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소설 별이잠드는 바다 26화 모래위의 이데아 1
8월 중순.
퇴직 전이었다면 끝나가는 여름방학이 아쉬워 마음이 무거웠을 때. 몸과 마음이 너무 싱싱해 오히려 낯설었다.
나는 경주 남산 자락에 자리잡은 한옥 펜션에 차를 세웠다. 네 시간 넘게 혼자 운전하고 왔지만 음악과 함께 왔기에 지루하지 않았다. 유노이아는 아니고, 모차르트 피아노 3중주를 들으며 왔다. 트리오 디누의 연주였다.
예진이는 “마지막으로 길고 심각한 이야기가 남았어요. 카페 같은 데서 하기 어려워서 펜션 하나 잡았어요. 사모님께 오해받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되요. 와 보시면 아세요.” 이런 메시지와 함께 날짜, 시간, 그리고 네비게이션 좌표, 그리고 펜션 대문 비밀번호를 보내왔다.
황리단 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한옥 한 채를 통째로 빌린 모양이다.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가니 침실 두개, 욕실 두개, 그리고 거실 하나를 사용하는 구조였다.
침실 중 작은 쪽에 내 짐을 풀어 놓으려 했는데 이미 캐리어 두개가 나란히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벌써 왔나?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혹시나 싶어 풀 쪽에 가 봤지만 물 한 방울 고여 있지 않은 메마른 타일 바닥만 보였다.
어차피 오겠지 싶은 마음에 대청 마루에 앉아 스마트 폰으로 유노이아의 문제작 ‘러브 오브젝트’ 뮤직 비디오를 열었다. 미국 투어 직전에 리메이크한 버전이었다.
첫 장면은 각종 오브젝트의 전시장.
유노이아 멤버들이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이른바 ‘청순돌’ 차림을 하고 있는데, 남자들이 그 사이를 다니며 이 청순돌 오브젝트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때 첼로가 연주하는 거친 바로크 메탈 인트로가 들리더니 오브젝트들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첼로가 예니 연주라는 것을 금새 알아들었다.
오브젝트들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멤버들이 조금씩 움직였고 첼로 연주가 점점 더 격렬해지고 EDM까지 쏟아져 나오면서 조명이 밝게 변하고 멤버들이 청순돌 복장을 석고처럼 깨뜨리고 나왔다. 멤버들은 컷이나 슬릿이 많이 들어간 섹시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야하기 보다 도발적으로 보였다.
하린이 카메라에 얼굴이 가득하게 보일 정도로 다가오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너의 눈을 스친 내 그림자가 낯설게 느껴져, 익숙한 표정과 말투 속에 점점 지워져 가는 나.”
그리고 다른 멤버들이 일제히 군무를 하며 코러스가 따라 나왔다.
“러브 오브젝트 러브 오브젝트 나는 거부해. 나는 주장해.
나는 감상되지 않아. 나는 느끼는 존재”
중앙에서 지니와 다엘이 선이 굵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엘이 중앙까지 치고 나와 춤추는 것은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었지만, 이 시크하고 도발적인 장면에 무척 잘 어울렸다.
그러는 동안 소이가 냉랭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자기들을 관람하던 남자들을 하나 하나 눈 빛으로 굴복시켰다. 구경하던 남자들이 구경 당하는 위치가 되었다.
멤버들이 마치 지젤의 빌리처럼 군무로 그들을 몰아세우고 지니가 스킬라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중앙으로 뛰어나와 굉장히 복잡한 춤을 추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자 세상이 완전히 새로운 세계, ‘그들만의 판타지’로 바뀌었다.
이걸 무대로 옮기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었겠구나 싶었고, 그래도 옮길 수만 있다면 굉장히 멋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이주란의 평생 한 풀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다른 곡들도 대체로 분위기가 도발적이거나 판타스틱했다. 아폴로에 맞서는 칼리오페라는 엉뚱한 발상에서 시작되는 ‘No more Muse’, 욕망의 대상이 아닌 스스로 서사를 써 나가는 주체로서의 여성의 신체를 노래하는 ‘Body script’, 그리고 유노이아 판 ‘다시 만난 세계’라 할 수 있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 기반의 몽환적인 ‘Myth Maker’ 같은 곡이 이어졌다.
보통 앨범 하나 내면 뮤직 비디오는 두 개 정도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앨범에서는 다섯 개나 만들어 놓았고, 그 하나하나가 독특한 미술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이주란이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은 느낌이었다.
영상도 영상이지만 음악도 실험적이었다. 청순 컨셉에 갇혀 있던 세이와 하린이 그 동안 하고 싶었던, 혹은 이미 해 두었지만 공개하지 않았던 것들을 아낌없이 쏟아낸 것이다. EDM, 록, 클래식의 요소들이 섞여 있었고, 하린이 마치 오페라 디바처럼 전면에 나와 상당히 긴 애드립을 구사하는 장면도 많았다.
“아이고, 소리 좀 줄이시지. 담장 밖으로 다 들려요.”
예진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유튜브 앱을 닫았다.
예진은 지난 반년간 봤던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복장이었다. 커다란 밀집 모자. 펄렁거리는 박스티, 무릎 살짝 위까지 내려오는 편안한 쇼츠, 그리고 플릿 플랍. 어깨에는 식재료와 간식이 들어있는 에코백을 메고 있었다.
나는 예진의 허술한 복장에 놀랐고, 이렇게 허술한 복장으로도 미모가 유지되는 것에 또 놀랐다.
그 동안 얻어낸 정보를 활용해 한 마디 던졌다.
“설마 그 옷이랑 조리도 셀린느는 아니겠지?”
바로 샤오룽바오가 나왔다.
“쌤, 저 명품에 환장한 애 아니거든요? 에이치엠 박스티와 쇼츠, 조리는 회사는 모르겠고, 무려 만구천구백 원짜리에요. 예쁘죠?”
예진이 플릿 플랍을 쳐 올리렸다. 발등이 드러나며 햇빛에 반짝거렸다.
“셀린느 여기 있네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 설마가 아니었다. 그것은 예니 목소리였다. 지난 5년 동안 콘서트때 잠깐 본 게 전부였던 딸 예니.
“네가 어떻게?”
“지니 언니가 와 달라고 해서.”
“어째서?”
예진이 대청마루에 털퍼덕 앉으며 말했다.
“책임감 강한 김예진 회장이잖아요? 결자해지 해야죠.”
예진이는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내가 야구장의 그 사건을 예니가 멀어지게 된 계기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이 두 사람 사이를 다시 맺어줘야 한다고 책임감을 느꼈던 것이다. 15년 전 우리반 회장 김예진 처럼.
예니는 하늘빛 크롭 톱, 셔링이 들어간 스커트, 허리를 감싸는 얇은 골드 로고 벨트, 아이보리 빛 모드 샌들, 군더더기 없는 직사각형의 토트백을 맨 세련된 모습이었다.
“네가 무슨 돈으로?”
맙소사. 3년만에 만난 딸에게 이 따위로 대화를 열다니. 내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이다.
예니가 어이없다는 듯 깔깔 웃었다.
“아빠 하나도 안 변했네.”
그리고는 시크하게 토트백을 툭 들어 올렸다.
“이거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다 지니 언니 거. 아침에 만났는데 너무 예쁘잖아?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내가 입어봤어. 폼 좀 내려고 황리단길 활보하고 오는 길이야. 그런데 언니가 같이 가자고 하더니 저 꼴로 같이 돌았어.”
나는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눈앞에는 맵시있게 차려입은 기품 있는 젊은 숙녀가 서 있었다. 그랬다. 예니는 10대 소녀가 아니다. 어느새 스물 일곱이고, 트리오 활동 경력으로는 13년차나 되는 베테랑이다. 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었다. 잊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예진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됐고. 도로 벗어서 잘 개 놔.”
“안 그래도 나 좀 자야 해. 시차 때문에 미치겠어. 참, 아빠 퇴직 축하해요.”
예니가 하품을 하더니 방으로 쓱 들어가버렸다.
“자, 그럼 우리는 늘 하던 이야기 이어갈까요?”
예진이 플릿플랍을 달랑달랑 흔들다 휙 떨쳐버리고 대청 마루에 반가부좌 자세로 앉았다.
“미국 투어 할 참이죠?”
“안 그래도 그 앨범 듣던 중이었어.”
“미국 투어 가기 전에 깜짝 놀랄 일이 생겼어요. 사실 저한테는 무척 반가운 일이었고, 살짝 무섭기도 한 일이죠.”
“오, 그거 궁금한데?”
“메모리아가 뤼미에르로 들어왔어요.”
“뭐라고? 와, 이거.”
“정확히 말하면 메모리아 소속사를 뤼미에르가 송두리째 사버렸죠. 마인 그룹 다운 행동이고, 기존 엔터사 상식을 초월한 행동이죠.
기존 엔터사들은 경쟁사가 강한 팀을 내면 흠집 내고, 이간질 하고, 루머 퍼뜨리고, 멤버 빼돌리고, 아니면 자기네도 강한 팀을 내죠. 그런데 뤼미에르는 껄껄 웃으며 사버려요. 대형사라고는 해도 소위 딴따라 판에서 잔뼈가 굵은 기존 영감님들하고 사고의 차원이 다른 거죠.
우리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연습실에 들어가는데 메모리아 녀석들이 숨어있다가 ‘서프라이즈’를 했어요.
출국 전 유노이아 북미 투어 출정식을 올림픽 체조에서 칸나, 유노이아, 메모리아 합동 콘서트로 했어요. 대단했어요. 상상해 보세요. 칸나, 유노이아, 메모리아가 한 무대에. 다른 회사에서 보면 오싹하고 다리가 후덜덜 떨리지 않았을까요?”
“내가 봐도 오싹하다. 완전 제국이네.”
“그렇죠. 그 가운데서 이주란 전무 -승진했어요 가 마치 마리아 테레지아처럼 버티고 있었어요. 제작비를 쏟아 부어가며 뮤비를 다섯 개나 찍고 이 뮤비를 그대로 무대로 옮긴다며 엄청난 세트를 제작해 가며 미국 투어 준비하는 건 일종의 정화의 함대 같은 거죠. 그때 그 분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결국 그 기분이 그 분을 망친 거에요.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런 생각 안 했죠. 마냥 행복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함께하게 되었잖아요? 칸나를 선망했던 유노이아, 유노이아를 선망했던 메모리아가 모두 한 지붕 아래서 이야기를 이어가다니. 너무 행복할 때 의심하고, 불행은 항상 행복의 정점에서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는 저가 너무 젊었죠.”
“미국 투어는 어땠어? 예니까지 데려갔잖아?”
예진이 정색했다.
“예니는 단기 전속 계약 맺고 스스로 참여했어요. 이건 분명히 하셔야 해요.”
“왜 그랬을까? 그렇게 내가 미웠을까?”
“아, 쌤.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예니 그런 애 아니에요. 예니를 딸 아이 말고 아티스트로 생각하셔야 해요. 그럼 답이 나올 거니까.”
“고작 열 아홉이었는데.”
“열 네 살에 데뷔시켜 온 세계로 돌린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죠. 예니는 그때 6년차 베테랑이었다고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말을 바꿨다.
“잘 했어? 예니?”
“잘했죠. 놀랄 정도로. 러브 오브젝트의 그 격렬한 솔로. 공연 때 그거 리프트 위에서 했거든요. 완전 여신 포스였어요. 하린 언니 피아노 반주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도 들려주었죠. 빛과 그림자로 구성된 무대와 너무 잘 어울렸어요. 그것 말고도 예니는 공연 내내 높은 곳에서 일종의 라이트 모티브를 연주했어요. 그런데 클래식 연주복이라는게 음, 걸그룹 못지 않던데요?”
“음. 그런 면이 있긴 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도 클래식 여성 연주자 드레스가 너무 선정적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쌤. 예니가 우리 북미 투어 같이 간 진짜 이유 아세요? 그걸 예니한테 꼭 들으셔야 해요.”
“예니 일어나면 얘기 할게.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좀.”
“아, 쌤도 영락없는 한국 아버지시네요. 네. 제가 있어드릴게요. 쑥스러워서 그러시죠?”
“그래 고맙다.”
“그럼 북미 투어 계속 가 볼까요? 가기 전에 스포티파이 계속 체크했어요. ‘러브 오브젝트’ 가 계속 터지는 중. 팔로워가 300만명 넘어가고 ‘러브 오브젝트’ 앨범에 수록곡 중 두 곡이 스트리밍 2억을 넘겼고, ‘블루밍 데이즈’를 비롯한 예전 곡들 중에도 1억 짜리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여기 따라 미국 투어 규모가 정해졌어요. 3000-5000석 규모 콘서트를 12주에 걸쳐 미국 주요 도시와 토론토, 밴쿠버까지 모두 22개 도시에서 하는 걸로. 강행군이죠. 그냥 미국하면 생각나는 도시는 다 가봤다고 보시면 돼요.”
“즐거웠니?”
그러자 예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우리 팅커벨이 빛을 잃었다고 했죠? 소이는 칸나랑 메모리아가 합류하면서 기운을 좀 차리긴 했지만, 여전히 무대에서 시선 받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그래도 프로고 책임감이 강한 아이라.”
“으응?”
“아이. 제가 쌤한테 소이 이미지를 영 이상하게 전했나봐. 텅텅 그러시지 않나 책임감 그러니까 으응 하시지 않나. 제가 잘못했네요. 책임감 없는 애들은 센터감으로 고려 되지도 않아요. 팀 얼굴로 그 많은 시선을 정면에서 받는 게 예쁘다고 되는 줄 아세요? 소이는 5년간 그 일을 해 냈어요. 그 변태 놈들만 아니었으면.
소이는 이 투어가 마지막 무대라고 각오 한 느낌이었어요. 여전히 두려워했지만 책임감 있게 포지션 하나 각도 하나 빈틈없이 수행했죠. 문제는 다만 수행했다는 것. 마치 과업처럼. 다행히 세트가 웅장하고 조명도 깊어서 무덤덤하게 과업을 수행하는 소이가 신비롭게 보이기까지 했죠. 그래도 우리 눈까지 속일 수는 없죠.”
“그래서 어떻게 했어?”
“전원 센터급 비주얼 유노이아잖아요? 다른 멤버들이 바로 커버했죠. 예전 곡들로 진행되는 1부에서는 제가 하드 캐리 했어요. 미국 팬들과 소통하려면 영어 되는 제가 전면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새 앨범으로 진행되는 판타스틱한 2부에서는 평소 뒤에서 조율만 하던 다엘 언니가 무대 전면에 나섰어요. 공연의 드라마 부분은 세이 언니가 감당했고, 하린 언니는 아예 리프트 태워 높이 올려서 셀렌 디온 포스로 노래하게 했죠. 리프트 한 쪽에는 예니, 다른 쪽에는 하린 언니 이렇게.”
“하린이도 상처 받았다고 안했어?”
“그래서 리프트 태워 올린 거에요. 소이가 다친 건 사랑에 대한 믿음이지만 하린 언니가 구겨진 것은 예술가의 자존심이거든요. 그래서 객석을 내려다보는 자리로 올려버린 거죠. 굽어보며 노래하라고. 물론 이렇게 하면 몰카도 방지되고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야아. 대체 그런 생각을 누가 한 거야?”
사실 짐작가는 답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진이 이렇게 말했다.
“이주란.”
“인정 할 수 밖에 없네. 그 사람 천재야.”
“그건 다 인정해요. 심지어 적들조차. 그래서 더 안타까워요. 그 분이 망가진 거. 미국 투어는 그 분 인생의 정점이었어요. 하지만 거기 너무 도취된 나머지 점점 이런 말 미안하지만 망상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면회는 가 봤니?”
“저희 멤버 모두 중요 증인으로 되어 있어서 면회가 안되요. 상고심 얼마 안 남았으니 그거 끝나면 되겠죠. 그런데 본인이 거부할 거에요 아마.”
“그렇구나. 참 딱하네.”
“세인트 헬레나의 나폴레옹이죠.”
“그렇게 우리 졸업여행도 막을 내렸죠.”
“졸업여행이라.”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 투어는 겉으로는 ‘걸그룹이라고 깔 보지 마라. 우린 이 장르를 이렇게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선언이죠. 하지만 공연을 준비한 우리한테는 ‘걸그룹’이라는 틀, 아이돌 댄스와 음악의 문법이 장애물이었어요. 그 안에 머무르면 제대로 표현이 안되고, 제대로 표현을 하면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니게 되는 상황. 훌륭한 공연이긴 했지만, 걸그룹이라야 하는 공연은 아니었어요.
이미 세이, 하린 언니는 1000석 이내 중소극장에서 진지하게 청중과 소통하는 공연을 그리고 있었어요. 소이는 불특정 다수가 아닌 자신이 선택한 공간, 선택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베푸는 그림을 그렸고, 저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꿈꾸었죠. 다엘 언니는 디렉터로 마음을 굳혔고.
모두 끝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후회는 없었어요. 유노이아는 우리 학교였고, 우리는 살아남았고, 다섯 동창생이 영원히 자매가 될 거니까요.”
나는 예진이가 한 마지막 문장에 울컥했다. 철들자 마자 가족에 대한 부담감 속에 살아야 했던 예진에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이 아닌 기대고 안길 수 있는 가족이 간절했던 것이다.
예진이 감상적이 되지 않으려고 주제를 돌렸다.
“정산이 엄청났어요. 굉장한 졸업선물, 혹은 퇴직금이 나왔죠. 심지어 예니도 1억 넘게 받아 갔으니까요.”
“뭐? 예니가? 1억 넘게?”
“어머, 이건 말하지 말 걸 그랬나?”
예진이가 당황했지만 나는 오히려 차분했다. 당시 예니가 100분 정도 공연하고 받는 개런티가 300만원 좀 안되었다. 1억이라면 1년 내내 연주해야 만질 수 있는 돈이다. 나는 예니에게 놀랐다. 그런 거금을 두 달 만에 벌었는데 흥분하거나 들뜨지 않고 차분히 클래식 아티스트로 돌아온 것이다.
예종 자퇴하고 대뜸 런던으로 건너가버린 것은 괘씸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예니가 예종에서 배울 게 있기는 했을까 싶기도 했다.
예니는 그렇게 학적 없이 연주활동 몇 년 하다 코로나로 무대가 막히자 런던 킹스 칼리지 음악학부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부모에게 전혀 손 벌리지 않았는데, 그 군자금이 여기서 나왔다.
중학교 3학년 때 가난과 꿈 사이에 갈등하다 예고 학비를 얻어 내려고 나를 불러냈던 예진이. 그런데 그 예진이가 예니의 유학 학비를 대 준 셈이다.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려 감정을 감추었다.
“그래 유노이아 졸업식은 잘 했어?”
“아, 그거요? 졸업인 줄 알았더니 진학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미국 투어 정리하고 한국 돌아갔는데 쫑파티 때 이주란 전무가 멤버들 진로 상담을 했어요. 이미 2017년 여름 이후 유노이아 활동중지를 기정 사실로 못박아 두었더군요.
하지만 ‘유노이아’ 이름은 계속되었죠. 걸그룹이 아니라 토털 뷰티 제국의 이름으로. 청담동에 있는 뤼미에르 사옥에 ‘유노이아, 뷰티 뮤지엄’ 이라는 부띠끄가 세워졌어요. 다엘 언니가 대표, 소이가 수석 콘설턴트죠.
고급 옷가게 같은게 아니에요. 부띠크도 하지만, 이벤트 기획도 하고, 모델 에이전시도 하는 그야 말로 렐름 오브 뷰티였죠. 철저한 회원제 및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었어요.
외부와 격리된 상담실, 피팅룸, 전용 런웨이가 있고, 선택 받은 고객은 소이를 개인적으로 만나 헤메코 전반에 대해 상담 받고 거기 맞춰 해당 아이템을 구입하는 시스템이에요. 그 자리에서 전담 헤메코 팀이 붙어 구입한 아이템에 맞춰 스타일링 해 주기도 하고, 간혹 소이가 직접 터치해 주기도 했어요. ‘하퍼스 바자’가 선정한 2016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top 10에 꼽힌 소이와 마주보고 뷰티 컨설팅?
그림이 안 그려지시면 묘사해 볼께요.
소이가 ‘지금 이 무드에는 약간 더 가볍게, 귀를 덮으면서도 얼굴선이 살아나야 해요. 그리고 로로 피아나 캐시미어 케이프랑 매치해 보죠.’ 이러면 헤어 아티스트가 바로 머리 손질 들어가고, 코디네이터가 캐시미어 케이프 들고 와서 고객 어깨에 딱 걸쳐주죠.
그럼 소이가 ‘지금 이대로 외출하셔도 되고, 핑크빛 립만 하나 추가하면 완벽해요.’ 이렇게 마무리 하죠. 그럼 최종 견적이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로로 피아나 캐시미어 케이프: 3,680,000
-헤어라인 미세커트: 100,000원
-유노이아 소프트 스타일링: 100,000원
-샤넬 루즈 핑크: 300,000원
합계: 4,180,000원
만약 소이가 직접 헤어, 메이크업 터치 해주거나 아이템 착용하는데 손이라도 얹었다? 이러면 거기에 다시 프리미엄 엄청 붙지만, 그 마저 서로 못 내서 안달이고요. 이건 ‘소이’가 아니라 ‘소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객이나 기대할 수 있는 거라.
네네, 쌤 얼굴에 거부감이 확 느껴지는거 보여요. 저도 그래요. 한 마디로 아주 돈 많고 힘 있는 여성들에게 소이가 자기 아름다움의 비법을 아주 비싼 돈 받고 가르쳐주고, 그 과정에서 명품들도 슬쩍 슬쩍 팔아치우는 가게죠. 다엘 언니는 그 고객들 꼼짝 못하게 관리하면서 마치 사교계처럼 조직하고.
그 회사의 진짜 힘은 모델 에이전시와 이벤트 사업에서 나왔어요. 뤼미에르 소속 아티스트들의 패션 관련 광고를 중개했거든요. 저도 여기 소속 모델이에요. 지금까지.
이벤트는 VIP를 상대로 프라이빗 이벤트나 기업 컨벤션 같은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했어요. 업무 자체는 기획사와 비슷하죠. 큰 행사는 다엘 언니가 MC까지 맡아 진행했고, 보통의 행사는 뤼미에르 소속 연예인과 연습생 투입하고 다디렉팅만 했죠. 연습생들 입장에선 경험치 올리고, 회사 입장에는 연습생 테스팅 베드로 요긴했죠.
진짜 VVIP행사일때는 소이가 나서서 노래하고 춤췄어요. 소이 등판 시키려면 세곡 한 스테이지 기준으로 3000 정도는 써야 했을 거에요. 소이는 이런 경우 아니면 공연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소가치가 엄청났죠.
다엘 언니와 소이가 5억원 씩 투자하고, 뤼미에르가 20억 투자했지만 두 사람의 IP를 지분으로 인정하여 지분율 49.9: 50.1로 하는 뤼미에르 계열사로 되어 있었어요. 본사 파견 이사로 누구겠어요? 이주란 그 분이 등록 되어 있었죠.
소이는 너무 좋아했어요. 디지털 성폭력 사건 이후 아름다움이 선물이 아니라 비뚤어진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멘탈 털린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검증된 소수의 사람들 앞에서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때로는 공연까지 할 수 있는 자리는 천국이나 다름없었죠.
소이가 이주란 전무의 숨겨 놓은 딸이란 헛소문이 왜 도는지 알겠더라고요. 이건 디지털 성폭력 사건으로 힘들어하던 소이에게 전용의 예쁜 패닉 룸 하나를 만들어 준 거나 마찬가지니까.
물론 그게 목적일 리는 없죠. 저게 별거 아닌 것 같죠? 걸그룹 만들어 행사 돌리는 것 보다 훨씬 ROI가 높아요. 기본적으로 팬덤 만들어 가두리에 가두고 굿즈 팔던 방식은 그대로인데, 팬덤의 재력과 굿즈 종류가 확 달라졌으니까요. 국내 뿐 아니라 여러 나라 외교관 부인들, 일본, 대만의 재력가들도 주요 고객이었죠.
하지만 이주란 전무의 망상은 다른데 있었던 것 같아요. 힘 있는 여자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남자들에 대항하는 여성 제국을 세운다? 이건 좀 너무 나갔나? 하여간 그런 비슷한 생각. 유노이아 뮤지엄이 어느새 가진 것 많거나 가방 끈 긴 30-40대 여성들의 살롱이 되었고, 이주란은 그 살롱의 마담 처럼 군림했죠.
첫 단추부터 잘못된 거죠. 고통받는 여성의 연대가 아니라 가장 혜택받는 여성들을 현실적인 힘이 있다는 이유로 동맹으로 선택했으니까. 딱 갑신정변이죠. 이주란은 김옥균, 다엘 언니는 박영효, 하지만 순진한 소이는? 그 기이한 혁명의 부적, 토템? 정말 딱한 신세네요.”
“세이랑 하린은?”
“같은 방식으로 5억씩 출자해서 음악 레이블 Mo:D를 세웠어요. 두 사람이 곡을 써서 뤼미에르 소속 아티스트들에게 제공하고, 프로듀싱도 하는 콘텐츠 공장이죠. 역시 명목상 대표는 세이 언니지만 뷰티 뮤지엄과 같은 방식으로 49.9: 51.1 % 지분으로 지배주주는 뤼미에르, 이주란 전무가 파견 이사죠. 처음 제안된 사명은 ‘유노이아 프로덕션’이었는데 세이 언니가 거부하고 새 이름을 지었어요. 유노이아 레거시에 의존하지 않고 두 사람 예술성으로 처음부터 승부 보겠다는 결기죠.
이렇게 유노이아는 해체된 게 아니라 엄청나게 확대되었어요. 유노이아가 뤼미에르를 슬금슬금 잠식 할 기세였죠. 저는 이주란 그 분이 유노이아 기획할 때 여기까지 생각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냥 이 과정 전체가 하나의 서사이고 자신의 작품인 거죠.
소름 끼쳐요. 우리 아름다움과 재능을 소재로 작품을 만든 것으로 모자라 우리 인생까지 작품으로 만들고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 못했죠. 그저 ‘와, 이 분은 아이돌 은퇴 이후 경로까지 다 준비해 두고 계셨어.’ 이런 감탄 뿐이었죠.”
“네 경로도 이미 짜여 있었겠네?”
“네. 아주 정확히. 일단 2018년까지 남은 학업 마무리 해서 졸업 하고, 2019년에 솔로 팝 가수로 컴백. 컴백 하기 전 1년 반 동안 이미지 유지 위해 유노이아 뷰티 뮤지엄 소속으로 CF모델 활동 병행. 완벽하죠?”
“걸그룹 유노이아만 해산했을 뿐, 그 멤버 다섯명 모두 뤼미에르 소속 그대로 남아서 활동하고 있었구나. 다른 회사 사례랑 딴판이야.”
“바로 그거에요. 더 확장된 IP로 활동 지속. 여전히 총괄 디렉터는 이주란. 단지 걸그룹 멤버였던 애들을 회사를 움직일 위치로 성장시키고, 그 뒤에 이주란. 이런 그림이죠.
더 무서운 건 이주란 이 분의 손에 레전드 칸나, 당시 대세돌, 국민돌이라 불리던 메모리아가 여전히 있다는 것이고. 문제는 그 분이 남자들과 싸운다는 서사에 취해서 남자를 깔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 무서운 사람, 최강국 대표를. 플랫폼 제국 마인의 설계자를.”
“다른 걸그룹 멤버들이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예진이 고개를 갸웃 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일단 겉으로는 충분히 부러워할만해요. 회사에서 해체 후 일자리까지 마련해 준 셈이니까. 현실적으로 20대 중반이면 경력이 끝나는 여성 아이돌의 은퇴 후 경로를 실험했다는 건 이주란 이 분의 선구적인 업적이긴 해요.
다른 팀은 3년차에 정점에 올라 빚 청산, 정산받기 시작하면 인기 꺾여 5년차면 덜컹대다 공기처럼 사라지니까. 빚이나 안 지면 다행이고, 성공했다 해도 2-3억. 이후 진로 정한 바 없고, 은퇴 자금으론 어림없고. 그런데 우리는 20억씩 쥐고 창업도 하고. 완전 꿀 빠는 걸로 보였죠.
대신 우리는 어어 하는 사이에 뤼미에르라는 황금 새장에 갇혀버렸어요. 꿀은 접착성이 강한 물질이죠. 꿀을 빨다보면 꼼짝 못하고 갇혀버리죠.
게다가 이주란 그 분이 착각한 게 있어요. 유노이아 활동을 하면서 우리 다섯명의 IP가 확대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만한 능력을 가진 멤버들을 모아서 유노이아를 만들었다는 것.
유노이아 모델은 절대 일반화 될 수 없는 모델이에요. 어느 걸그룹이라도 이주란의 손을 타면 유노이아 멤버처럼 성장해서 졸업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거죠. 자기 교수법만 따르면 제2, 제3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키울 수 있다고 믿었던 레오폴드 모차르트 같은 착각이죠.
물론 이건 인정해요. 이주란 디렉터가 아니었으면, 우리 멤버들은 내면의 여러 장점들 다 무시 당하고 그냥 외모로만 소모되었겠죠. 아마 서로 다른 네 개 팀의 비주얼로 투입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소리 없이 사라졌을 거에요.”
나는 예진이의 분석에 동의했다. 대부분의 걸그룹 멤버들은 다엘 같은 조직 관리 능력, 세이, 하린 같은 음원 제작 능력, 그리고 지니 같은 지적인 능력을 갖춘 멤버를 보유하지 못했다. 그래서 활동 기간이 학습과 성장의 시간이 아니라 소비되고 소모되는 시간으로 끝나버린다. 인형처럼 꾸며지고 인형처럼 소비되다 낡은 인형처럼 버려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