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소설 별이잠드는 바다 25화 사랑하는 사람들 4
예진이 표정이 갑자기 밝게 바뀌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야구장에 가고 싶어졌어요. 너무 헛헛한 기분이라 많은 사람들과 마음이 닿는 그 느낌을 받고 싶었나봐요. 누구누구 덕분에 두산베어스 팬이기도 했고요.”
“아, 나 말이냐?”
“여기 누가 또 있는데요?”
“내가 제대로 가르쳤구나. 하하.”
“혼자 가기 뭐해서 예니 불렀어요.”
“아, 이런. 그런데 너희 대체 나 몰래 얼마나 자주 만난거냐?”
“얼마나 자주 만났냐고요? 충분히 자주 만났어요. 어차피 예니도 기획사들 눈에 다 들어 있는 아이니까 지니랑 어울린다고 딱히 신경 쓸 이유는 없었겠죠. 어차피 그 불여우가 매니저도 경비원도 다 구워삶았고. 아시죠? 예니 여우인거?”
문득, 예니가 런던으로 이사 간 뒤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참 오래되었구나 싶어 마음 깊이 그리움이 사무쳤다. 하지만 그 시절, 깜찍한 여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감정을 감추기 위해 애써 차분한 태도로 물었다.
“그래 그렇게 만나서 뭐했는데?”
“화성법 배웠어요.”
“왓 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나는 놀라면 영어가 튀어나오는 버릇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예진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클래식 하는 애들은 뭔가 정통으로 배우지 않을까 싶어서요. 우린 그냥 노래하면서 익히거든요. 계통도 없고, 기준도 없고.뭘 배운 건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정리하고 싶었어요. 나름 공부 좀 해보겠다고요. 아이돌도 뮤지션이라고욧!”
“아, 내가 뭐라 그랬냐? 그냥 어딜 가도 넌 모범생 기질을 못 버린다 싶어서.”
“그러셔요? 그럼 실망하실 걸요? 그런 이야기만 한 건 아니니까요.”
예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절대.”
나는 보나마나 아빠 흉봤구나 싶어, 더 묻지 않았다.
“야구 보러 가자니까 예니가 너무 좋아했어요. 그래서 두산 홈경기 날짜 맞춰 1루쪽 좋은 자리 잡았죠. 예니는 유니폼, 모자, 응원막대 깔맞춤으로 나타났어요.”
“누구 유니폼이든?”
“허경민.”
“잘 골랐네. 넌?”
“정수빈 유니폼하고 모자 사서 꾹 눌러쓰고 들어갔어요. 기왕이면 아이돌끼리 도와야죠? 신나는 시간이었어요.”
내 기억에 ‘지니’는 두산 베어스 팬임을 방송에서 여러차례 밝혔고, 시구도 자주 했고, 두산 선수들과 예능에서 티키타카 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주었다. 애석하게 상대는 정수빈이 아니라 유희관이었지만.
그래서 나는 예진이가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늘 박수 받는 자리에 있다 거꾸로 관객의 자리에서 함께 웃고, 소리치고 박수 치는 경험이 얼마나 신선했을까?
“그러다 5회말 끝나고 클리닝 타임이 되었어요. 야구장에 온 연예인들에게 가장 모순된 시간이 온 거에요. 모자 꾹 눌러쓰고 마스크 쓰면 제 얼굴이 워낙 작아 눈밖에 안 보여요. ‘제발 알아보지 마세요’라는 뜻이죠.
그런데 야구장 카메라가 관중석을 훑거든요. 예쁘거나 독특한 행동 하거나 연예인 와 있으면 전광판에 보내요. 이때 기분이 묘해요.
전광판에 카메라 훑고 지나가는 화면이 커다랗게 나오는데, 내 얼굴 모르고 쓱 지나가면 서운해요. 웃기죠? 알아보지 말라고 꽁꽁 싸맸으면서도 못 알아보면 서운하단 말이죠.
그런데 카메라가 저를 두번이나 스쳐지나가는 거에요. 순간 드는 생각은 ‘안 들켰다’가 아니라 ‘마스크 좀 썼다고 날 못알아봐?’ 이거에요.
그런데 전광판 영상이 세번째 와서 제 얼굴에서 딱 멈췄어요. 야구장 카메라 감독분들 관중석에서 연예인 색출하는 건 도사에요. 처음 지나갈 때 알아 봤을 거에요. 세번째 와서 멈춘 건 관중들 애 닳게 하는 나름의 연출이죠. 다들 그렇게 프로랍니다.
슬슬 관중석이 웅성웅성. 그런데 전 오히려 안심되더라고요. 알아보지 말라고 칭칭 감싸놓고는 들키니까 안심되고. 정말 묘한 세계에요.
이럴 때 신인들은 어쩔줄 몰라하거나 모른척 해요. 하지만 저 같은 -죄송해요.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어서- 스타는 깨끗하게 승복하죠. 손 하트도 만들어 보여주고 손바닥 키스 날리기도 해주고. 당연히 ‘와아’ 소리가 메아리 쳤죠.
이때 치어리더 분이 단상에 올라가면서 손짓했어요.
‘챌린지 할래요?’
그럴 때 몇 번 손 사래 치다 자리에서 일어나 치어리더 동작 좀 따라 해주면 팬서비스는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거에요. 그런데 아, 내가 미쳤지, 단상으로 쪼르르 달려갔어요. 마음보다 다리가 먼저 반응했어요. 어어 하다 보니 단상에 올라와 있더라고요. 야구장이 난리가 났죠.
순간 음악 나오고. 치어리더 분들 댄스 시작하고. 전 그 안무 보고 바로바로 따라하고. ‘봐라 이것이 안무 복사기의 위엄이다.’ 이런 마음으로.
그렇게 한 바퀴 같이 돌고 난 뒤 치어리더 분들 내려가고 혼자 단상에서 춤췄어요. 완벽하게 그 안무로. 홈팀은 물론 원정팀 응원석까지 난리가 났죠.
눈물 터질 것 같았어요. 3만명의 사랑. 쌤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아세요? 그때 생각했어요. 난 이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그까짓 좀비 몇 마리가 속바지를 찍든 엉밑을 찍든 -물론 냅두겠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IP추적해서 고발할 생각이었거든요- 굴복해서 이걸 놓아버리면 안된다.
쌤. 아이돌 최종 목표가 뭔지 아세요? 스태디움 단독 공연이에요. 그런데 전 그거 했다고요. 너무 너무 행복했어요. 유노이아 이후 무엇을 할지 답을 얻었죠. 디렉팅, 경영진 됐고, 솔로로 가자. 애석하게도 경기 관람은 거기까지였지만.”
“아, 끝까지 안봤어?”
“큰일 나게요? 세이, 하린 언니 경희대 소동 아시잖아요? 이번에는 수만 명이라고요. 참사 나요.
6회초 시작하고 적당한때 슬금슬금 나가는게 매너에요. 선수들이 주인공인 공간이니까. 예니도 금방 이해했어요. 무대를 아는 아이니까. 하지만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아니, 전혀 그럴거 없어. 예니도 즐겼으니까.”
나는 고개를 저어 예진이를 안심시켰다.
사실 후폭풍이 있긴 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당연히 이 해프닝은 신문에 나왔고 인터넷으로 돌았다.
“유노이아 지니, 야구장 단상에서 ‘역대급 팬서비스’ 화제”
“두산 팬 아니랄까봐. 지니, 단상 뚫고 홈런급 무대 선사”
이런 식 기사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깜짝 놀란 기사는 따로 있었다.
“지니 옆자리 미모의 여학생, 알고 보니 첼로 요정 예니”
“유노이아 지니, 첼로 신동 예니, 야구장 깜짝 투샷… 친 자매 같은 절친”
예니가 대중에게 완전히 노출되었다. 물론 예니는 스스로 ‘아이돌’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건 클래식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니와 자매 서사로 묶여버리고 대중매체를 타면서 사태가 엉뚱하게 흘러갔다.
트리오 디누 공연이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트리오 연주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아닌, 예니 얼굴 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당연히 클래식 관람에 요구되는 객석 매너를 갖추지 않은 관객이 늘어났다.
클래식 공연에서는 관객이 내는 사소한 소음에도 연주자 컨디션이 흔들린다. 더구나 로사, 마리는 스물 둘, 예니는 열 아홉. 거장이 아닌 소녀들이었다.
연주가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로사는 아무려면 어떠냐 분위기였지만, 아버지 디누를 닮아 연주 퀄리티에 극도로 민감한 마리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고, 예니는 자기 잘못인 것 처럼 심한 최책감을 느꼈다.
예진이 안심시키느라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그때 나는 엄청나게 화가 났었다. 나 몰래 둘이 만났던 것도 화나고, 예진이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예니 커리어가 위기에 처한 것도 화났다. 그런데 예니는 화 내는 나를 향해 왜 화를 내냐며 화를 냈다.
“내 커리어야. 내 무대고. 내가 미안한 건 로사, 마리 언니지 아빠가 아니고.”
이게 예니가 남긴 냉정한 마무리 발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니의 어마어마한 일탈이 일어났다. 유노이아 미국 투어에 따라가버린 것이다. 태평양을 건너 가출을 하다니.
더 기막힌 건, 예니가 단순히 예진 언니 따라 구경 간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뤼미에르와 6개월 짜리 임시 전속 계약을 체결하고 유노이아 공연 무대에 올랐다. 소속사인 클래식 에이전시 EMA 인터내셔널에 “6개월 뒤 트리오 디누에 반드시 복귀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하고, 그에 따른 공식 활동 허가서도 발급받았다. EMA와 뤼미에르 간에 다음과 같은 상호 양해각서(MOU)가 체결되었다.
“EMA 소속 아티스트를 6개월간 임대하되, 클래식 아티스트로서의 품위와 브랜드가 훼손되지 않도록 유의하며, 계약 종료 후 원소속으로 원활히 복귀시킨다.”
빈틈없이 준비된 가출이었다. 더구나 이 모든 양식에 필요한 법정 보호자 사인을 아내가 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나는 대체 그 아이의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아내는 내가 보지 못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동안 들인 엄청난 레슨비, 수많은 국제 콩쿠르 수상 경력들이 아까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예니마저 엔터 자본에 낚이고 말았다는 생각에 분노했을 뿐이다. 외고생 예진이를 데려간 것도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 클래식 인재까지?
자본의 탐욕에 분노했다. 무슨 일을 하건, 어떤 재능을 지녔건 상관없이 단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팔아치우려는 그 얄팍한 상혼에 치가 떨렸다.
지금 돌아보면, 예니는 도리어 나에게 약속을 한 것이었다. 6개월 뒤, 나는 반드시 클래식으로 돌아올게.
나는, 왜 그 약속을 읽지 못했을까? 그때부터였다. 나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불여우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
“쌤. 또 다른데 가 계시네?”
예진이의 목소리가 나를 깊은 회한에서 깨웠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을 돌렸다.
“미안. 참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이주란.”
“네?”
예진이 자다 봉창 두드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니 이야기 하다 말고 갑자기 이주란을 꺼내니 그럴 만 했다. 하지만 예니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희가 그 디지털 성폭력 때문에 힘들어 할 때, 이주란, 그 사람이 역할을 별로 안 한 것 같아서. 젠더 문제에서는 굉장히 단호했잖아? 거의 페미 전사 같이 느껴졌는데?”
“그랬죠. 그 분, 젠더 문제에서는 정말 단호했죠. 항상 우리 편이고. 그래서 디지털 성폭력으로 우리가 힘들어 할 때 뭔가 앞장서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미국 투어 준비하면서 황홀경에 빠져 있어서 다른 사람 돌아보지 않았어요. 판타스틱한 무대, 오페라처럼 거대한 서사,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성숙한 매력을 드러내며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신화적인 이야기. 완전히 도취되어 있었어요.
그 분, 미대 출신이에요. 평생 그리고 싶었던 그림이 펼쳐지니 거기 완전히 빠져버린 거에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이주란 이사가 우릴 아낀 것이 사람이 아니라 귀중한 재료라서가 아니었을까? 자기가 꿈꾸는 작품, 살아 움직이는 작품을 만드는 재료. 그 사람은 그림 그리는 예술가였고, 우리는 물감이 아니었을까?
이 무렵 그 분에 대해 실망한 사건이 또 있었어요.”
“디지털 성폭력 같은 일이 또 생겼어? 아니면 스토킹? 사내 괴롭힘?”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음. 좀 비슷해요. 다만 다른 회사 일이죠. 루미 언니가 칸나를 나왔어요.”
“아, 그런 일이? 칸나 하면 루미 아니었나?”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주리 언니가 너무 속상하죠. 유노이아로 치면 루미 언니는 소이, 주리 언니가 전데? 어쨌든 루미 빠진 칸나는 칸나가 아니긴 하죠.”
칸나는 온 국민이 다 알다시피 하는 유명한 팀이고 루미가 그 칸나의 핵심 멤버라는 것 역시 온 국민이 다 알 정도였다. 나는 대중음악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정도까지만 알았지 루미가 칸나를 탈퇴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대체 왜?”
“정산 비율 때문에 소속사와 싸웠어요. 칸나 멤버 수입은 대부분 일본에서 나왔어요. 한국에서 발생한 수익은 계약을 어떻게 했는지 대부분 회사가 가져갔죠. 루미 언니가 이 부분 지적하자 뜻밖에도 회사가 재계약을 포기했어요. 당사자가 가장 충격 받았겠지만 업계 전체가 충격 받았어요. 한국, 일본 두 나라에서 여신으로 군림하는 탑 아이돌을 너무 쉽게 포기했거든요. 마치 ‘너가 그렇게 잘났어?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어. 까불지 마.’ 이러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바로 칸나 결원 보충 오디션을 공고했어요.”
“나도 놀랐어. 칸나는 스태디엄 급 걸그룹이잖아? 그런 그룹의 비주얼 센터를 좀 대들었다고 바로 내쳐?”
“그 회사, 루미 언니 포기함으로써 다른 아이돌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 거에요. 정산율 가지고 시비 털면 루미조차 용서없다 이런. 그게 전체적으로는 더 이익이었건 거죠. 루미 언니한테 밀리면 좀 성공했다 싶은 아이돌들이 다 정산 올려달라 대들테니. 반대로 루미 언니 내치면 그 회사 뿐 아니라 다른 회사 아이돌들까지 서늘한 공포를 느끼죠. 루미를 저렇게 쉽게 자른다고? 그럼 나는?”
“그래서 루미는 어떻게 했어? 일본으로 돌아갔어? 그 길 밖에 없을텐데?”
“다엘 언니가 뤼미에르 오라고 설득했어요. 솔로로 활동하든, 언니를 중심으로 새 팀을 만들든 다 가능했으니까. 그런데 잘 안 됐어요. 전 소속사가 스스로 내쳤으면서도, 이적만큼은 집요하게 막았어요. 보기 드물 만큼 더럽게요.
이주란 이사가 힘이 되어줄 줄 알았는데 마음이 태평양 건너에 있었어요. 미국 투어. 평생 그리던 무대. 예전엔 그렇게 비판하던 업계 영감님들하고 괜히 각 세우지 않으려고 눈치 보는 게 느껴졌어요. 혹시라도 투자 많이 들어가는 미국 투어 흔들릴까 봐요.”
그 말에 나도 실망했다. 부정적이었던 이주란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바뀌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버린 느낌.
“결국 실패했어?”
“아뇨. 들어왔어요. 한 달 만에.”
“그렇게 금방?”
“끝내주는 일이 일어났어요. 남은 칸나 멤버들이 한꺼번에 탈퇴했어요. 그 회사가 붙잡고 늘어질 핑계가 사라졌죠. 결국 개싸움 포기하고, 루미 언니는 뤼미에르 품에 들어왔어요.”
“와 멋지다.”
“그렇죠? 칸나의 다른 언니들이 쫓겨난 루미 언니를 위해 스스로를 내던질 줄 몰랐던거죠. 결과적으로는 뤼미에르가 유노이아가 건재한 가운데 루미 언니까지 얻은 격이 되었죠.
뤼미에르의 여성 아티스트는 이주란 이사 총괄이니 그 분 힘이 더 세졌고.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버쩍 들었는지 이주란 이사가 솜씨를 발휘하더군요. 마인 그룹이 일본에도 있잖아요? 그래서 탈퇴한 칸나 멤버들을 일본 마인 소속의 カナ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하고, 뤼미에르는 마인 일본 법인과 소속 아티스트 상호 교류 계약을 체결했어요. 일본 마인은 루미를 뤼미에르는 나머지 칸나 멤버를 임대하는 거죠. 이렇게 되면 사실상 뤼미에르가 칸나 완전체를 확보한 게 되죠. 칸나 전 소속사가 등록한 상표는 ‘칸나’지 カナ가 아니고, 아무리 뤼미에르나 일본 마인이나 같은 회사라도 법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회사니까. 전 소속사에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거죠.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이주란 이사는 칸나를 선망하던 소녀들을 데리고 유노이아라는 걸그룹을 만들어 엔터판에 도전장을 던졌고, 유노이아를 칸나급으로 키웠어요. 그리고 마침내 칸나마저 자기 품에 안은 거라고요. 여왕이 되어버린 거죠.”
“그때부터였구나. 그 사람이 흑화된게.”
“그러게요. 하지만 그때 이주란 그 분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너무 행복하고 꿈만 같아서. 칸나와 같은 연습실, 같은 거울 앞에서 춤출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루미 언니는요, 8마디 안무 안에서 청순, 섹시, 걸크를 다 표현할 수 있어요. 30초 만에 다른 사람 되는거죠. 이걸 객석이나 영상으로 보는 것과 연습실에서 눈 앞에서 보는건 엄청난 차이에요. 배울 게 정말 많았어요.
소이는요, 연습실에 들어왔더니 루미 언니가 있는 걸 보고 그냥 얼음이 되었어요. 그런데 언니가 ‘안녕’ 하고 웃자, 바로 주저앉아서 울었어요.”
이 대목에서는 나도 같이 감격했다. 방송국 복도에 서서 칸나가 지나가자 고개도 못 들고 90도로 숙이고 있어야 했던 소녀들. 이제 그 소녀들이 자라서 루미와 같은 거울을 보며 춤을 추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루미의 불행한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도 예진이도 더 이상 이야기가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