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케이팝 소설 별이잠드는바다 28화 모래위의 이데아 3

by 권재원

교촌에 있는 고급진 한식당에서 조금 과한 저녁을 먹었다. 물론 50대 후반에 접어든 사람 입장에서 그랬다는 것이고, 20대인 예니는 그 많은 음식을 말끔히 비우고도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영국식 조크로 식욕을 정당화했다.

“영국에 오래 살면 세상 모든 음식이 다 맛있어.”

하지만 예니는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도 한 순간에 용서받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예니가 자기 마음을 털어 놓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예진이가 예니 손을 꼭 잡았다.

“같이 있어줄래?”

예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대청 마루에 앉아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클럽 이야기 기억나죠?”

예진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철저한 회원제로 연예인들 사적 만남 장소로 많이 썼다는 거기. 너랑 루미랑 다엘이 광란의 밤 보냈던?”

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기. 유노이아 졸업후에는 거의 안 갔어요. 외부와 차단된 장소로는 뷰티 뮤지엄이 더 편했으니까. 2018년 여름 끝 무렵, 그 클럽에서 사건이 터졌어요. 남자 아이돌 약물 유혹 있다고 말한 적 있죠? 그 클럽이 바로 약물 돌던 장소였어요. ‘비밀보장’이 이상하게 활용됐던 거죠.”

예진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가 위태롭게 이어졌다.

“몇몇 남자 연예인들이 구속됐고, 클럽 주인인 전직 아이돌, 그리고 그 소속사 대표까지 소환됐어요. 결국 남돌 몇 명의 일탈로 정리되는 분위기였지만 루미 언니가 새파랗게 질렸어요.

‘예진아, 미안해. 내가 저런 데 널 데려갔어.’

이러며 와들와들 떨었어요. 근데, 그 떨림이 단순한 미안함 이상이었어요. 꺼림찍했지만 더 물어 볼 수 없었죠.

다엘 언니는 침착하게 말했어요.

‘우리 뮤지엄에 고급 위스키랑 와인 다 갖춰져 있어. 저런데 갈 필요 없으니까. 언제든지 찾아와.’

루미 언니는 전혀 안심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 해는 대충 넘어 갔어요. 루미 언니는 불안해 하는 기색이었지만 활동 꾸준히 했고요.

2019년이 되었어요. 저는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남겨 두었지만, 계절학기를 세 번이나 풀가동한 덕분에 남은 학점이 거의 없어 바로 컴백 준비 들어갔어요.

Mo:D 레이블로 앨범 내기로 하고 세이 언니, 하린 언니랑 같이 신곡 작업 들어갔어요. 저도 작곡 참여했고, 안무도 짰어요.

컴백 계획은 이랬어요. 상반기에 음원 녹음 마치고, 여름에 뮤직비디오 촬영하고, 가을에 강화 루틴 들어가 몸 만들고 프로필이랑 티저 배포하고 12월 중순 쇼케이스.

2년 동안 CF, 화보 활동 꾸준히 했기 때문에 저는 여전히 활동 중이었고, 팬들은 제 잔여 학점까지 계산하면서 카운트다운 하고 있었죠.

그런데 경천동지할 뉴스가 나왔어요.

‘루미, 전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해. 활동 중단’

한국과 일본이 모두 발칵 뒤집혔어요. 사람들은 두 가지에 놀랐어요. 남자친구라니? 폭행이라니?

일단 폭행이라는 말에 놀라는 건 너무 당연해요. 쌤도 루미 언니 사진이나 영상으로 많이 보셨죠? 도대체 그 얼굴을 어떻게 때려요?

하지만 사람들은 ‘폭행’보다 ‘남자친구’라는 단어에 반응했어요. 댓글이 끝도 없이 쏟아졌죠.

‘루미가 남자친구?’

‘세상에… 배신이야.’

‘솔직히 부럽네, 그 남자.’

‘그거 상상하다 잠 못 잘 듯.’

루미 언니가 다친 것 보다 연애가 더 충격이었던 거죠.

말이 돼요? 쌤도 중학교때 제 주변에 남자애들 우르르 몰려다닌 거 기억 하시잖아요? 그런 애들 고르고 골라 놓은 게 아이돌이잖아요? 그런데 연애는 안된다?

더 기 막힌 건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죠. 유노이아 멤버 끼리도, 루미 언니에 대해서도, 메모리아 멤버들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만나는 남자가 있을 거란 생각을 아예 못했어요. 연애 능력이 퇴화되어버린 호모 사피엔스 아종처럼.”

“이주란은 어떻게 대응했어?”

“늘 그랬듯 선의는 분명한데, 뒷맛은 실망스럽죠. 일단 루미 언니에 대한 보호조치는 단호했어요. 이상한 댓글 다는 사람들, 전부 캡쳐해서 고발했고요.

언니는 저희 데뷔조 시절 썼던 숙소, 본사 사옥 13층으로 옮겨서 간호사 상주시키고 상처 아물 때까지 완전히 격리했어요. 루미 언니는 아이돌의 아이돌이기 때문에 망가진 모습 보이지 않으려는 조치였죠.

저도 처참하게 망가진 루미 언니 모습 후배들 한테 안 보이게 감추는게 맞다고 봐요. 하지만 다엘 언니 정도는 드나들게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몽땅 막아버릴 게 아니라? 그런 마음을 못 읽어요. 그 분은.

그런데 문제가 더 커졌어요. 전 남자친구라는 자를 폭행 혐의로 체포했는데, 수사 과정에서 그 클럽 마약 공급책이라는 게 밝혀졌어요. 일이 장난 아니게 되었어요. 루미 언니가 공범으로 몰릴 지경이 된 거죠. 10년간 한국과 일본에서 쌓아온 그 명성이 단숨에 무너질 판이었어요.

루미 언니는 절대 몰랐어요. 그 자식을 클럽 매니저로 알았어요. 비밀스런 클럽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걸 보고 그런 줄 알았지 설마 마약 배달한다고 생각 했을까요?

그러자 이주란 그 분은 루미 언니가 피해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최악의 선택을 했어요. 사실 선의의 분노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거에요. CCTV영상을 언론에 풀었어요.

그 분도 결사적이었을 거예요. 제국을 손에 넣었는데, 왕관의 가장 큰 보석이 깨질 판이라. 어떻게 해서라도 루미 언니한테 공범 혐의 안 가게 하고 싶었겠죠.”

예니가 예진이 손을 꼭 잡았다. 곧 나올 이야기를 알고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너무 힘드네요. 그래도 해야만 해요. 이걸 털어내야 내가 다음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예진이가 말한 영상은 나도 보고 충격 받았던 바로 그 영상이었다. 이주란은 이 영상을 언론에 제보함으로써 루미가 공범이 아니라 피해자라는 인식을 심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사의 실수, 혹은 고의로 이 영상이 유출되면서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영상은 어느 빌라 입구에서 시작되었다. 내 기억에도 남자는 매우 하찮아 보였다. 한국과 일본의 톱스타 루미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남자에게 루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돌려 달라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갑자기 루미의 팔을 꺾더니 내동댕이 쳤다. 루미가 맥없이 쓰러졌다. 남자가 쓰러진 루미에게 발길질을 했다. 일어나려 하면 걷어차고, 일어나려 하면 또 걷어찼다. 서너 번의 발길질 만에 루미가 실신했는지 축 늘어졌다. 남자가 축 늘어진 루미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가더니 억지로 일으켜 무릎을 꿇렸다.

“루미 언니가 무릎을 꿇었어요. 한국과 일본의 여신이, 아이돌의 아이돌이, 제 데뷔 때의 머나먼 목표가, 연습실에서 구슬땀 흘리고 있는 수많은 소녀들의 꿈이 저 하찮은 남자에게 무참하게 얻어맞고 머리채를 잡혀 무릎을 꿇었어요.”

예진이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그만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예니가 예진이를 안아주었다. 나도 루미의 비극을 알고 있었기에 함께 눈물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예진이가 진정될만하면 예니가 울고, 그래서 예진이가 다시 울고, 이러기를 몇 차례 반복한 다음 예진이가 자세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결국 루미 언니는 피의자로 소환되지 않았어요. 프레임 전환은 성공했죠. 문제는 소이가 완전히 무너졌어요. 디지털 성폭력하고 차원이 달랐어요. 그건 어쨌든 아름다움을 탐하는 비뚤어진 욕망이었죠. 하지만 이 폭행은? 아예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었어요. 그 얼굴을 보고도 사정없이 때렸어요. 아름다움이 폭력 앞에 너무 무력했어요. 소이의 세계가 무너졌어요.

이때부터 소이는 남자를 두려워했어요. 집과 뮤지엄 외 에는 어디도 가지 않았고, 좋아하던 VIP 이벤트도 뚝 끊었어요. 할 수 없이 모든 이벤트를 다엘 언니가 하드 캐리 했는데, 친구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한 언니는 어디 제 정신이었을까요?”

“너, 너는 괜찮았니?”

“아픔을 잊기 위해 새 앨범 작업에 더 열중했어요. 그렇게 꾸역꾸역 시간이 지나 여름이 되었어요. 앨범 녹음도 끝나고, 뮤비 촬영도 마쳤어요. 루미 언니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귀가했고요. 적어도 그렇게 믿었죠. 그러던 어느날 루미 언니한테 메시지가 왔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믿어줘.’

딱 이 한마디. 소름 끼쳤어요. 이런 메시지 느낌 오잖아요? 그래서 당장 답장을 보냈어요.

‘어디 안 갈 거죠, 언니?’

바로 답장이 왔어요.

‘가긴 어딜 가? 너 컴백 봐야지. 나도 컴백 할거고.’

일단 마음이 놓였어요. 그래서 한번 더 떠봤어요.

‘나 컴백 준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바로 답장이 왔어요.

‘에클라 -이건 뤼미에르 아티스트들이 애용하던 미용실이에요- 프라이빗 룸에 네 이름 자주 보이더라.’

그제야 안심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답장 보냈죠.

‘맞아. 언니 짬은 못 속이겠네.’

다른 한편 믿어달라는 게 대체 무엇일지 불안하기도 했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내가 언니를 반드시 믿어 주어야 하는 일이 일어났어요.

신문에 난 사진. 사진에서 루미 언니가 무슨 검사장과 경찰청 간부라는 남자들에게 술을 따라 주고 있었어요.

이제 클럽 사건이 몇몇 남돌들의 일탈에서 권력형 게이트로 확대되었어요. 사건을 덮은 배후가 드러났으니까요.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 사건의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어요.

루미 언니한테 비난이 쏟아졌어요. 아시아의 디바에서 가련한 피해자로 전락했다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권력형 비리를 조장한 팜므 파탈까지 굴러 떨어진거에요. 언니가 미리 연락 안 했다면 저도 배신감 느끼며 비난했겠죠.

밝혀진 사건은 끔찍했어요. 클럽 주인인 전직 아이돌과 소속사 대표, 그리고 다른 나라의 범죄조직까지 얽혀 있었어요. 그 범죄조직이 마약을 유통할 통로로 클럽을 이용했고, 루미 언니의 남자친구였다는 그 자가 배달책이었어요.

클럽 주인은 검찰, 경찰, 그리고 정치권의 유력 인사들을 포섭해 수사를 무마시켰는데, 그때마다 소속사 대표와 공모해 아이돌 지망생이나 정산이 어려운 아이돌을 동원해 접대했어요. 무슨 접대인지 차마 말할 수가 없네요.

클럽 주인, 소속사 대표, 검찰, 경찰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국회의원과 청와대 비서관까지 연루되어 사퇴했어요.

뤼미에르는 루미 언니와 계약을 해지했어요. 다엘 언니마저 루미 언니와 연락을 끊었어요. 가장 간결한 메시지는 인스타 언팔이죠. 정말 끔찍하죠. 절친이 인스타 언팔해버린 거 알면. 저는 믿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믿어 주려 애를 썼지만 솔직히 쉽지 않았어요. 그리고 한 달 뒤.”

여기서 예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2019년 가을. 출근했는데, 여자 선생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혀를 차고 있었다.

“아유, 이렇게 예쁜데. 이를 어째.”

몇몇 젊은 선생님들은 흐느껴 울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활짝 웃고 있었지만 기사 제목은 ‘루미 사망’이었다.

결과론이지만 루미를 끝까지 믿었던 예진의 판단은 옳았다. 사건 수사가 마무리 된 뒤, 이 사건의 내부 고발자가 다름아닌 루미였음이 밝혀졌다.

경과는 이랬다. 클럽주인이 남자친구 구명을 빌미로 루미에게 접대를 강요했다. 사건이 워낙 큰데다 검사장 급에 청와대 간부까지 구워 삶아야 했기 때문에 아이돌 지망생 정도가 아닌 깜짝 놀랄만한 카드가 필요했던 것이다.

쓸데없는 상상력을 차단하기 위해 밝히지만 성접대는 없었다. 그런 기대는 받는 쪽에서도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앉아있는 아시아의 디바, 그 자체가 가장 큰 쾌감이었을테니.

모멸감 속에 자리를 뜬 루미는 설마 했는데 정말 사건이 ‘덮이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구속이나 면할 정도 기대했는데 아예 사건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루미의 스마트 폰에는 권력자들이 힘에 도취되어 생각 없이 찍힌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권력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를 대비해 웨이터의 도움으로 찍어 놓은 사진이었다.

루미가 폭로하면 다시 사건이 수사 될 것을 두려워한 전 남자친구가 휴대폰을 빼앗았다. 그게 바로 문제의 무자비한 폭행 상황이다. 하지만 사진은 아이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휴대폰을 빼앗겨도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루미가 이 사진을 투척할 때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희생을 바탕으로 악의 소굴을 파괴하였고, 수많은 소녀들이 유린당하는 일을 막았다. 루미는 마지막까지 아이돌의 아이돌이었다.

내가 이렇게 회상하고 있는 동안 예니가 계속 예진이를 끌어 안고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드려 주고 있었다.

거의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이 고요히 흘러갔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얼굴과 표정을 수습한 예진이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루미 언니 장례 치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노래, 춤은 커녕 밥도 안 넘어갔어요. 그냥 집에 박혀서 칸나 노래만 듣고 또 듣고 그랬어요.

그렇게 사흘을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이한테 전화가 왔어요. 소이는 내성적이라 음성통화 안 하고 웬만하면 카톡이나 DM으로 해결하거든요. 그런데 전화라뇨?

느낌이 안 좋아 얼른 받았어요. 내 상태도 엉망이지만 소이는 저보다도 더 엉망이었으니까.”

“이해해. 그럴 수 밖에 없겠지.”

“소이는 이주란 이사를 엄마처럼, 다엘 언니를 친언니처럼 따르던 아이에요.

‘다은 언니가 정한대로 할게요.’

이게 소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죠. 그런데 그 무렵 다엘 언니 상태는 처참했어요. 당연하죠. 손을 놓아 버린 친구가 죽음을 선택했으니. 소이는 어땠을까요? 롤 모델의 비극적인 최후. 보호자라고 믿고 따르던 언니는 제정신이 아니고.”

“아.”

“소이가 전화했다는 건 정말 불안한 신호였어요.

‘무서워.’

아니나 다를까 전화 받자 마자 소이가 이렇게 말했어요.

‘무슨 소리야?’

‘다은 언니 라방해. 이상해. 무서워. 제발 어떻게 좀 해줘.’

깜짝 놀랐어요. 다엘 언니가 라방을? 아이돌 한창 때도 안 하던 짓을 이 상황에서? 머리 끝까지 소름이 돋았어요.

‘나, 지금 다은 언니 집으로 갈게. 너도 그리 와. 아, 아니다. 서진 언니 불러서 같이 와.’

전화 끊고 바로 인스타 열었어요. 설마 했는데 정말 하고 있더라고요.

생얼, 엉망인 머리, 퉁퉁 부은 눈에 검정 티셔츠 하나 달랑 입고. 그 언니가요. 숙소 있을 때도 흐트러진 적 없던 기품돌 다엘 언니가 저 말도 안되는 몰골을 온 세계에 방송하고 있었어요.

‘유니스 여러분, 밤이 늦었죠?’

그 말이 너무 다정해서 더 무서웠어요.

댓글창엔 “힘내요”, “언니 사랑해요”, “맘찢” 같은 말들이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있었어요. 마치 종이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지만 그저 무심하게 떨어지고 말았죠.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결국 소리 내어 울고 말았어요.

되는대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뛰어 나갔죠. 택시 부르려는데 너무 당황해서 마인 콜 앱 조작이 어려웠어요. 손가락이 덜덜 떨려서 도저히 터치가 안되요. 택시 포기하고 냅다 달렸어요. 마음 속으로 외쳤어요.

‘제발, 조금만 기다려 줘. 사랑하는 우리 리더.’

루미 언니 보낸지 얼마나 된다고 다엘 언니까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미친듯이 달렸어요. 하느님이 원망스러웠어요. 죄라면 아름답게 태어났을 뿐이에요.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해요? 왜 이렇게 쓰다 버려져야 해요?

언니 집은 멀지 않았어요. 아이돌은 독립해도 예전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얻는 경향이 있어서 집들이 다 거기서 거기에요.

언니가 집으로 쓰는 원룸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미친듯이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는 세이 언니, 그리고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소이 모습이 보였어요.

‘대답 안 해. 라방 끊어졌어. 어떡해? 나 어떡해?’

내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소이가 울부짖었어요.

세이 언니가 계속 문을 두드리며 말했어요.

‘119 신고했으니까 기다려.’

그러고 주저앉은 소이를 일으켰어요. 다들 엉망인데 세이 언니만 차분한 모습에 예쁘장한 얼굴 그대로였어요. 역설적이게도 우리 중 가장 아이돌을 그만두고 싶어했던 세이 언니가 셋 중 누가 봐도 아이돌 얼굴이었죠.

빨리 신고한 덕에 제가 도착할 때 이미 구조대원들이 줄 타고 들어가는 중이었어요. 곧 문이 열리더니 구조대원들이 축 늘어진 다엘 언니를 들것에 싣고 나왔어요. 푹 젖어 있었어요. 수면제 잔뜩 먹고 욕조에 들어가 있었대요.

법이 바뀌어 수면제 성분이 달라져 치사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언니가 그것까지 몰랐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어요. 치료 자체는 금방 끝났어요. 기자들 냄새 맡기도 전에. 결국 보도는 친구를 잃은 슬픔에 실신했다 정도로 나갔어요.”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병원에 여학생들 엄청나게 몰려와 꽃이며 촛불이며 놓고 가는 거 뉴스에 나왔지. 여자 아이돌인데 왜 온통 여학생들이지? 이런 생각했고.”

“다은 리더, 다엘은 소녀들의 영원한 리더니까요. 유노이아는 보통 아이돌이 아니었어요. 남자들이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라, 여자들이 꿈꾸는 사람, 되고 싶은 사람. 롤 모델이었어요. 해체 이후에도 완벽했죠. 나는 대학교 마무리하고, 솔로 데뷔 준비 중. 언니들은 각자 회사를 만들어서 사장님 되고. 그런데 이게 뭐예요. 뭐가 이렇게 돼요. 너무 충격적이고, 너무 화가 났어요.

다행히 다엘 언니 마저 잃어버리진 않았지만. 이런 일 까지 겪었으니 더 이상 리더로 기억할 수 없게 되었잖아요? 그게 너무 아팠어요. 소중한 추억을 빼앗긴 느낌. 언니가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언니. 나, 컴백 못할 거 같아. 미안해.’

병실에서 물러나오면서, 세이 언니에게 겨우 말했어요.

차마 하면 안 되는 말이었어요. 지난 반년 동안, 세이, 하린 언니가 저를 위해 만든 곡이 다섯 곡이에요. 녹음 다 끝났고, 뮤비 두 개 찍었고, 프로필 촬영까지 마쳤어요.

앨범 제작이랑 쇼케이스만 남았는데 지금 와서 이러면 믿음을 배신하는 거잖아요. 돈도, 몇 억은 들어갔을 텐데.

하지만 세이 언니가 내 손을 꼭 잡아 주더니 언니 다운 말투로 대답했어요.

‘괜찮아. 나도 그 생각 했으니까. 이 상황에 신곡 내고 쇼케이스에서 방실방실 웃으면 잡년이지. 너가 일정대로 진행하자고 했으면 붐 마이크로 후려 갈겼을 거야. 찍어 놓은 음원, 영상 몇 달 묵힌다고 어디 가냐? 천천히 하자. 대신 약속 좀 하자. 소윤이, 너도.’

우리가 모이자 세이 언니가 말했어요.

‘우선, 주란 쌤이랑 하린이한텐 오늘 일 절대 말하지 마.’

‘네.’

그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하린 언니는 마음 약해서 이런 상황 못 견디니까. 그리고 이주란 이사는, 미안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움 되는 분은 아니고.

‘너희도 절대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알았지? 이상한 생각 조금이라도 들면 연락해. 가만 있자. 소윤아.’

‘네?’

‘당분간 나랑, 하린이랑 같이 지내자. 어때?’

훌쩍 거리다 덜덜 떨기를 반복하던 소이가 그날 처음으로 활짝 웃었어요. 언니가 꼭 있어야 하는 아이니까.

‘예진이 너는?’

‘나까지 가면 그냥 숙소 어게인이네? 괜찮아요. 언니 너무 부담 많이 가질 거 없어. 컴백 미룬 것도 미안한데.’

‘알았어. 그래도 생각 바뀌면 들어와. 잘 데 없으면 스튜디오에 매트리스 깔면 돼.’

세이 언니가 쿨하게 대답했어요. 이때는 몰랐어요. 저도 마음 약한 소이나 하린 언니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결국 그 약속을 깬 건 바로 저였어요.”

순간 나는 예진의 왼팔에 그어진 세 줄기 흉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이는 언니들이랑 지내고, 저는 제자리에서 마음을 정리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아니었어요. 정신적 상처는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심연을 긁거든요.

그때는 괜찮을 것 같았어요. 말도 잘하고, 밥도 잘 먹고, 가끔 웃기도 하고, 입꼬리 올리고 광고도 찍었어요.

놀라지 마세요. 그게 우리 삶이니까요. 세계내 존재가 아닌 형이상학적 이데아의 인격화. 그게 몸에 배다 보니 스스로를 속여요. 우린 이데아를 흉내냈을 뿐 절대 형이상학적 존재일수 없는 건데 속고 말았어요. 함께 있었어야 했어요. 같이 있어야 누가 무너지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요.”

말을 마치자 마자 예진이 왼팔을 들어 올려 내 기억속의 그 세 줄기 흉터를 들어 보였다. 달 항아리 같은 아이돌 피부에 그어진 흉터.

예니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아까와 반대로 예진이가 예니를 쓰다듬어 주더니 마치 밀린 숙제는 마무리 짓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코로나가 세계를 덮치고 모든 시계가 멈췄어요. 컴백 미룬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어요. 팬들에게 컴백 미룬다는 미안한 말 안 해도 되었고.

메모리아는 치명적인 위기에 부딪쳤어요. 모든 세팅이 대규모 공연에 맞춰진 팀이라 코로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어차피 코로나가 아니라도 정상 가동될 상황이 아니었고요.

2019년 그 가을, 그 끔찍한 가을에 메모리아는 길고 긴 투어 일정을 소화 중이었어요. 올림픽 체조 찍고 홍콩, 가오슝, 타이페이, 오사카, 요코하마, 도쿄를 찍고, 태평양을 건너 LA, 샌디에고, 피닉스, 샌 안토니오, 오스틴, 휴스턴, 마이애미를 도는 일정이었죠.

미국 일정이 중간 쯤 진행될 무렵 루미 언니 소식이 전해졌어요. 하지만 이미 스케쥴은 정해져 있고, 3000-5000석 규모의 공연 네 개가 매진 상태에서 기다리고 있었죠. 이게 아이돌 세계에요. 어쩌겠어요? 가슴은 울어도 입 꼬리 올리고 경쾌하게 춤 추고 노래 해야죠.

쌤. 저 작년 서이초에서 제 또래 젊은 선생님이 목숨 끊었을 때, 거리에 수십만명의 선생님들이 검은 옷 입고 뛰쳐 나온 거 보고 놀랐어요. 그렇게 함께 움직이는 것에 놀랐고, 함께 움직이자 온 국민이 지지하고 위로해 주는 것에 놀랐어요. 그만큼 존중 받는 직업이란 거에요.

저희는 말이 좋아 스타니 뭐니 그랬지 가장 큰 별이 떨어졌는데 다 같이 애도할 시간도 주지 않아요. 모두 입꼬리 올리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러 뛰어야 했어요. 그게 세상이 우리를 보고 다루는 방식이었죠.

그 시절 메모리아 미국 투어 직캠 보시면, 몇몇 멤버들이 고개 푹 숙이고 춤추는 거 볼 수 있을 거에요. 고개를 왜 숙였는지 설명이 필요할까요?

그런데 메모리아는 안무가 거의 서커스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거든요. 보통 사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전문가 눈에는 가슴 철렁한 크고 작은 실수가 잇따라 일어났고, 결국 미국 투어 마칠 무렵 완전히 부상병동이 되어 돌아왔어요. 그 중 둘은 은퇴를 고려해야 할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어요.유노이아는 마음을 메모리아는 몸을 다쳤죠. 아픔마저 팀 컨셉 따라 가다니 정말 잔인하죠.

아, 우리를 잔혹하게 다루는 사회 이야기 하자면 평창 동계 올림픽 이야기 안 할 수가 없어요.”

예진이 이 참에 모든 한 맺힌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기세로 말했다.

“2018년 1월. 뤼미에르에 평창 동계올림픽 전야제에 소속 아이돌 출연시켜 달라는 협조 공문이 왔어요. 말이 협조지 차출이죠. 칸나는 일본 그룹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제외 제외되었고, 유노이아와 메모리아 차출을 요청했어요. 이 멍청한 관료들은 유노이아 해산 한 것도 몰랐어요. 회사에서 그렇게 답신을 보냈더니 그럼 저하고 하린 언니를 보내라고 답이 왔어요. 팀은 해산 되었지만 둘은 여전히 소속 아티스트로 되어 있지 않냐는 거에요. 메보, 메댄이라도 보내라 이거죠.”

“아니, 그게 무슨 심보야?”

“그 사람들은 아이돌이 불러다 놓기만 하면 노래며 춤이 그냥 나오는 자동인형인줄 알아요. 하지만 저랑 하린 언니는 준비해야 할 게 한 두개가 아니었어요. 활동 안 한지 벌써 반 년이라 춤출 수 있는 몸부터 만들어야 하고, 의상도 새로 만들어야 하고, 5인조가 2인조가 되었으니 안무도 새로 짜야 하고. 두 사람 뿐이라 댄스는 가볍게 넣고 보컬 중심으로 준비했어요.

그런데 행사장에 갔더니 장소가 극장이 아니라 야외에요. 날씨는 영하 10도를 오르내리고 한파 주의보까지 발표된 상태인데. 대기실이라곤 석유 스토브 두개 들어있는 천막. 거기서 롱패딩 입고 기다리는데, 하린 언니가 덜덜 떨면서 이러는 거에요.

‘댄스로 가자. 보컬로 갔다간 나 얼어 죽을 거 같아.’

‘지금 바꿔도 괜찮아?’

‘우리 짬을 믿자. 그런데 넌?’

‘메인 댄서의 위엄 아직 살아있어. 바꾸자 바꿔. 나도 얼어 죽기 싫어.’

천막 안에서 안무를 급변경하고 얼른 합을 맞춰 봤어요. 짬의 힘이 무섭긴 하대요. 바로 모드 변경 가능하긴 했죠.

우리 소개하는 MC멘트 들리고, 롱패딩 벗어 던지고 무대로 확 뛰어 나가는데, 나가자 마자 살이 찢어지고 코가 찡했어요. 아무리 청순돌이라도 걸그룹 의상 뻔하잖아요? 영하 10도에 알몸 들이 댄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세 곡을 펄쩍 펄쩍 뛰며 쉬지 않고 계속 달렸어요. 몸에 열 좀 나라고.

그런데 정신나간 진행자가 저 더러 영어로 외국 손님들에게 토킹 타임 하라는 거에요. 이게 영하 10도에 크롭에 짧은 치마 입고 나온 숙녀에게 할 말인가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국가 행사라는데.

그날 저녁 둘 다 바로 감기 걸려 일주일 고생했어요. 그나마 저희는 그게 전부였지만 메모리아는 더했어요. 걔들은 ‘국민돌’이고, 운동 선수 같은 건강미가 올림픽 하고 깔맞춤이라 올림픽 기간 내내 붙들려 평창, 강릉, 정선 오가며 온갖 행사에 동원되었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속이 덜컹 내려 앉았다. 그날 나는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에 나라를 대표하여 외국 손님들 앞에서 공연하고 유창한 영어로 환영의 말을 전하는 예진이의 모습을 무척 대견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예진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2020년. 코로나로 모든 것이 멈추었어요. 메모리아는 가동 중지 상태가 되었고, 예쁜 애들 나와서 틱톡이나 숏폼에 20초 짜리 중독성 강한 노래와 춤으로 바이럴 띄운 뒤 광고 끄는 그런 것들이 새 트렌드라며 등장했어요. 기존 팀들도 가장 예쁘고 매혹적인 멤버들을 중심으로 자극적인 숏폼 만들어 광고 유치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더군요. 메모리아라면 시아만 계속 돌리는 방식이죠.

심지어 이주란 전무도 그런 감각적이고 찰나적인 이미지의 걸그룹을 런칭했고 역시나 성공시켰어요. 지금 한창 전속 문제로 시끄러운 ‘블루 휘스퍼’죠. 유노이아, 메모리아, 파스텔에 이어서 네번째 성공이죠.

전 이거 저거 다 싫었어요. 루미 언니도 유노이아도 다 잃어버렸고, 컴백 계획은 박살 났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시간은 가고, 나이는 먹고.”

“우울증이네.”

“그러게요. 옆에서 누가 그렇게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아무도 없었죠.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죠. 저도 코로나도. 그런데 몇 달만 기다리면 정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세상이 1년이 지나도 그대로였어요.

컴백하고 미국 투어 때 쓰려던 음원과 뮤직 비디오를 마냥 묵혀둘 수 없어 릴리즈 해버렸어요. 몇 백억 들여 만든 영화도 개봉 못하고 넷플릭스로 풀던 시대니, 딱 그 꼴이죠. 그래도 수백억은 아니고 수억이니 그나마 다행일까요? 다행히 스트리밍이 많이 되어 큰 손해는 안 봤어요.

쌤, 그때 온라인 수업 하셨죠? 전 온라인 컴백 했어요. 하지만 제가 꿈꾸던 컴백은 이런 게 아니었어요. 수천개의 눈동자가 저를 향해 쏟아지고, 거대한 사랑을 주고 받는 그런 거였어요.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어요. 코로나가 영원할 것 같았고, 언택트가 뉴 노멀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어요. 그렇다면 집단 컨택트에 기반한 우리 같은 아이돌은 올드 노멀이니 도태되어 사라져야 한단 뜻일까요?

어마어마한 공허가 마음을 덮쳐왔어요. 지니가 미웠어요. 가족 생활비 1000만원이 필요해 지니가 되었어요. 노래와 춤을 사랑했지만 지니가 되지 않으면 기회를 주지 않아 계속 지니로 남아야 했어요. 공연만 하면 안되고, 매혹도 시키고, 애교도 떨어야 한다고 해서 애교쟁이 지니가 되었어요.

지니가 되었기에 루미 언니를 만났고, 지니가 되었기에 루미 언니 때문에 이렇게 아파야 했어요. 지니가 되었기에 수천개의 시선을 받으며 사랑받는 기쁨을 알았고, 지니가 되었기에 그게 사라졌을 때의 공허에 고통받게 되었어요.

지니만 아니었으면 이토록 괴롭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지니만 아니었으면 루미 언니의 죽음, 다엘 언니의 무너짐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았을 텐데, 지니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이 이상한 세계에서 벗어나 평범하지만 오붓하게 김예진으로 살고 있을텐데, 이런 생각이 가시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지니만 사라진다면 모범생 김예진으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어요.

지니를 지우더라도 모범생 김예진은 남부럽지 않은 학벌도 갖췄어요. 수천의 눈동자, 환성, 갈채, 사랑, 이런 것들만 잊을 수 있다면, 잘 살 수 있을 거에요. 지니와 함께 그 기억도 다 떨쳐버리고 싶었어요.

‘지니, 너에게 자결을 명한다.’

마침내 김예진이 명령을 내렸어요. 지니는 저항 없이 명령에 복종했죠. 꼴에 엘리트돌이라고 세네카 흉내를 냈어요. 하얀 슬립을 토가처럼 입고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놓고 몸을 담궜어요. 그리고 컷터 칼로.”

예진이 왼팔의 흉터를 가리켰다.

“그런데 힘이 모자란 건지 자리가 틀린 건지 정맥이 그어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세 번을 그었죠. 어쨌든 피가 흐르기 시작하고 욕조의 물이 시뻘겋게 물들었죠. 그 속에 담긴 하얀 슬립도 시뻘겋게 젖어 들었어요.

그대로 정신을 잃었는데 눈 떠보니 병원이었어요. 시아가 너무 울어 퉁퉁 불은 눈을 하고 병상 옆에 앉아 있었고, 화가 잔뜩 난 세이 언니 얼굴도 보였어요.

‘웰컴 홈.’

세이 언니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뱉았어요. 나는 차마 언니 볼 낯이 없어 얼굴을 가렸어요. 왼손 손목 위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더군요.

세이 언니가 말했어요.

‘너 루미 언니 팬이었던거 알아. 그럼 시아가 네 팬이란 것도 기억 해 줘. 그래도 진짜, 죽겠으면 말이지 다 모여서 같이 가자. 남은 사람 괴롭히지 말고.’

그리고는 가방에서 뭘 뒤적거리더니 종이 한 뭉치를 툭 던졌어요.

‘너 음원하고 뮤비, 꾸역꾸역 조회수 채워서 정산 나왔으니까 확인 좀 하고.’

아무렇게 던지는 말 같지만 그 속에 뼈가 있고 애정이 있었어요.

정산표를 받아서 넘기고 있는데, 문득 내가 그 종이를 왼손으로 넘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김예진은 왼손잡이.

만약 그날, 제가 왼손으로 칼을 들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니는 오른손잡이. 멤버들 모두가 오른손잡이라 혼자만 왼손 들면 모양이 어긋나니까 지니는 오른손을 썼어요. 하지만 오른손은, 왼손보다 약하고 서툴렀죠.

지니에게 자결을 명했어요. 그리고 지니는, 본능처럼 오른손에 칼을 들었어요. 그 덕분에 김예진이 살아남았어요.

우연일까요? 어쩌면 지니가 마지막에 나를 살려준 것 아닐까요? 그래서 성형 수술도 거부했어요. 이 흉터는, 지니가 예진에게 남긴 경고장이자, 메시지예요.”

keyword
이전 27화케이팝 소설 별이 잠드는 바다 27화 모래성의 이데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