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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소설 별이 잠드는 바다. 29화 모래성의 이데아

by 권재원

“예니 자네.”

“그러게요. 방에 들일까요?”

“자게 두렴. 모기향이나 좀 피우고. 우리 얘기나 계속하자. 그런데, 너, 코로나 끝나고 공연 가능해 졌는데도 넌 광고만 하더라.”

“지니가 많이 아팠거든요. 그런 끔찍한 일을 시켰는데 멀쩡할 리 없죠. 김예진으로는 무대에 설 수 없었죠. 지니는 루미 언니 비극 이후 믿음을 잃어버렸어요. 아름다움으로 사랑받을 믿음이 없는 아이돌은 아무 힘도 쓸 수 없어요.

광고는 달라요. 이건 이성의 영역이죠. 광고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제품이니까. 마케팅 포인트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위에 제가 가진 자원을 배치하는 거죠. 이건 김예진이 잘 할 수 있는 일이죠. 외모면 외모, 춤이면 춤.

요즘 젊은 아이돌들 보면 이 포인트를 종종 놓쳐요.

‘와, 예쁘다! 그런데 뭘 사라고요?’ 이런 광고를 만드는 경우가 많죠. 제품이 아니라 아이돌을 광고해 버리는 거죠.

제 광고주들은 이 본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돌로서는 환갑, 진갑 다 지난 저와 계속 작업 한 거죠. 나무위키에 지니 쳤더니 아 글쎄, 아이돌(은퇴)/CF모델 이 따위로 나와요. 그런데 부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품 뒤로 숨고 싶었죠.

김예진은 이걸로 충분했죠. 다만 지니에게 미안했어요. 그런 몹쓸 일까지 시켰는데, 용서 받으려면 지니에게 힘이 되는 일을 찾아야 했어요. 지니는 춤춰야 하니까.

그래서 찾은 곳이 성수동에 있는 GRND라는 댄스 스튜디오였어요. 중학생 예진이에게 너무 비쌌던 스튜디오. 감히 다닐 수 없었고, 대신 바우처 들고 이곳저곳 전전하면서 아이돌 댄스만 배웠죠. 그렇게 지니가 되고, 돈을 벌었지만 돈 한창 벌 땐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 아니면, 영영 못 한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겸손하게 초보자 김예진으로 기본 반에 수강 신청 하고 복장도 눈에 띄지 않게 했어요.

그런데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곳 수석 디렉터 리아 쌤이 대뜸 이렇게 말했어요.

‘지니님 오셨어요?’

겸손한 초보자 코스프레? 애초에 안 통하는 거였어요. 제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리아 쌤이 피식 웃더군요.

‘댄서들 중에 지니님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디렉터가 그렇게 대뜸 인사를 해 버리는 바람에 수강생들 사이에서도 정체를 숨길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너도 나도 와서 슬쩍, 정말 그 사람이 맞나 확인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신기해 하는 눈빛은 있었지만 내가 유노이아의 메인 댄서였다는데 대한 경외감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딱 좋았어요. 내가 바라던 분위기였으니까요.

리아 쌤이 말했어요. 목소리가 괄괄하시더군요.

‘자, 우린 몸으로 말해요. 인사 같은 거 나중에 시간 있으면 하고, 일단 몸부터 풉시다. 바로 라인 들어오세요. 어디 안무 복사기 성능 한번 볼까요?’

바로 춤을 시작하셨어요. 아무 설명도 없고, 음악도 없었어요. 저도 몸이 바로 반응했어요. 함께 춤 추었어요.

슬슬 호흡이 가빠질 무렵 리아 쌤이 동작을 멈췄어요.

전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챘어요. 방금 전 동작에 변형을 주어 나만의 리듬으로 춤을 풀었어요. 리아 쌤이 곧장 반응했죠. 다시 새로운 동작, 새로운 포즈들이 이어졌어요. 살아있는 레슨이죠.

한바탕 땀을 빼고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어요.

저는 춤 연습할 때 바닥에 앉지 않는게 버릇이 되었거든요. 힘들어도 꼭 서서 쉬어요. 무섭죠? 몸에 밴 청순돌 몸가짐.

우리를 보고 계시던 GRND의 원장 헤이즈 쌤이 한 마디 하셨어요.

‘지니님, 많이 하시네요.’

‘네?’

많이 하다니? 뭘? 다시 헤이즈 쌤이 말을 보탰어요.

‘하신 건 그냥 플로어에 흘려 버리세요. 주워담지 말고.’

제가 여전에 어리둥절하고 있자 원장님이 씨익 웃으며 길게 말씀하시더군요.

‘아이돌 분들, 춤 잘 추시죠. 이쪽 씬에서도 지니님, 시아님 인정해요. 하지만 그쪽 씬 분들은 춤 추기 전에 뭔가 많이 가지고 와요. 스토리, 감정, 구도, 메시지. 이런 것들. 그래서 춤도 많이 하세요. 그리고 그걸 꼭 담아 가죠. 다음 무대에서 꺼내 쓰게.

이쪽은 가져오지 않아요. 그러니 하지도 않죠. 혹시 가져 온 게 있으면 던져 버립니다. 그 차이는 뭘까? 우린 카메라를 보지 않아요. 관객도 신경 안 써요. 스토리도 없어요.

그냥, 내 안에서 무언가 올라오면 그걸 몸으로 흘려보내고 나한테 되돌려주는 거예요. 내 안에서 나와서 내 안으로 흘러가는 무브먼트. 그렇게 우리는 성장하죠. 보세요. 지니님, 지금 쉬고 계시지만, 지금도 뭔가 하고 계시죠? 힘들게 운동하고 편하게 앉지도 못하시네.’

이때 속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보조국사 지눌이 말씀하셨던가요? 한 순간에 깨우치고 수행으로 마무리 한다, 돈오점수.

어머, ‘아이돌’ 이 이런 말 하니까 이상해요? 플라톤, 보드리야르 말할 때 보다 더 놀라시네? 쌤. 이거 중학교 때 쌤한테 배운 거에요. 역사 시간에.”

나는 깜짝 놀랐다. 젊은 시절 어느 선배 교사가 “교사 유아목전 냉수불음 하라.” 이런 농담을 하며 껄껄 웃었는데 그 증거가 눈 앞에 나타났다.

내가 무심결에 한 말과 행동들이 얼마나 많은 아이들에게 무심결이 아닌 것들로 각인 되었을지 걱정되었다. 그나마 돈오점수는 무심결에 가르친 것 치고는 꽤 근사하긴 했다.

이때 예진이가 일어서더니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 뭐 하나 궁금하던 차에 이불을 들고 나왔다.

“열대야라도 체온보다는 10도 낮으니까요.”

예니에게 이불을 가지런하게 덮어준 예진이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돈오의 순간이 지나갔으니 점수의 시간이 이어져야겠죠. 사실 선불교에서도 진짜 수행은 돈오 이후의 점수니까.

열심히 했어요. 댄스 페스티벌도 여러 차례 나갔죠. 팀원의 한 사람으로. 수행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선 의식하지 않고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면서 오직 댄서로 참여했죠. 내가 아니라 춤이 주인공이 되도록.

혹시 알아보는 사람 없도록 메이크업도 아주 진하게 했죠. 청순돌 출신이라 메이크업 세게 들어가면 오히려 못 알아봐요. 심지어 어느 중소사 스카우터가 명함 주고 갔다니까요.

그렇게 1년 넘게 스튜디오 다녔어요. 제 짧은 삶에서 가장 마음이 풍족했던 시기였어요. 그러자 마음 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예진의 눈이 동그랗게 열렸다.

“나누고 싶었어요. 내가 얻은 이 풍성함, 평화, 기쁨. 이걸 동료들과, 후배들과, 그리고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팬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시선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느끼는 짜릿함의 기억, 이런 것과는 전혀 달랐죠. 받는 게 아니라 나누고 싶은 마음. 나를 착취하는 대신 나를 키우며 나누고 싶은 거에요.

감이 왔어요. 지니가 깨어났어요. 이때 원장님이 말씀하시더군요.

‘돌아갈 때가 되었나 봐요. 지니님. 받았으면 감사 드리고 잘 쓰세요. 원망하지 말고.’

세상에 그 분은 제 마음을 너무 잘 알고 계셨어요. 계속 머무르며 춤에 빠져들고 싶었지만 그게 제 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쌤도 교인이라 이해 하시겠지만.”

“으, 으흠. 그게, 성당 안 나간지 너무 오래라.”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선 저에게 많은 것을 주셨죠. 아름다운 용모와 춤, 그리고 보너스로 학업능력까지. 그런데 저는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많이 원망했어요. 공양미에 팔려가는 심청처럼 가족을 먹여 살리려 아이돌이 되어야 했을 때는 원망이 극대값이었죠.

하지만 성공했고, 많이 사랑 받았고, 훌륭한 멤버들과 자매가 되었고, 문제가 없진 않았지만 이 살벌하고 야비한 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디렉터와 회사를 만나 돈도 많이 벌었어요. 그럼 받아 들여야죠. 나의 춤을 추는 댄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춤추는 아이돌이라는 것을 저의 소명으로.

루미 언니의 죽음도 받아들였어요. 언니는 스스로를 던져 저 거대한 악과 싸웠어요. 그런데 그 죽음에 멘탈 무너져 도망가 버리면 언니가 던진 목숨은 뭐가 되나요?

그리움이 사무쳐서 루미 언니 옛날 영상들 봤어요. 사람은 가도 영상은 남죠. 공연이나 뮤비 말고 예능 클립들ㅇ자꾸 눈이 갔어요. 때로 청순하게, 때로 요염하게 변신하며 사람들을 너무도 행복하게 해주던 그 영상들. 아, 그것들 보면서 어찌나 많이 웃었던지. 언니가 떠났다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떠나지 않았죠. 이렇게 남아 있는데.

뒤르켐이라면 이게 긴장완화라는 중요한 사회적 기능이라고 말하겠죠. 마르크스라면 쇠사슬을 장식하는 장미꽃이라고 비판했겠죠. 아, 이것도 다 쌤한테 배운 거에요.

아무튼. 뮤지션, 댄서가 아닌 아이돌이라는 별도의 개념이 필요하다면 이런 기능 때문이 아닐까요? 아이돌을 착취하고 팔아먹을 궁리 하는 자본이 문제지 아이돌 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결심했어요. 돌아가자. 지니. 청순돌의 지존!”

예진이 말이 내 가슴을 정확히, 깊게 후벼 팠다.

지난 여름 서이초 선생님 죽음 이후 나는 무너지는 교권, 사회적 냉대, 멸시, 몰이해를 견디지 못하고 30년 넘게 지킨 교단을 정년을 6년이나 남기고 떠났다. 헌신이 욕먹고, 봉사가 모욕당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예진이는 그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착취와 폭력, 모욕과 상실을 겪었으면서도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것도기쁘게.

아이돌 나이 서른. 교사로 치면 오십대 후반이다. 그러니까, 꼭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이때 예진이가 눈을 가늘게 만들며 미소를 보냈다. 내 가슴을 긁고 있던 아픔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돌의 사회적 기능!

예진이가 미소짓는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2년만에 아이돌판에 돌아와 보니 난장판이었어요. 이주란 제국이 무너졌어요. 그 분의 망상이 점점 심해져 최강국 대표에게 도전장을 던졌대요.

코로나 기간동안 엔터사 실적이 나쁠 수 밖에 없는데, 그걸 빌미로 그 동안 키워왔던 반란표를 모아 대표이사 교체를 시도했죠. 하지만 최강국을 너무 쉽게 봤어요. 그럴 줄 알고 준비한 카드가 있었죠.

이주란 제국의 핵심은 이미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다엘, 세이 두 언니였어요. 뤼미에르 소속 아티스트들이 프리미엄 브랜드와 광고 계약 하려면 유노이아 뷰티 뮤지엄을 거쳐야 하죠. 뤼미에르 소속 아티스트 중에 세이 언니, 하린 언니 곡 안 받아 간 사람이 거의 없고. 결국 아티스트 대부분이 이주란 전무 라인이 되어버린 거죠. 그런데 이 언니들에게 ‘메모리아 스캔들’이라는 괴문서가 왔어요.”

“메모리아 스캔들? 그 친구들 8년 동안 스캔들은 커녕 연애설 하나 안 난 친구들 아닌가?”

“메모리아를 이주란 이사가 만들었다는 스캔들이에요. 몰래 중소 엔터사 하나 세워 거기서 메모리아라는 강력한 걸그룹 만들고, 성공하면 뤼미에르가 그 중소사를 인수하게 하고, 그때 뤼미에르의 지분을 확보한다는.”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차근 차근 알려 드릴게요. 먼저 이주란 이사가 사모펀드를 통해 중소 엔터에 우회투자해서 사실상 지배주주가 되어요. 그 사모펀드는 지인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그 지인과는 주식담보부 채권 계약을 하고. 그래서 뤼미에르가 중소사 인수하는 순간 채권 발동해서 중소사 대주주로 등극하고, 합병과 함께 뤼미에르 주주가 되어버린 거죠.”

나는 혀를 내둘렀다. 얼마 전에 봤던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여자 대통령이 오버랩 되었다.

“경영권 싸움, 권모술수, 뭐 아무래도 좋아요. 그런 바닥인거 아니까. 하지만 우리가 피눈물 나게 경쟁했던 팀이, 알고 보니 ‘내부인’, 그것도 우리가 멘토로 여겼던 분이 몰래 만든 팀이었다는 것. 그게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어요.

메모리아 안무 따라 하려고 숨이 턱에 차라 연습하고, 소이는 넘어지고 그랬잖아요? 팬덤끼리 싸우고, 우리끼리 분위기 이상해지고, ‘청순으로는 이길수 없다’는 결론 내리고 컨셉 전환까지 했어요. 뒤통수도 이런 뒤통수가 어딨어요?

한편으로 그러면 그렇지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모범생 서사의 빈틈. 학교를 움직이는 두 유형의 모범생. 도도한 유노이아와 다른 발랄한 메모리아. 작고 예쁜 유노이아가 넘을 수 없는 큰 피지컬과 단단한 팀웍. 누구 기획인지 정말 천재다 그러며 감탄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이주란.”

“아니, 그거 배임이잖아?”

“당연히 배임이죠. 최강국 대표는 메모리아 등장했을 때 바로 의심했대요. 이주란 말고 저런 팀 못 만든다며. 그래서 비밀리에 조사해서 증거 확보하고 있었어요. 자기 사람일때는 묻어두고 있다 반란을 일으키자 바로 푼 거죠.

가장 큰 충격은 메모리아 애들이 받았어요. 이게 뭐냐고요? 자기들이 무슨 트로이 목마? 걔들은 퍼포먼스에 정말 진심인 애들이었는데?

결국 멤버 중 둘은 솔로 한다며 팀을 나가 Mo:D로 갔어요. 어차피 무릎이며 허리를 많이 다쳐 댄서로 재기가 어려운 애들이었고. 연예계에 환멸을 느끼며 잠수 탄 애도 있고, 결혼한 애도 있고. 결국 시아, 아라 둘만 남았죠. 이렇게 국민 걸그룹 메모리아가 폭파되었죠. ”

한숨 밖에 안 나왔다.

“너, 그런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니? . 네가 생존자라고 한 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난 33년간 어항 속에 살았단 생각이 들어. 그런데 겨우 살아 나온 곳에 돌아가겠다고?”

예진이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구조하려고요.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바꾸겠다, 그럴 깜냥은 못되고요. 다만 작은 쉼터, 구명정은 되어 주고 싶어요. 행운이 겹쳐 그래도 남들보다 훨씬 좋은 처지니까. 그래서 쌤 계속 뵙자고 한 거에요.”

“내가 뭐 해 준 게 없는데?”

“들어주신 거. 내가 거쳐온 길의 그 모든 상처와 아픔에서 벗어났는지, 남을 돌볼 만큼 내가 튼튼한지 확인하려면 모든 이야기를 털어 놓아야 하거든요. 저한테 그럴 분은 쌤 한 분 뿐이에요. 이거 하나만 확인하면 저는 확신을 갖고 구조하러 가요. 동료들, 후배들, 꿈이 있는 소녀들을.”

나는 그게 무엇인지 기다리다 혀가 건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참을 망설이던 예진이가 수줍은 모습으로 말을 꺼냈다.

“지니를 받아주세요. 쌤이 기대했던 김예진의 ‘정규 루트’가 어긋나면서 만들어진 가련한 아이로 보지 말아 주세요. 정규 루트 만큼 잘 컸다고 칭찬해 주시고 예진이를 딸로 받아 주신 것처럼 지니도 딸로 받아 주세요. 그거면 돼요.”

그렇게 어렵게 할 말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에 마음을 정했으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안자고 이야기 했어?”

어느결에 일어났는지 예니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지니 언니 이야기는 정말 잘 들어주네. 어머, 정색하는 거 봐. 미안, 농담이에요. 나 들어가서 잔다.”

예니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더니 이불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예니가 왜 한사코 내 앞에서 ‘예진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지니 언니’ 부르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예진이도 몸을 일으켰다.

“저도 가서 잘래요. 내일, 이미 오늘이네요? 아침은 그냥 째고 점심 먹고 예니는 쌤 차에 태워서 같이 가세요. 전 좀 더 다니다 가게요. 수학여행 못 가본 인생이라 좀 더 다녀 보게요. 참, 어우양 나나라고 아세요?”

“아니. 뭐하는 사람이야?”

“모르실 줄 알았어요. 1년에 100억 번다는데. 검색해 보세요. 예니가 달라 보일 거에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오늘 정말 힘든 이야기 들어 주신 것 너무 고마워요.”

예진이가 공손하게 인사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예진이가 가르쳐준 대로 유튜브에서 어우양 나나를 찾았다. 전형적인 아이돌 상을 한 소녀가 기타 치고 노래하는 영상, 이런 저런 뮤직 비디오가 나왔다. 노래가 온통 중국어인 것으로 보아 중국이나 대만 아이돌이지 싶었다.

예쁘긴 했지만 1년에 100억을 쓸어 담을 정도는 아니었다. 노래도 춤도 그냥 보통의 아이돌에 불과했다.

수수께끼는 바로 풀렸다. 첼로 연주하는 소녀 영상이 줄지어 나왔다. 대단한 연주는 아니었다. ‘사랑의 인사’ 같은 소품들, 아니면 ‘라라 랜드’ 같은 팝을 첼로로 연주하는 정도였다. 연주 실력도 버클리 음대 졸업이라는 경력을 증명할만한 곡을 연주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돌의 얼굴을 한 소녀가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은 후광 효과 때문에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보다 몇 곱절 기품 있고 아름다웠다.

바로 예니가 떠올랐다. 아빠라 그런지 몰라도 예니의 용모는 어우양 나나 못지 않았다. 첼로 경력도 학교 졸업장 뿐인 어우양 나나가 비빌 상대가 아니다.

이주란이 예니에게 접근했을 때 6개월 뒤 돌려 보낼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6개월 임대 후 복귀 약속? EMG 클래식 에이전시가 그 약속을 지켰을까? 예니가 마음 굳게 먹지 않았다면 6개월이 1년, 1년이 3년으로 연장될 수 있었다.

예니가 얼마나 많은 유혹에 시달렸을 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아티스트로서 굳건히 버텨낸 것이다.

녀석.

공연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적어도 10억 이상을 포기한 셈이야. 예니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멋진 아이, 아니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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