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소설 별이잠드는바다 24화 사랑하는 사람들3
“그래서 나온 앨범이 러브 오브젝트지?”
“네.”
“유노이아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해. K Pop 통틀어서.”
“제 생각도 그래요. 무엇보다 댄서로서 웨이브, 롤, 체스트 아이솔레이션, 힙 아이솔레이션 등등 수 많은 동작의 봉인이 풀린게 좋았어요. 그전까진 제가 가진 감각과 표현을 ‘청순’이라는 이름 아래 억눌러야 했거든요.
세이, 하린 언니는 정말 아웃랜더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이상적이고 품격 있는 남자를 상정하고, 그 앞에서 여성으로서 완성되어 가는 이야기를 상상했죠.
자연스럽게 세계관은 현실을 벗어나 판타지에 가까워졌고, 음악도 달라졌어요. 클래식한 스트링 사운드, 프로그레시브한 구성이 들어가면서, 섹시조차 품격과 이야기의 형태를 갖추게 됐죠. 단순한 콘셉트 전환이 아니라, 우리 팀의 예술적 변신이었죠.
노출 문제도 해결되었어요. 현실보다 판타지 에서 노출은 같은 수위라도 훨씬 덜 야하거든요. 섹시한데 야하진 않다. 이 컨셉 잡으려고 스타일 팀장님한테 잔소리 진짜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좀 죄송하네요. 어린 것들한테 계속 지적당하고 빠꾸 당하고. 그래도 기어코 찾아내시더라고요.
뮤비 분위기도 달라졌죠. 쌤이 좋아하실 비유로 하자면,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분위기요. 물기 어린 숲, 속삭이듯 흐르는 멜로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세계. 바로 그 세계에서 저희가 춤췄어요.”
“어째 돈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쏟아부었죠.”
예진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듯 고개를 살짝 젖혔다.
“이주란 이사…. 피팅 때부터 뮤비 촬영장, 음방 내보낼 영상 효과 하나하나 전부 직접 챙기셨어요. 못 하나까지 봤다 할 정도로. 본인이 무대에 오를 기세였죠. 오래도록 꿈꿔온 세계를 드디어 만들어낸다는 표정. 우리도 마찬가지였고. 이건요 10대인 메모리아가 아무리 춤 잘추고 노래 잘해도 절대 할 수 없는 무대니까. 기술과 체력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낸 여성만이 설 수 있는 무대니까. 몸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다르고, 눈빛에 담긴 감정의 결이 다르니까.”
“경영진은 안 좋아했을 것 같은데?”
“싫어했어요. 그냥 있어도 일본이랑 대만에서 현금이 흘러 들어오는데 왜 대규모 투자를 하냐는거죠. 어차피 2년 있다 해산 할 팀인데?
‘멍청한 새끼들. 돼지 같은 새끼들’
어느날 이사회에서 한바탕 깨지고 돌아온 이주란 이사가 숙소에 와서 한풀이를 했어요.
‘저것들 눈에는 초동하고 마인 차트 밖에 안 보여. 아니 지들이 마인 차트 오너면서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라? 팬덤이 스밍 하는거? CD플레이어 없는 집이 태반인데 초동 몇 장 그건 또 무슨 의미가 있는데? 늙다리 돼지새끼들.’
직설적인 욕설이 막 튀어 나왔죠.”
이주란 그 사람 곱상한 외모와 달리 입담 걸죽한 건 이미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으니 나는 그 장면이 완벽하게 상상 가능했다.
“다엘 언니가 조용히 위스키랑 얼음통을 들고 왔어요. 일본 투어때 사왔나봐요. 야마자키더라고요.
다엘 언니가 위스키 반 잔과 얼음 한덩이를 넣어 주며 조용히 말했어요.
‘언니, 여기서 끝낼 거 아니잖아요?’
‘당연하지. 다은아. 너 스포티파이 앱 한 번 열어봐. 거기서 유노이아 한번 찾아보고.’
스포티파이. 우리 관심 밖에 있던 앱, 있는지도 모르던 앱이었어요. 쌤도 주변 둘러보세요. 스포티파이 누가 써요? 마인, 벅스, 지니, 애플뮤직, 유튜브뮤직은 있어도 스포티파이는 없을걸요?”
“없어. 한 사람도 못 봤어.”
“그쵸? 우리 멤버도 스포티파이 깔린 사람 하나도 없어서 앱스토어 가서 일부러 깔았어요.
‘팔로워가 100만이 넘어.’
하린 언니가 흐르는 물처럼 말했어요.
세이 언니도 고개를 갸웃 했어요.
‘도대체 100만이 어디서 왔어? 이거 누가 듣는다고?’
이때 이주란 이사가 말했어요.
‘월 청취자, 조회수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해 봐.’
얼른 확인해 봤죠.
팔로워는 108만명. 월 청취자 수는 무려 1600만명. 그리고 스트리밍 횟수는 대부분 ‘러브 오브젝트’ 앨범에서 나왔는데, 전부 3,000만을 넘고, 그 중 타이틀 곡 ‘러브 오브젝트’는 5,000만을 넘고 있었어요. 이 속도면 1억도 곧 넘겠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안 쓰는 스포티파이 앱을 통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러브 오브젝트를 듣고 있었던 거에요.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요.
‘레이디 가가’
하린 언니가 꿈꾸듯 말했어요.
이때 다엘 언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어요.
‘아시아 투어는 새 앨범 중심으로 안하는 게 좋겠어요.노래는 소개해도, 타이틀 곡 소개 정도로 하고, 무대랑 셋리는 종전방식대로 해요.’
이주란 이사가 깔깔 웃었어요.
‘아이구, 이 북극 여우. 영감님들 달래놓고, 실탄 모아서 미국 가자고?’
다엘 언니 별명을 처음 들었어요. 너무 잘 어울리더군요.문득 다엘 언니도 경영학과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어요. 그때 짐작했어요. 미국 시장 성공, 실패와 관계없이 우리 팀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이주란 이사와 다엘 언니는, 결국 자신들의 ‘기획력’을 테스트하려는 거였어요. 세이 언니랑 하린 언니는, 자신들이 만든 곡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었던 거고요.
이미 그들 마음속엔 ‘팀 유노이아’는 없었어요. 아이돌 그룹이 아티스트 모임으로 진화한 순간, 사라진 건 팀워크였고, 남은 건 각자의 실험실이죠.
그때부터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유노이아 이후. 경영진까지 한 번 가볼까? 솔로로 전향해서 브리트니 스피어스 한번 되어 볼까? 노래도 되고, 춤도 되고, 외모도 되고, 영어도 돼. 안 될 거 없잖아요?”
“소이는?”
“다엘 언니가 데려가겠죠. 아니면 이주란 이사가 데려가던가. 걔는 아름다움을 보여줄수 있으면 어디라도 상관 없어요. 모델을 하던, 솔로를 하던, 연기로 빠지던. 문제는 춤을 춰야 하는 저죠.”
“아시아 투어는 결국 예전 방식대로?”
“네. 2015년처럼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이틀간 콘서트를 열었어요. 셋리스트는 예전 히트곡 중심으로, 새 앨범 노래는 두 곡 정도 중간에 집어 넣고. 티켓은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매진됐죠. 어느새 우린 ‘추억을 파는 그룹’이 되었던 거죠. 착장은 새 컨셉으로, 세이 언니 표현대로 ‘벗었죠.’ 경영진 영감님들이 좋아하는 거 다 한 셈이에요. 안전한 레파토리, 복장은 섹시하게.
후쿠오카 마린 메세, 오사카 교세라 돔, 요코하마 아레나, 그리고 마침내 도쿄 부도칸까지—그대로 쓸어 담았고요. 싱가포르, 홍콩, 가오슝, 타이페이 까지 싹 돌았죠.
그 투어 하나로 회사에 순수익 50억 안겨줬고, 석 달마다 들어오는 우리 정산표에도 ‘억’단위가 찍혔죠. 정신 못 차릴 지경이었어요. 남돌은 이 무렵 슈퍼 카 산다고 하던데, 저는 위례 신도시에 아파트 하나 샀어요. 언론에서 부모님 집 사드렸다고 칭찬이 자자했지만, 사실은 내 집에 부모님 살게 해드린 거죠.”
이럴 때는 확실히 지니가 아니라 김예진이구나 하는 생각에 혀를 내둘렀다.
“다 잘 되었네. 그리고 미국에서 크게 먹을 일만 남고. 나름 해피 엔딩 아닌가?”
“그럴 줄 알았죠. 그런데 걱정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소이? 하린?”
“네. 아니나 다를까 둘이 미친 놈들의 타겟이 되었어요.
당시 소이는 대단했어요. 움직이는 페로몬 폭탄이었죠. 한번은 음방 하고 가는데 주차장에서 어떤 여학생이 막 우는 거에요. ‘언니, 너무 예쁘세요.’ 이러면서.
스물 세 살 소이는 그랬어요. 만개한 꽃. 치명적 향기. 투 센터 시스템 이런 말 다 필요 없게 되었죠. 무조건 소이가 전면에 서야 그림이 되었어요. 분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리고 하린 언니. 정숙하다 못해 좀 답답하던 착장 대신 슬릿 들어간 민소매 원피스 입은 하린 언니가 무대 가운데서 고음 치면 디바가 따로 없었죠.
그런데 두 사람이 이렇게 만개한 미모를 과시하며 전면에 나서자 세이 언니가 걱정했던 새로 유입된 이상한 팬덤, 아이 씨, 그것들 한테 팬이란 말 붙이기 싫고, 뭐라 할까? 하여간 그것들이 집중적으로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어요.”
“아이고. 이를 어째.”
나는 그 두 사람이 마치 눈 앞에 있는 것 같은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꼈다. 너무도 여리고 순수한 성격의 하린, 아름다움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소이. 그리고 그들을 탐하는 욕망에 가득한 시선들.
“아시아 투어 마치고 돌아올 무렵, 소이 엉덩이 노출 사진과 움짤이 돌기 시작했어요. 물론 다리 싹 드러내고 각선미 뽐낸 건 소이 선택이죠. 영상 샅샅이 뒤져 엉덩이만 따내 편집하고 돌려보는 것, 이건 소이가 허락하지 않은 거에요. 성폭력이라고요. 순진한 소이가 얼마나 파랗게 질렸을지 생각해 보세요. 심지어 그 움짤 제목이 ‘드디어 소이 엉덩이 개방. 오 예.’ ‘이거 레알 국보’, ‘유노이아 얘들도 이제 급했구나. 역시 대세는 메모리아’ 이 따위라면?
더 기가 막힌 건 그걸 소이 탓으로 돌리는 댓글들이에요. ‘그러니까 속바지 두겹 입었어야지.’, ‘테이핑 안하고 올라온 건 이미 생각이 있었단 뜻’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하린 언니는 소이처럼 무방비한 성격이 아니라 준비 단단히 했어요
.
커버업 브라에 속바지 두 겹에 테이핑까지
.
업계 말로
‘
철갑
’
친 거죠
.
그런데 마이크 치켜 들때마다 겨드랑이만 집중적으로 찍은 사진들이 돌아다니는 거에요. 아니 대체 어떤 미친놈이 그런 빈틈을 노렸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더럽다 그 이상의 말이 필요한데, 제 어휘력이 여기까지네요.
하린 언니가요, 그 사진 보고 화장실 가서 토했어요. 세상에 자기 몸을 보고 토하게 만들다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메인 보컬이 마이크도 못 들어 올려요. 마이크 높이 치켜들고 고개 뒤로 젖히면서 깊고 길게 고음 뽑는 거, 이거 하린 언니 최대 자랑거리였고, 시그니쳐 포즈에요. 목소리도 아름답고 포즈 자체도 정말 아름다워요. 하린 언니는 스스로 아이돌이라고 생각 안 해요. 매혹도 애교도 없어요. 오직 음악 올인 캐릭터라고요. 그 포즈는 팬들 앞에서 아티스트로서 존엄을 과시하는 상징이고요. 그런데 그 때마다 카메라 걱정을 하게 생겼어요.”
“그 비싼 티켓을 구해서 갈 정도면 진짜 팬일텐데 갑자기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그런 새끼들이 -어머 죄송해요- 퍽이나 돈 내고 와서 봤을까요? 디지털 사냥꾼, 아니 강간범들이죠. 콘서트 하면 직캠들 올라와요. 그럼 그 직캠들을 눈이 빠져라 보다가 조금이라도 빈틈 나오는 장면 나오면 그 부분만 캡쳐하는 거죠. 밤 새도록 좀비처럼. 아 적당한 말 나왔네요. 좀비 새끼들.”
순간 나는 소이나 하린보다 예진이가 걱정되었다.
“너, 넌 괜찮았어?”
예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전 괜찮을 줄 알았죠. 전에도 속바지 사진 같은 거 워낙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데 청순돌 노릇 하느라 봉인했던 동작들을 노리더라고요. 딱 허리부터 허벅지까지 잘라 골반 돌아가는 부분만 이어 붙인 움짤들. 신체 특정부위만 잘라 매달아 놓은 것 같았어요. 아이돌 지니도, 대학생 김예진도 아닌, 탐나는 엉덩이 하나로 남는 감각. 끔찍했어요.
원래 계획한 판타지 풍 무대와 효과까지 다 넣으면 나았을까요? 미국 사람들은 이 보다는 나은 매너를 보여 줄까요? 미국 투어, 할 수 있을까요?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았어요.
관객의 시선을 즐겼던 소이가 관객을 두려워하게 되었어요. 소이는요, 자신의 아름다움을 팬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믿던 아이에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도려내어 졌어요. 조각조각 잘려, 움짤이 되었고, 비뚤어진 욕망의 희생물이 되었어요.
소이가 무너졌어요. 그 아이는 사랑을 믿는 요정이었는데, 사랑을 믿는 방식이 부서져버렸어요. 북미 진출을 앞둔 시점, 우리의 팅커벨이 빛을 잃었어요.
저도 회의감에 빠졌어요. 우리가 아무리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당당하게 선언해도, 세상은 섹시하다는 이유로 정복당한 여자로, 청순하다는 이유로 순종하는 여자로 규정했죠. 우리는 언제 주체였던 걸까요? 우리는 언제 사랑했고, 언제 사랑받았던 걸까요? 무대 위에서 우리가 춘 춤은 대체 누구의 춤이고,우리가 불렀던 노래는 누구를 위한 노래인가요?
그래서 ‘내년에 미국 투어 마무리 잘 하면 아이돌 생활 접고 대학 졸업해서 뤼미에르에 직원으로 입사하자.’ 이런 생각 했어요. 안무 디렉터 거쳐 CCO까지 가는 거죠. 다엘 언니가 강력한 경쟁자가 될 거에요. 결국 다섯 명 중 2017년 이후 유노이아로서 재계약할 마음 있는 멤버가 하나도 없었던 거에요.”
“너희들이 그 틀에 담을 수 없게 되어버린 거야.”
“그래도 너무 허무했어요. 유노이아는 가족이었거든요. 팀은 사라져도 멤버들은 남아있으니 관계는 유지 되겠지만 이름이 있고 없고는 느낌이 다르죠. 쌤은 이런 정서 경험 못해보셨을거에요.”
“이해 할 수 있어. 6년이라는 시간을 한 공간에서 같이 먹고 자고, 울고 웃고, 노래 맞추고, 동작 맞추고, 함께 성공하고, 함께 고난을 겪고. 그게 가족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