 못 했다.. 멍한 정신으로 하루하루 버텼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다른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지. 집단 트라우마가 딱 이런 거구나 싶었다. 수학여행으로 아이들 데리고 다녔던 기억들이 마구 떠올랐고, 배 안에 갇힌 교사들 중 하나가 내가 될 수 있었단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게 나를 갉아먹었고, 지금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어.

그때 나를 붙들어 준 게 ‘도나 노비스 파쳄’이었다.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미사곡의 마지막 기도. 유명한 작곡가 작품도 아니고, 단지 3성부 카논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 성가. 사람들은 모차르트 곡이라고 잘못 알고 있더라.”

“알아요. 저도 성당 다니니까.”

“유튜브에서 그 곡을 찾아 또 찾아 들었다. 그냥 살아 있으려고 들은 거였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영상이 튀어나왔다. 유노이아가 부르는 도나 노비스 파쳄.

하린이 하얀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를 치며 첫 성부를 불렀고, 소이가 손을 모은 채 두 번째 성부를 얹었지. 천사가 따로 없더구나. 그리고, 네가 나타났어. 하늘하늘한 리릭 드레스를 입고, 마치 공기 위를 떠다니듯 춤추며, 마지막 성부를 불렀지. 마치 씻김굿 같았어. 나의 고통도, 그 순간만큼은 씻겨나가는 것 같았고.

그렇게 세 소녀가 하나로 노래를 마무리하고,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엔 피아노만 남아 멜로디를 반복하다가 멈췄지. 너무 아름다웠다. 너무 위로가 됐다. 그리고 너무 중독성이 강했어.

나는 그 영상만 하루 종일 반복해서 보며 버텼다. 그걸 보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그 아름다움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어. 이걸로 돈을 벌겠다고? 이걸 마케팅에 쓰겠다고?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을 이럴때 쓴다고? 아이들의 죽음을, 교사의 상처를, 공동체의 트라우마를, 이렇게 상품으로 만들어 내놓는다고?

물론, 너희 잘못은 아니야. 그 영상 속 너희는 정말 아름다웠고 진심이 느껴졌어. 하지만 그 진심을 끌어다 쓴 자들.

너희를 ‘소유’하고, 너희를 ‘기획’하고, 너희를 ‘움직이는’ 그 시스템—아이돌판, 엔터판, 자본 그 자체. 그게 용서가 안 됐어.”

이렇게 한바탕 푸념을 하고 보니 눈 앞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예진이 모습이 보였다.

“아, 쌤. 그렇게 생각하셨구나. 너무 슬프네요. 화도 나고. 10년 동안 그렇게 생각하셨던 거에요? 정말?”

“무슨 뜻이야?”

“그 영상. 저희끼리 만든 거에요.”

“뭐?”

나는 거대한 해머로 이마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너희끼리라니?”

“회사 몰래 우리끼리 만들었다고요. 그냥 있으면 안될 것 같아서. 몰래 회사 스튜디오 들어가서 우리끼리 만들었다고요. 조금만 신경써서 봤다면 금방 알았을텐데 쌤은, 화부터 내셨네요. 확인도 안 해보고. 10년 동안 저희가 뤼미에르의 추모 마케팅에 동원된 인형이었다고 믿고 계셨다니, 너무 속상해요. 그게 더 아파요. 그래서 콘서트 좋게 봐 주시고서는 다시 마음을 닫아 버리셨어요?”

갑자기 예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먼저 갈래요. 죽전역 멀지 않으니까 댁에는 전철 타고 가세요.”

죽전역에서 대치동이야 전철로 한번에 연결되니 큰 문제는 안되지만, 나는 예진이가 이렇게 크게 화내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 예진이가 가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더니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영상 불러서 다시 보세요. 그게 회사가 만든 돈벌이가 아니라 소녀들의 진심이고 작은 반란이라는 증거를 찾아 보세요. 그럼 용서해 드릴게요.”

내 평생 예진이에게 이렇게 혼나는 입장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유튜브 앱을 열어 그 영상을 찾아 보았다. 아직도 보는 사람이 꽤 되는지 최근 일주일 이내의 댓글도 제법 많이 있었다.

“위로가 많이 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세월호도 유노이아도.”

“너무 그리워요. 재결합 안되나요?”

이런 종류의 댓글들이었다.

예진이가 말대로 나는 아주 쉽게 이 영상이 ‘미인가’ 영상이라는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회사 마크가 없어. 뤼미에르도, 유노이아 오피셜 로고도. 얼굴을 보고 유노이아라고 아는 거지, 어디에도 유노이아라는 공식적인 언급은 없어.”

“맞아요. 또?”

“채널이 정체 불명이야. 무슨 채널인지 알 수 없어.”

“맞아요.”

“다엘이랑 세이가 안 보여.”

“그게 왜 증거죠?”

“너희끼리 만든 영상이라면 스탭이 없었단 뜻이야. 그렇다면 누군가 그 역할을 해야지. 카메라 잡고, 콘솔 잡고.”

“맞아요. 하지만 다엘 언니한테는 아예 이야기 안했고요. 매니저나 다름없는 역할이라. 세이 언니가 콘솔에 있었어요. 거기서 원격으로 카메라, 마이크 다 조종했어요.”

“누가 먼저 시작한거야?”

“굳이 따지면 세이 언니죠. 하지만 마음은 같았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예진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또다시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죄송해요. 쌤,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아니 갑자기. 이러지 마. 내가 진짜 잘못한거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리가 얼얼하게 혼을 내더니 갑자기 용서해 달라며 통곡하다니.

눈물을 가라앉힌 예진이가 훌쩍이며 말했다.

“2학년 때 저희 데리고 제주도에 수학여행 갔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저희 데리고 다니느라 정신 없으셨던. 저희 졸업한 다음에도 계속 수학여행에 아이들 데리고 다니셨겠죠. 순간 쌤이 어떤 마음으로 그 영상을 봤는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는 깨달았어요.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던 누군가의 입장이고,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 앞에서 제가 너무 쉽게 화내고, 너무 쉽게 판단했어요.”

예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화부터 내셨다고 함부로 말했어요. 유족한테 왜 화부터 내냐고 따지는 거랑 뭐가 달라요? 정말 무례한 행동까지 하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요? 쌤을 여기 던져두고 혼자 가버릴 생각을 다 하다니.”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며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무리들은 많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던 ‘교사’의 상처를, 당사자의 고통으로 언급해 준 사람은 예진이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하지만 10년 동안 널 오해했던 건 정말 내가 잘못한 거야.”

영화나 드라마였면 이 타이밍에 어깨를 토닥이거나 했겠지만 나는 학생 몸에 절대 손 대지 않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라 그런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감정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참 숨을 고르며 말을 돌려야 했다.

“그 영상, 어떻게 만든 거니? 예사 솜씨가 아니던데.”

예진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너무 답답했어요. 명색이 대학생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너무 비겁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렇다고 유노이아가 나가서 촛불 들고 외치는 것도 어울리지 않고. ‘우리는 우리답게 하자.’ 하린 언니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렇다면 결국 노래와 춤이죠. 문제는 어떤 노래를 부르느냐는 건데, 미사 마지막 기도가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라는 것이 바로 떠올랐어요.

콘티는 10분 만에 나왔어요. 제일 걱정이었던 건 소이 였는데 뜻밖에 망설이지 않고 하겠다고 했어요.”

“한 밤중에 스튜디오까지는 어떻게 가고? 너희 숙소 규칙 보니까 감옥 수준이던데?”

“당당하게 매니저 차 타고 갔죠. 매니저한테 ‘신곡 아이디어 맞춰보러 스튜디오랑 연습실 좀 써야한다’고 핑계 댔어요. 어차피 회사 스튜디오 들어가는 거라, 의심 안했고요. 유노이아는 원래 밤에 스튜디오 들락거리는 애들이니까.”

나는 조용히 웃었다. 이 영리한 소녀들에게 속절없이 속아 넘어가는 어른들 꼴이 우스웠다. 엘리트돌, 모범돌, 스마트돌 하여간 뭐가되었건 그런 아이돌 그룹을 만들었다면 이 정도는 당연히 감수했어야 하는거 아닌가? 엘리트 처럼 보이는 아이돌이 아니라 진짜 엘리트 아이돌이니까.

“세이 언니는 콘솔 잡았어요. 전체 시스템 여는 패스 가지고 있었거든요. 없었으면 해킹해서라도 열었을 거예요. 우린 정말, 어떻게든 해야만 했거든요. 그런데 거기까지였어요. 영상만 찍었죠. 어떻게 활용할지는 차차 고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 영상이 퍼지고 있었어요. 유튜브, 페이스북, 전부요.”

“누가 올린 거야?”

“세이 언니가 로그 기록 뒤지다가, 이렇게 말했어요. ‘감독님이네’.’”

“감독이라니?”

“테크니컬 디렉터. 이주란 이사가 총괄 프로듀서고 그 아래 기술팀 총괄 하는 분이요. 그분이 시스템 무단 사용 흔적 찾다, 영상을 본 거예요. 그리고 그냥, 아무 채널도 아닌 계정 만들어 올려버린 거죠. 자막도 없고, 대사도 없고, 세월호에 대한 직접 언급도 없지만 그 시기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었잖아요.”

나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날의 고통은 누구도 독점하지 않았고, 누구나 조금씩은 나눠지고 있었으며,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였다는 걸.

예진이 조용히 덧붙였다.

“그때 저희도 하나였어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니, 쌤도 우리 중 하나였던 거 같아요.”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세월호의 희생자보다 겨우 두 살 위였던 예진이도 결국 나처럼, 그날의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당사자였다는 것을.

이후 예진이가 감정적으로 너무 소진되어 죽전에서 서울 까지는 내가 운전해야 했다. 전기차가 익숙하지 않아 시동걸린 차를 시동 켠다며 끄는 해프닝도 있었다.

나도 감정적으로 많이 복잡한 상태라 집에 들어가지 않고 동네 폴 바셋에 들러 롱고 한 잔을 시켰다. 어차피 쉽게 잠자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스마트 폰을 꺼내 2014년에 유노이아 혹은 지니와 관련된 기사가 있나 뒤져 보았다. 그러다 당시 서강대학교 학보인 ‘서강 해럴드’의 기사 하나가 검색되었다.


유노이아 지니 아닌 ‘14학번 김예진’, 봄 대동제 무대에 오르다

작성자: 김하늘 기자 / 2014년 5월 19일 / 서강대학교 학보

5월 12일, 서강대학교 봄 학기 대동제에서 화려한 헤드라이너 라인업과 별개로, 가장 많은 박수와 조용한 감동을 남긴 무대는 바로 조용히 진행된 ‘우리 학우 공연’이었다.

무대에 선 이의 모습은 틀림없는 유노이아의 ‘지니’였지만 어디에도 그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경영학과 14학번 김예진이었기 때문이다.

학생회는 축제를 준비하며 “우리 학교에 유노이아 멤버가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그룹 섭외는 어렵더라도 지니 개인 무대는 가능하다고 판단한 기획팀은 공식 섭외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뜻밖의 답장이 돌아왔다.

“유노이아 지니로 무대에 오르기는 어렵습니다. 재학중인 학교 안에서, 재학생 신분으로서 상업적 출연은 부담입니다.”

학생회는 아쉬움을 전했지만 다시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노래 하겠습니다. 출연료는 받지 않겠습니다. 단, 유노이아의 지니가 아닌, 경영학과 14학번 김예진으로 서겠습니다. 여기는 제가 학생으로 있는 곳이니까요.”

약속은 지켜졌다. 14학번 김예진은 정갈한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아이돌 스타의 모습은 아니었다.

지니는 아이돌 중 손꼽히는 댄서지만 김예진 학우는 춤 추지 않을 것이라고 무대 시작 전에 뜻을 밝혔고, 학우들 모두 여기 동의했다.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있듯 세월호 희생자를 생각해서였다.

MR역시 흥겨운 댄스음악 버전이 아니라 하린이 연주한 피아노 반주 버전으로 준비했다. 이 버전은 미공개 트랙으로 유노이아 멤버 이외에는 본교 학우들이 처음 듣는 것이라는 서비스 멘트도 잊지 않았다.

첫 곡은 유노이아의 대표곡이며 거의 국민가요가 되어버린 블루밍 데이즈. 그러나 이번에는 하린이 아닌, 김예진 학우의 목소리였다.

관객석은 처음엔 다소 어색해 했지만, 이내 후렴구를 떼창하며 환호하였다. 이후 소박한 멘트로 인사한 김예진 학우는 세곡의 노래를 더 선사하고 물러났다. 유노이아 센터 가 아닌 14학번 김예진의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무대였다.

여기에 대해 서강인들의 반응을 일부 소개한다.

“연예인이라니 처음엔 몰랐습니다. 평소 수업 태도도, 팀플 준비도 아주 성실했거든요. 오늘 노래를 들으며, 이 학생이 왜 그 일을 택했는지 처음으로 이해하게 된 것 같네요.”(윤성호 교수, 경영학과)

“하린 버전으로만 듣던 블루밍 데이즈, 이렇게 잔잔할 수도 있구나… 진짜 좋았음.”

“와 진짜 학생으로서 나와 준 거구나. 멋지다.”

“학우 공연이라더니 지니였어. 근데 진짜 딱 학생 느낌이었음. 예쁘게 잘하고 내려감.”

“무슨 마음이었을까. 근데 뭔가 울컥함.”


더 말이 필요 없었다. 이 기사를 보고 나는 예진이의 성품에 대해, 아니 지니의 성품에 대해 더는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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