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그의 제자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 종교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에 이미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그런 만큼 크리스마스만큼 중요한 날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하지만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로 고정되었지만, 부활절의 날짜는 계속 바뀐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속한 유대인들은 우리와 비슷한 음력을 사용했는데, 우리가 억지로 부활절을 태양력으로 바꿔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음력인 추석 날짜가 매번 다르죠.
예수는 '유월절'인 금요일에 죽었다고 합니다. 유대 달력에서 유월절은 새해 첫 달의 첫 보름달이 뜨는 날입니다. 음력에서는 초승달이 뜨는 날을 1일, 보름달은 14일째 되는 날로 정했지만, 태양력에서는 달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시간이 흐릅니다. 그래서 보름달이 뜨는 날짜와 이에 연동된 부활절은 태양력에서 매번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유월절은 로마제국에서도 가장 폐쇄적이고 마이너 민족인 유대인의 날입니다. 기독교가 동네 종교에 머물렀을 때는 크게 문제가 안되었으나, 점차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문화를 가진 로마 서부로 퍼지자 혼란이 왔습니다.
도대체 유월절이 언제야?
지금은 우리에게 구글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는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함부로 외부 사람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죠. 유대인에게 매번 유월절이 언제인지 물어봐야 했지만, 아시다피시 유대인과 기독교인 관계는 썩 좋지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날이었지만, 정작 정확히 알 수 조차 없었던 것이죠.
일반적으로 예수는 금요일인 유월절에 죽고, 일요일에 부활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성경 자체가 역사적 사실보다는 믿음을 전달하기 위해 쓴 책이다 보니, 예수가 죽은 날조차 다릅니다. 요한복음과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날짜가 일치되지 않아서, 아직까지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수많은 이론이 있을 정도. 예를 들어 요한은 로마식 달력에 따라 날짜를 표현했고, 마가복음을 쓴 마가(Mark)는 유대식 달력을 사용하여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실제로 유대식 달력에서 하루 시작은 해가 진 후(유대인은 달과 관련된 태음력을 사용했다)라고..
유대 문화가 친숙한 로마의 동부에서는 예수의 희생에 더 초점을 맞춰 유월절을 기념했고, 서부에서는 부활한 날을 기념했습니다. 아무래도 유월절은 유대 문화와 깊숙이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문화를 혐오하는 서방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었죠.
(※ 유월절: 유대인의 중요한 명절 중 하나로, 그날 어린 양을 잡아먹으며 신에게 기도한다)
그래서 서방에서는 유대인만 아는 유월절 대신 봄을 시작하는 그 해 첫 달의 첫 보름달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전편에서 바로 그런 날을 살펴보았죠. 바로 춘분입니다. 서양에서는 봄의 시작을 춘분으로 봤고, 유대 달력의 유월절을 춘분 후 첫 보름달로 정했습니다.
부활만큼은 확실하게 일요일에 발생했다고 한 만큼, 보름달 후 첫 일요일에 부활을 기념했습니다. 근데 당시 기독교 세계는 모두 로마제국이었습니다.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있는 상황인 것이죠. 초창기에는 각자 믿는 대로 기념을 하기로 했지만, 점차 기독교가 패권화 되자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사실은 점점 강력해지는 기독교 조직에서 누가 주도권을 갖느냐에 대한 세력 다툼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예수가 죽은 날인 유월절을 기념할 것인가, 부활절을 기념할 것인가?, 부활절을 기념한다면, 정확한 춘분은 언제인가?
유월절을 기념하는 동방에서도 작게나마 부활절을 기념하기도 했고, 혹은 한 번에 퉁쳐서 같이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율리우스 력에서는 약 128년마다 1일씩 오차가 발생했는데, 어떤 곳에서는 달력에 표시된 날짜(3월 25일) 그대로 춘분을 지내는 한편, 천문학이 발달한 곳에서는 이러한 오차를 조정한 다른 날짜에 춘분을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제각각. 개판 5분 전 상황이었죠.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다양한 기독교 논란들을 해결하는 공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직접 주관한 것으로 유명한 325년 1차 니케아 공의회입니다.
수많은 논쟁 끝에 유월절 준수를 폐지하고, 부활절을 준수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서방 세력, 즉 로마 교황의 손을 들어준 것이죠. 물론 예수를 죽인 유대인의 중요한 명절인 유월절을 기념하기 싫다는 반감 또한 한몫했습니다.
또한 부활절의 날짜가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 춘분 이후 ⓑ 첫 보름달이 뜬 다음에 오는 ⓒ 일요일'이 바로 부활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춘분 또한 3월 21일 고정했습니다.
기원전 45년 율리우스력이 실시되었을 때, 춘분은 3월 25일이었지만, 약 128년마다 1일씩 오차가 생긴다는 점을 고려한 적절한 오차 조정이었죠.
개인적으로, 크리스마스처럼 매년 같은 날 부활절을 기념해도 큰 문제점이 없을 것 같지만,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비록 애매모호하더라도 언제 부활을 했는지 그 기록이 성경에 남아 있지만, 태어난 날 기록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있었다면, 당시 유대인은 태음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부활절처럼 매번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죠.
정확히 말해서, 크리스마스는 예수가 태어난 날이 아니라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날에 불과합니다. 물론 청춘 남녀 대부분에게는 특급 호텔 비용을 내고서도 빈 방을 구하지 못하는 화끈한 날로서의 의미가 더 크겠지만..
그럼, 어쩌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게 된 것일까?
현 인지도와 반대로, 크리스마스는 공식적으로 350년에야 예수의 탄생일로 선포되었습니다. 부활절이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제정된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늦은 편에 속하죠. 물론 중요한 날이긴 하지만, 살짝 그 중요성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로서, 종교로서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다신교 사회이었던 로마에서는 기독교 외에도 다양한 종교가 많았습니다. 특히 오랜 역사를 거치며 상당한 수준의 신학적 교리를 쌓은 동방과 자주 접촉하며, 새로운 종교가 유입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고대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미트라 교.
특히 로마 황제와 군인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졌습니다. 미트라교의 '무적의 태양신'이 군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의 상징이 태양이다 보니..
무적의 태양신
태양의 신인만큼, 오랜 어둠의 시간이 끝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가 가장 큰 기념일이었습니다. 현재 동지는 12월 21 or 22일이지만, 당시 율리우스력에 따르면 바로 12월 25일.
즉, 오늘날 크리스마스입니다.
뭔가 감이 오지 않나요? 기독교보다 앞서 번영한 미트라교는 기독교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크리스마스 날짜, 구원, 물의 상징부터 중세 기독교 미술과의 연관성까지..
많은 학자들이 미트라 교가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 종교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지지합니다. 민간인 사이에 퍼진 기독교와 군인들 사이에 퍼진 미트라교. 하지만 쪽수만 비교해 보아도, 사실상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죠.
혹자는 이러한 공통점을 이용, 세력을 확대하는 교회 측에서 12월 25일 행사에 참여한 미트라교를 그대로 흡수하기 위해 그날을 크리스마스로 정했다는 주장을 합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는 기독교가 이교도 문화를 차용해 발전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절이 'resurrection'이 아닌 'easter'인 것 또한 바로 이교도 문화에서 유래했습니다. 게르만족이 봄의 여신(Eostre)에 대한 축제에서 그 이름을 빌렸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후, 게르만족 세상이 왔습니다. 대부분 농경사회 사회에는 춘분이 오면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는 했죠. 일반인들은 그 신이 기독교의 신이든 과거 전통적인 신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봄의 여신에게 지냈던 축제가 어느순간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이 정도 '사바사바'는 충분히 할 수 있었죠.
모아이 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의 이름은 부활절에 발견되었다는 사실에서 유래
부활절을 정하는 기준, 바로 춘분!
춘분은 음력을 사용했던 동양 고유의 절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태양의 운행과 관련된 절기입니다. 따라서 서양에도 있는 기념일이며, 태양력에서는 매년 정해졌습니다.
춘분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양력 3월 21일로 확정되었지만, 2월 29일이 있는 해는 20일입니다.
하지만 1582년에는 10일이나 오차가 누적되어, 태양이 춘분에 해당하는 위치를 지날 때 율리우스 달력으로는 아직 ‘3월 11일’에 불과했습니다. 이 정도는 일상생활에 크게 문제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신앙이 사회를 지배했던 중세 시대, 가장 중요한 축일의 날짜가 틀렸다는 것은 곧 악마의 농단에 휘둘린 결과로 이해되었습니다. 신에 의해 설계된 우주는 완벽한 질서를 가졌다고 생각한 당시로는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과학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이었죠.
To be continued..