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소설 별이 잠드는 바다 27화 모래성의 이데아2
“유노이아 해체 후 1년 반이 제 인생의 가장 순탄한 시간이었어요. 남은 학점 빨리 채우기 위해 여름, 겨울 계절학기를 풀 타임으로 채우고 정말 미친듯이 공부했지만 싫지 않았죠. 모처럼 중학교 때 김예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고. 뷰티 뮤지엄 소속 모델로 CF나 피팅 촬영도 해야 했지만 걸그룹 시절에 비하면 일도 아니죠.”
“그 동안 벌어 놓은 돈 이자만으로도 생활비랑 학비는 충분하지 않았어?”
“1년 뒤 솔로 컴백 하니까요. 아시면서.”
나도 이제 그 바닥의 생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기에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아, 헤메코 기본 루틴?”
예진이 까르르 웃었다.
“맞아요. 몸 만들어야죠. 얼굴 정비도 해야 하고. 그거 컴백 임박해서 한다고 될 일 아니거든요. 더구나 ‘연예인 티 낸다’ 소리 안 들으려면 내추럴해 보여야 했거든요. 총장이 신부님인 학교라. 이젠 쌤도 아시죠? 그게 훨씬 비싼거.”
“네가 그랬지. 청순형 메이크업은 돈을 태워야 한다고. 참 다른 친구들도 잘 지냈어?”
“네. 화양연화의 시간이었죠. 유노이아 제국의 심장, 뷰티 뮤지엄은 연 매출이 100억 가까이 됐어요. 웬만한 중견 엔터사 규모죠. 다엘 언니랑 소이는 연봉 5억 정도는 가져갔을 거예요. 두 사람 차도 샀어요. 다엘 언니는 볼보 XC60, 소이는 미니 쿠퍼. 생각보다 소박하죠? 둘 다 허세보다는 스타일이라.
세이, 하린 언니는 음원 강자라, 그쪽이야 말로 숨만 쉬어도 돈 들어오는 구조였고요. 아이돌 시절에 늘 꿈만 꾸었던 소극장 전국 투어도 했어요. 춤 안 추고 노래하고 연주하는.
그런데 그렇게 번 돈을, 걸핏하면 괴랄한 실험 공연에 다 쏟아부었죠. ‘EDM과 피아노를 위한 녹턴 오버드라이브.’ 이런 거요. 저도 거기 끼어서, 그 분위기에 맞는 안무 짜서 같이 춤추기도 했고요.
티켓은 매진이었는데, 워낙 장비 설치비가 많이 들어 적자였죠. 그래도 그 두 사람이 제일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메모리아는 유노이아가 열어 놓은 미국 시장에 바로 뛰어들었어요.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치어리더 분위기 팀이고, 체격과 몸매가 좋은 친구들이라 바로 먹혔어요. 라틴계에 인기가 많아 주로 선벨트 지역으로 투어를 돌았어요. 루미 언니와 칸나는 여전히 건재했고, 이주란 전무가 훈련시킨 파스텔이라는 새로운 걸그룹도 출격했죠. 걔들 지금도 잘 나가고 있죠? 케이팝 선두주자 그러면서?
뷰티 뮤지엄은 우리 멤버들의 아지트였고, 예니도 트리오 멤버들과 들러가곤 했어요.
파우스트였나요?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참 아름답구나.’ 하고 외친 사람이? 딱 이 말이 나올만한 그런 시간이었죠. 하지만 그 말이 바로 악마를 소환하는 주문 아니었던가요?”
나는 예진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숨이 잠시 멎는 듯했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그 비극적 시간이, 이제 이 대화 속에서 곧 도달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예진이 왼팔에 그어진 세 줄기 흉터를 봤던 기억을 잊을 수 없었기에.
“아, 무슨 얘기들을 이렇게 오래 해요? 난 배고픈데?”
잠에서 깬 예니 목소리가, 잔뜩 긴장해 있던 내 어깨를 한순간에 풀어놓았다.
예진이 슬쩍 윙크를 보냈다. 아까 한 약속, 이제 이행 하라는 신호였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았다.
“아빠?”
예니가 나와 예진 사이에 슬쩍 몸을 들이밀며 앉았다. 이 불여우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말이 나왔다.
“그때, 아빠랑 싸운 거, 미안해. 그런데, 그거 때문에 지니 언니 따라 미국 간 건 아니야.”
이상하게, 예니는 늘 예진을 ‘지니 언니’라고 불렀다. 마치 어떤 세계를 상징하는 이름처럼.
예니가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벗어나고 싶었어. 디누 레거시에서.”
나는 가슴 깊은 곳을 긁는 아픔을 느꼈다. 내 기억은 2002년, 예니가 겨우 여섯 살이던 해로 거슬러 올라갔다.
“예니는 첼로 시키는 게 어때?”
정우, 세상에선 ‘디누’라 불리던 친구가 말했다.
그 앞에선 아홉 살 로사와 마리 쌍둥이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트리오 되잖아. 얼마나 보기 좋겠어?”
“왜 예니가 첼로야?”
정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마, 그거야 선착순이지. 누가 나보다 늦게 장가 가래?”
맙소사. 이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마치 태어나기도 전에 의형제가 되어버린 사조영웅전의 곽정과 양과처럼 아버지들의 우정 놀음 속에서, 딸들의 인생이 결정되어버렸다.
아이돌 기질이 다분한 정우는 심지어 이 이야기를 기자들한테 흘려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디누가 요절했을 때, 그의 아내는 유언처럼 세 아이들을 밀어붙였고, 나도 어느새 그 페이스에 휘말려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예니는 일찌감치 신동의 조짐을 보였다. 성인용 악기도 잡기 전에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디누’라는 이름의 공백을 아쉬워하던 청중들은 세 소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렇게 트리오는 결성되었고, 예니는 열 네 살에 데뷔했다.
트리오의 이름은 ‘디누’. 로사와 마리는 국적을 영국으로 바꿀 때 성도 디누로 바꾸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이름이었다. 이렇게 예니는, 반강제로 디누 레거시 중심에 끌려 들어갔다.
예니가 여우 느낌 안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빠 기쁘게 하려고 첼로 했어. 디누 존경했기 때문에 디누의 두 딸과 함께 연주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고. 하지만 철들고 나니 내가 선택한 것이 너무 없어 화가 났어. 더 화난 것은 청중이 내 연주보다 얼굴에 더 관심이 많았던 거야. 설마 싶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졌어. 난 진작부터 ‘아이돌’이라고 불렸는데 아빠만 모르더라.
쉬고 싶었어. 디누 레거시, 아빠들이 짜 놓은 인생에서 벗어나 진지한 나 자신과 만나고 싶었어. 그런데 쉬려면 소속사 승인을 받으래. 핑계가 없더라고. 어디 아픈 데도 없고, 무대 공포증 이런 거 진단 받아낼 수도 없고. 그냥 ‘나 힘들어요.’ 이러고 활동 중단하면 위약금 물어내고. 아빠가 너무 원망스러웠어. 어린 나를 계약이니 뭐니 복잡한 그물에 던져 놓은 게 아빠잖아?
이때 뤼미에르 이주란 전무가 제안했어. 아티스트 임대라는 방법이 있다고. EMG에서도 군말 없이 승인해 줄 거라고.”
맙소사. 여기서도 이주란이 등장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재능 있고 예쁜 소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다 나타나서 손을 뻗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니가 내 대답이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된 거야. 아빠 때문인 건 맞아. 하지만 야구장 사건으로 아빠랑 싸운 것 때문은 아니야. 훨씬 더 오래전, 나 여섯 살 때 그때 아빠 책임이 발생한 거니까.
엄마가 서식에 서명해 준 이유도 그거야. 내가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해 준거야. 아빠한테 얘기했으면 과연 뭐라 그랬을까? 과연 이해해 주었을까?”
말투를 들어보니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예니는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다만 그 마음을 마음 깊숙한 부분에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동안 소녀들을 물감처럼 사용하여 자기 작품을 만드는 이주란을 비난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딸을 대상으로 그 짓을 해 왔던 것이다. 이주란은 오히려 그런 예니에게 귀중한 휴식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무너지는 멘탈을 감추기 위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EMG에서 군말없이 승인할걸 그 사람은 어떻게 알았을까? 설마 거기까지 영향력이 미친거야?”
순간 예니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27년만에 처음으로 예니가 낯설어 보였다.
예진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쌤. 클래식 에이전시가 순수예술 보호기관인 줄 아세요? 장르만 다를 뿐, 결국 그쪽도 엔터사예요. 손익 계산 해봤을 거예요. 예니가 걸그룹 대형 투어에 참여하면 임대료 수익이 얼마나 되는지. 예니 정산분의 30% 정도로 임대계약 했을 거예요. K-pop이 클래식보다 시장이 훨씬 크니까, 소속사 입장에선 이쪽에 보내는 게 훨씬 ‘돈 되는’ 비즈니스죠.
죄송하지만 시니컬하게 표현할게요. 그 당시 트리오 디누는, 장르만 클래식일 뿐 소속사에겐 걸그룹이었어요. 예니는 그 걸그룹의 비주얼 센터였고. 10대 소녀들로 구성된 트리오가 순탄하게 데뷔하고, 스케쥴 표에 빈틈 하나 없이 연간 30회씩 연주회 잡히는 거 한 번도 이상하단 생각 안 해보셨어요? 그게 예술적인 이유만으로 설명 될 수 있나요?
디누 레거시? 쌤도 클래식 애호가면서, 같은 애호가를 그렇게 쉽게 보셨나요? 디누 레거시를 10대 소녀 셋이 감당한다고요? 최수민, 필립 강, 김소영 같은 디누 제자들이 현역으로 펄펄 날고 있는데? 클래식 애호가들이 과연 디누 레거시 때문에 이 소녀들 공연을 찾았을까요?”
꼼짝없는 외통수였다.
예진이가 ‘같이 있어줄게요’라고 말했을 때, 이런 상황이 올 줄 몰랐다.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진이가 예니보다 더 단호했다.
그런데 그게 도움이 되었다. 굳어 있던 예니 얼굴이 예진의 일격 이후, 조금은 원래 표정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마디 밖에 없었다.
“너한테 몹쓸 짓을 했구나.”
그러자 예니가 피식 웃었다.
“진짜 몹쓸 짓은, 지금 나를 굶기고 있다는 거야.”
예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자, 나가요. 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